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하지만 황제의 야망은 그 꿈을 펼치기도 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지축을 울리는 군홧발 소리와 함께 이곳에 당도한 건 황제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원군이 아니었다.
얼굴에 새겨진 문신, 둥그런 라운드 쉴드, 오른손에 들린 창과 데인 엑스. 그리고 허리춤에 매인 바이킹 소드.
보무도 당당하게 이곳에 도착한 바이킹들의 모습에 황제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폴란드군 이외에도 새로운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데에서 오는 공포와 불안감은 아니었다.
그저, 진작에 출발했다고 한 자신의 지원군들이 왜 아직까지 오지 않느냐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물론 황제는 수많은 대군이 오다 보니 시일이 걸리는 거라 애써 자위했지만 불안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하던가?
바이킹들의 뒤를 이어 피를 뒤집어쓴 전령이 도착했고 그는 바이킹들에게 아군의 지원군이 박살 나서 그대로 와해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말에 황제는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희망의 끈을 놓쳐버렸고 그 충격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신이시여….”
사자공의 분투와 적의 지원군, 대패한 아군의 지원군, 떨어져 가는 아군의 사기.
이 모든 것들에 의해 희망이 사라진 이상 황제는 결국 중재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오히려 중재안만이 황제의 유일한 구원이자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동아줄이었다.
말 그대로 라그나르와 칼리나가 미친 척하고 황제를 공격하는 순간 이곳에선 그 누구도 살아나가지 못할 테니까.
결국, 황제는 모든 걸 포기하고 음울한 눈으로 조약서를 다시 펼쳤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조약서의 내용이 그렇게까지 자신에게 불리한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조약서에 싸인을 마친 황제는 여전히 싱글벙글 미소 짓고 있는 라그나르를 향해 분노를 담아 이야기했다.
“라그나르… 자네 생각보다 인맥이 좋구만.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 있는 저 폴랙 놈들과 야만인 놈들이 저만한 숫자의 병력을 출병시키려면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할 텐데 말이야.”
“제가 좀 사교적이라서 말입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야만인이 살아남으려면 많은 친구를 사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대의 친구가 아닌가 보군. 그대가 날 친구라 생각한다면 이렇게 행동할 리가 없잖은가?”
“글쎄요. 어떻게 생각하시건 폐하의 자유입니다만 만약 제가 폐하께 악감정을 품고 있다면 폐하께서 이렇게 저와 대화를 하고 계실 수 있겠습니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자신을 협박하는 라그나르의 모습에 황제는 분노보다는 황당함과 어이없음을 느꼈다.
“자네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
“하하, 원래 야만인들은 무섭지요. 그러니 이렇게 문명에 동화되어 가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폐하.”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인가?”
“뭐가 말입니까?”
“몰라서 묻나? 협약이 맺어지고 나면, 자네는 뭘 할 생각인가? 무슨 계획이 있으니 여기까지 병력을 끌고 꾸득꾸득 올라와서 나를 핍박한 게 아닌가?”
“핍박이라니요. 누가 들으면 진짜인 줄 알겠습니다.”
물론 내 말에 황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뻔뻔한 얼굴로 마저 대답했다.
“아무튼, 일이 마무리되면 니스로 내려가야지요. 폐하께서 제게 하사하신 도시인데 제가 책임지고 운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그러길 빌겠네. 솔직히 얘기해서 두 번 다시 자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하하,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그래도 자주 보다 보면 미운 정 고운 정 들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황제는 대놓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런 황제를 향해 나는 정중히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제 폐하. 부디 무탈하시길.”
“…자네도 부디, 몸조심하게.”
그렇게 황제와의 대담을 끝마친 나는 날 위해 이 먼 곳까지 와준 또 다른 혈맹의 수장. 하랄 블로탄을 만나러 갔다.
“잘 지냈나 친구? 내가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한 게 아닐지 모르겠군.”
“무슨 말을 그리 서운하게 하나. 자네가 물심양면으로 날 도와줬듯, 나 역시 그대를 도운 것뿐이네. 거기에 머리 아픈 일에서 벗어나 이렇게 바람도 쐬게 해주지 않았나?”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니 다행이군. 그런데 올 때 오딘께서 슬레이프니르라도 빌려주셨던가?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오던데… 선물까지 들고 말이야.”
“자네 덕분이지.”
“내 덕이라고?”
“그래. 얼마 전부터 요한나라는 친구가 우리에게 교역품으로 말을 가져다주더군. 그 덕분에 뒤룩뒤룩 살찐 어린 양들을 잡아먹을 수 있었지.”
하랄 블로탄은 내 통찰력에 놀랐다느니, 신성 제국군을 털어서 물자를 많이 얻었다느니 하며 좋아했지만 그 얘기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요한나에게 훗날 북부로 올라갈 테니 터전을 잡으라고만 얘기했지 상세한 계획을 얘기해주진 않았다.
즉, 하랄 블로탄에게 말을 보낸 건 순전히 그녀의 판단이며 그녀의 독단이었다는 얘기다.
바이킹들이 기마술에 썩 능숙하지 않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타고 싸우라고 보낸 건 아니고 물자 운반이나 빠른 이동을 위해서 보낸 거겠지.
의도했든 아니든 그 덕에 황제의 지원군을 격퇴해 분쇄시킬 수 있었고. 나는 마음속으로 요한나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상승시키며 최근의 근황을 물었다.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굉장히 바빠 보이는데.”
“말도 말게. 새로 얻은 땅이 워낙 넓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야. 기반도 많이 부족하다 보니 이래저래 힘든 부분도 많고.”
“그래도 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군. 정치를 할 때 절대 원주민들을 박해하지 말게. 그들이 있어야 자네가 덴마크를 되찾을 수 있어.”
“누가 해준 충고인데 잊어버리겠나. 가슴속에 늘 새기고 있다네.”
지금 하랄 블로탄 휘하에 있는 인구를 보면 10~15% 정도만 바이킹들이고 나머지는 전부 원주민들일 것이다.
그들을 어르고 달래도 모자랄 판에 짓밟고 탄압한다? 덴마크를 되찾기는커녕 분노한 반란군과 에릭에게 그 목이 날아갈 것이다.
북부를 새로운 기반으로 삼을 내게 그건 굉장히 불행한 일이었기에 계속 신경 쓰고 있었는데 알아서 잘해나가고 있는걸 보니 알게 모르게 뿌듯하다.
“그래. 아무튼 날 위해 와줘서 정말 고맙네. 이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자네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줘서 갚도록 하지.”
“푸하하하하, 내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네.”
뭐, 실제로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에릭도 더 이상 하랄 블로탄이 확실히 자리 잡는 걸 바라지 않을 테고 하랄 블로탄 역시 에릭이 덴마크를 확실히 휘어잡기 전에 공격하고 싶을 테니까.
* * *
쾅!!!
“황제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협상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저희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협상안이나 받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잖습니까!?”
“크흠… 그대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쩔 수가 없구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반발하는 선제후들을 바라보며 황제는 최대한 그들을 어르고 달래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얘기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이 협상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반박하는 선제후들의 모습에 황제는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그나마 따로 몸만 쫄래쫄래 종군한 대주교들은 이권을 더 얹어주는 걸로 어떻게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리해서 끌어모은 병력이나 막대한 물자를 동원한 선제후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기에 황제는 일단 정공법으로 맞서기로 했다.
“자자, 생각해보시오. 나라고 이 협상안을 받아들이고 싶겠소? 하지만 사자공은 여전히 하노버에 틀어박혀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고, 라그나르 놈은 협상안에 싸인하지 않으면 사자공의 편에 서서 내게 ‘충언’을 할 거라고 소리치고 있는 상황이오.”
“그렇긴 하지만 이쪽도 병력을 동원하면….”
선제후가 항변하려 했지만 황제는 그의 말을 잘라내며 냉철하게 얘기했다.
“거기에 라그나르 이 정신 나간 놈은 내게 대적하는 것도 모자라 정의공과 윙드 후사르까지 불러냈소. 그뿐이면 말도 안 하지. 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야만인 놈들까지 불러서 이곳에 오던 지원군까지 박살 낸 상황이오.”
“…….”
영주들 역시 정보통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타국의 군대까지 동원된 만큼 자칫 잘못하면 내전을 넘어 전쟁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얘기요. 그대들이 정녕 전쟁을 감당할 수 있겠소?”
엄포를 놓는 황제의 말에 선제후들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황제는 기선을 제압했다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그들을 몰아붙였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지금 상황은 어린애처럼 떼를 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란 말이외다. 오히려 이런 협상안을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할 상황이오.”
“허면 저희와의 약속은 어찌 되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온전히 지키기는 힘들 것 같소.”
“온전히가 아니라 저희가 받아 가는 것 자체가 아무것도 없지요! 폐하께선 이러나저러나 바이에른을 받아낼 수 있으니 좋다고 협정안을 받아들이는 게 아닙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황제는 한 발자국 물러서기로 했다. 일단은 이들을 어떻게든 설득시켜서 협상안을 통과시키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좋소. 그럼 내 그대들에게 슈바벤과 바이에른 일부를 양도해주겠소. 솔직히 나도 억울하오. 여기 모인 이들 중에서 나만큼 사자공을 죽이고 싶은 사람이 또 있소?”
“….”
“다른 누구보다 내가 제일 분하오. 그깟 야만인에게 굴복해서 다 잡은 사자공을 풀어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협상을 할 수밖에 없던 날 이해해줄 수는 없는 것이오?”
“으음, 그렇긴 하지만….”
“거기에 내가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한 것도 아니잖소. 그대들과 정보를 공유하며 상의를 했고, 그대들도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소? 문제가 있다면 칼리나와 라그나르의 행동이 빨랐다는 점이고 그게 우리의 패착이었지.”
황제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반박을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선제후들의 분노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고작 얼마 되지도 않는 땅과 보상을 받자고 수많은 병력을 이끌고 이곳까지 올라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제야 바이에른을 받았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겠지만, 자신들은 그야말로 닭 쫓던 개가 돼버린 셈이다.
“후우… 폐하. 좋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이번에는 이대로 넘어가지요. 허나 다음에 저희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선제후들은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황제는 차마 그들을 잡지 못했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자리에 앉아있던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젠장, 얻은 것에 비해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