▣ 116화
대강 협약이 마무리되어가자 나는 문서에 적힌 대로 다시 오토와 필리프를 인계받았다.
“오토, 그대는 내가 고맙겠지. 필리프. 그대는 내가 미울 테고. 하지만 고마워할 것도, 미워할 것도 없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나는 황제 폐하의 편에 서서 싸웠을 테니.”
내 말에 필리프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버지의 아들이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일원으로서 백작 각하는 증오스럽습니다. 하지만 니스의 재무관이자 검은 용군단의 일원으로서 백작 각하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흐음….”
“그렇기에 백작 각하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이번 일을 통해 제게 부족한 부분을 배워나가 저 자신을 갈고닦는 게 황제의 아들로서 제가 행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이거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아무튼, 지금 내게 복수하고 싶더라도 5년 동안은 참아주게.”
어차피 협약 때문에 5년 동안은 내게 붙잡혀 있어야 한다. 그 기간만큼은 필리프도 딴생각 안 할 테니 열심히 굴려줘야지.
거기에 극적으로 화해를 하기는 했지만 모든 갈등이 봉합된 건 아니었다. 이번 협정은 곪아 터진 내부를 손보지 않고 그저 외부만 봉합한 것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은 별다른 이상이 없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곪고 곪은 상처가 터져 나오겠지. 그때는 봉합은 고사하고 흘러나오는 고름을 치우기에도 급급할 것이다.
일단 선제후들 입장에서 작센이 무너져야 대주교들이랑 같이 얻는 게 있는데 황제가 혼자 바이에른 먹고 손절해버리니까 어? 뭐지? 버근가? 싶을 거다. 그게 곧 불화로 이어졌을 테고.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선제후들이 병력을 끌고 이탈한 것만 봐도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황제 입장에선 굳이 더 싸워봤자 얻을 것도 없고 질게 뻔한 데다 원래 의도했던 바이에른을 먹고 다른 선제후들을 키우지 않았으니 이래저래 평타는 친 셈이고.
반대로 사자공은 살아남기는 했지만 두 번 다시 이전과 같은 위세를 펼치지 못할 것이다.
신라의 통일이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사자공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 황제와 대적한 게 아니라 나라는 세력을 끌어들여 막아낸 것에 불과하니까.
반면에 나는 엄청나게 이득을 봤다. 일단 우리 대빵이라고 할 수 있는 칼리나가 선제후로 임명됐다.
지금 와서 선제후가 큰 의미가 있나 싶겠지만 많은 제국들이 망한 지 오래인 로마의 이름에 집착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다.
그리고 이번 일로 신성 제국은 물론이요, 온 유럽이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얻었지만 난 여기서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발톱이 뽑힌 사자공은 이빨마저 뽑히기 전에 세대교체를 하려 할 테고 그 지위를 물려받을 건 오직 오토뿐이다. 그러니 오토가 자리를 물려받기 전까지 열심히 그를 세뇌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프리드리히 역시 자신의 힘이 더 약해지고 귀족들이 분열되기 전에 장남인 하인리히 6세의 기반을 잡아주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리프는 소외될 것이다. 이미 필리프에게는 내 밑에서 일했다는 꼬리표가 붙어있고 순번으로 봐도 필리프는 차남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마냥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을 모든 귀족들이 지켜봤고 황제를 지지하는 귀족들 중 일부는 나와 대립각을 세울 하인리히보다는, 그래도 안면이 있고 부드럽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필리프를 지지하는 이들도 있을 테니까.
어쨌든 장기적으로는 점점 입지가 좁아질 것이고, 그렇게 궁지에 몰린 필리프를 내가 품으면 딱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겠는가? 뭐, 안 봐도 비디오지.
오토? 오토야 뭐 이미 잡은 물고기니 말할 것도 없고.
* * *
협약이 마무리되고 떠날 시간이 되자 나는 사자공에게 독대를 신청했다. 이제 다시 니스로 내려가면 한동안은 못 올라올 테니 그 전에 씨앗은 미리 뿌려둬야 하지 않겠나?
“날 보자고 했다지?”
“그렇습니다. 사자공 전하. 앉으시지요.”
편하게 자리를 권유하는 날 보며 사자공은 맥빠진 얼굴로 물었다.
“하… 라그나르 자네. 요새 세월이 많이 흐른 걸 느끼나?”
“제가 공작 전하를 뵌 지 채 2년이 안 됐을 텐데요?”
“새끼 사자가 크는 데 2년이면 족하지. 안 그런가?”
“글쎄요. 전 용이라서 사자의 성장 과정은 잘 모르겠군요.”
“뭐, 자네가 용이든 사자든 상관없네. 요지는 자네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거지.”
“그렇게 봐주시니 영광이군요.”
“겸손은 그쯤 해두게. 지금의 자네는 거물이 아니던가? 새파란 애송이였던 자네가 날 오라 가라 하고, 난 그걸 거부할 수가 없으니 말이야.”
“하하, 농담도 지나치십니다. 누가 감히 사자공 전하를 오라 가라 하겠습니까.”
“지금 자네가 그러고 있지 않나? 새벽 2시에 자네가 날 불렀고, 말도 안 되지만 나는 거기에 응할 수밖에 없었네. 웃기지 않나?”
뭐, 그에겐 미안하지만 어느 정도 의도한 건 맞다. 니스로 내려가기 전에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확실하게 가르쳐줘야 했거든.
물론 자존심상 그가 개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순순히 나온 걸 보면 굳이 더 줄다리기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여서 그런 겁니다.”
“곤하게 자는 사람을 두들겨 패서 깨울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라… 기대되는군.”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쓱 훑어보더니 내 맞은편에 앉으며 턱짓했고 나는 그에게 물이 아닌 와인을 건네며 한마디 건넸다.
“생각해보면 사자공 전하께서도 와인을 꽤 좋아하시는데 요새 물자가 없어 물만 드신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요. 제가 안타까워서 좀 챙겨드릴까 해서 불렀습니다.”
“하하하. 라그나르.”
“예. 공작 전하.”
“지랄하지 말고 진짜 용건이 뭔가?”
여기서 좀 더 시간을 끌 수도 있었지만 의미도 없고 이쯤 됐으면 사자공도 잠에서 완전히 깼을 테니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전하. 이렇게 협상이 마무리되고 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나? 나나 프리드리히나 내부단속에 피똥 쌀 테고 자네는 신나서 미쳐 날뛰겠지.”
“글쎄요. 이런 말씀은 어떨지 모르지만 제가 볼 때 사자공 전하는 이미 끝났습니다.”
“나는 아직도 건재하네. 이렇게 자네 앞에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본인도 알고 있는데 모른 척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진짜 모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좀 더 팩트를 꽂아주기로 했다.
“홀로 황제와 싸워 이겨낸 것도 아니고, 바이에른을 뺏겼으며, 전하의 영향력은 꾸준히 감소하겠지요.”
장담컨대 사자공의 파벌 중 일부가 황제에게 붙지는 않더라도 중립 같은 형식으로 이탈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사자공 세력의 축소를 뜻했고 그의 지위가 이전 같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솔직히 제가 없었으면 지금쯤 지하감옥에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게 살려줘서 고맙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건가??”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쓸데없는 말이 길었는데 제 말은 저도 아는 걸 사자공 전하가 모를 리가 없다는 겁니다.”
“….”
“아마 사자공 전하께서는 명분을 가져가고 싶으셨겠지요. 황제와 맞섰다는 그 명분 하나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게 아닙니까?”
조조가 반동탁연합군과 함께 낙양을 점령한 뒤 왜 홀로 동탁을 뒤쫓았겠는가? 그는 설사 그곳에서 패배하더라도 명분을 챙길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출진한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조조의 승패보다 오직 조조만이 동탁을 뒤쫓았다는 것에 주목하며 그의 의기와 명예로움을 칭송했다.
사자공 역시 매한가지다. 그라고 이번 전투에서 황제를 격퇴해낸들 이전과 같은 영광이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했을까?
어린 나이에 공작에 올라 노회한 황제에게 바이에른을 받아냈을 정도로 영특한 이가 바로 사자공이었다. 그런 그가 귀족들의 생리를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전쟁을 감수한 건 황제와 맞서 싸웠다는 명분을 얻기 위함이었다. 물론, 내가 개입함으로써 그 의지가 희석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라그나르. 그대의 말이 맞네. 헌데 자네는 내가 목숨을 걸고 얻어낸 것마저 가져가려 하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사자공 전하의 계획을 조금 도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내 말이 악마의 유혹처럼 들리는지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와인을 들이켰다.
탁!
가득 차 있던 잔을 단숨에 비운 사자공은 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어디 한번 지껄여보라는 듯 날 바라보았다.
“전하.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호엔슈타우펜이 무너지게 된다면 그 대항마는 벨프가에서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 반역이라는 것 알고 있나?”
그가 뭐라고 하건 나는 내 할 말을 했다. 애초에 반역은 본인이 저질러놓고 나한테 반역이라고 한들 씨알이나 먹힐까.
“물론 사자공 전하는 무리일 겁니다. 아마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황제의 관심과 견제를 듬뿍 받을 테니까요. 반면 오토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를 위해서 나는 뭘 희생해야 하나?”
“모든 것을 희생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건 뭔가?”
“복수! 흔히들 복수는 부질없는 것이라 하지만 이 세상에 복수만큼 달콤한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저 먼 동양에서 말하길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기다려도 늦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흐흐흐, 그럴듯하고 번지르르하게 얘기하지만 그래도 말은 바로 해야지. 솔직히 그대도 날 무너뜨리고 싶지만, 황제를 견제해야 하니 내 쓸모가 다할 때까지 날 방패로 삼고 대신 내 아들을 허수아비로 내세우겠다는 것 아닌가?”
“허수아비까지는 아니고… 바지사장 정도가 되겠군요.”
“전 세계를 호령하던 내가 미끼에 불과하고 사자의 새끼가 고작 바지사장이라… 내 신세도 참 우습게 됐군. 안 그런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딘의 이름을 걸고 장담하겠습니다. 오토는 반드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이며 벨프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배출한 가문으로 역사에 당당히 남을 겁니다.”
내 호언장담에 사자공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날 쳐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자네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
“사자와 독수리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지요. 저는 도망치는 길 대신 사냥꾼의 길을 택했을 뿐입니다.”
내 말에 사자공은 팔짱을 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내 제안 자체가 점심 메뉴 묻는 것마냥 간단한 얘기는 아니었기에 오늘 당장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자공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화끈한 남자였다.
“좋아. 그대를 믿도록 하지. 어차피 그대가 아니라면 난 지하 감옥에 갇히거나 참수되어 목이 성문 위에 매달렸을 테니까.”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나는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고 사자공 역시 내 손을 마주 잡은 뒤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