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폴란드군의 습격이다!”
“윙드 후사르다! 도망쳐!!”
점점 커져가는 말발굽 소리에 병사들은 패닉에 빠져서 어찌할 줄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지휘관들이 어떻게든 그들을 통제하여 다잡으려 했지만 저런 규모의 병력을, 그것도 중무장한 기병을 상대로 진정하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탱크맨도 아니고 말이지.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확인한 황제는 분노에 찬 얼굴로 나를 추궁했다.
“어떻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게 라그나르! 왜 폴란드의 윙드 후사르들이 이곳에 온 건가!?”
“글쎄요. 궁금하시면 직접 물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내가 지금 자네와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것으로 보이나?”
황제는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날 쏘아보며 으르렁거렸고 난 황제를 좀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칼을 뽑아 들 기세였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어쩌면, 폐하께서 정의공을 보기 위해 크라쿠프로 갔던 것처럼 정의공 역시 폐하를 보기 위해 이곳 하노버까지 온 게 아니겠습니까?”
“헛소리 집어치우게! 이게 정녕 칼리나의 뜻인가!? 독수리를 갈기갈기 찢어 사자와 용이 제국을 갈라 먹겠다는 것인가!?”
독수리라… 웃기는군. 호엔슈타우펜의 문장도 결국은 사자다.
헌데 황제는 이전부터 계속 자신을 독수리라고 칭하고 있다. 그건 분명 신성 로마 제국 국기에 새겨진 쌍두독수리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
본인과 자신의 가문을 신성 제국 그 자체라 여기다니, 이 얼마나 건방지고 오만한 생각이던가. 누가 보면 루이 14세인 줄 알겠군.
“폐하.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저는 폐하께 반역을 꾀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저, 폐하께서 진노를 풀고 사자공을 용서해주십사 부탁드릴 뿐입니다.”
“부탁? 이런 병력을 모아놓고 부탁이라 얘기하는 건가? 요새는 목에 칼을 들이밀고 강요하는 것을 부탁이라 하던가?”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폐하께선 제 말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 아닙니까.”
원래 사람을 말로 설득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정신승리를 하는 건 둘째 치고 그간 자신이 살아오면서 봐온 것들과 정립된 가치관을 몇 마디 말로 뒤집는 게 쉬울 리가 있겠는가.
그때 필요한 게 죽창과 물이다. 그 두 개 앞에선 누구나가 평등하니까.
그리고 지금 나는 윙드 후사르라는 죽창을 황제에게 보여줬고 황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건 신성 제국 내부의 문제네. 그대는 지금 제국의 일에 외세의 세력을 끌어들인 것인가? 이건 명백한 내정간섭일 뿐만 아니라 그대의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행위네.”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명분이었지만 내가 볼 때는 궁색함 그 자체였다. 이걸 두고 비겁한 변명이라고 하던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저들은 제가 부른 게 아닙니다.”
“…뭐라고?”
황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 역시 의문이군요. 왜 저들이 여기까지 왔는지… 혹시 폐하가 부르셨습니까?”
그제야 모르쇠로 일관하려는 내 의도를 파악한건지 황제는 전신을 분노로 부들부들 떨면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오늘 단기간에 이렇게 황제의 애정 어린 눈초리를 받을 줄은 몰랐군. 아마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난 수십 번은 죽지 않았을까?
“원하는 게 뭔가?”
“계속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자공 전하와 황제 폐하께서 화해하는 것입니다.”
“고작 그따위 것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판돈을 쏟아부은 건가?”
“황제 폐하를 위해서라면 이 목숨인들 아깝겠습니까? 어쨌건 폐하께서 사자공과 화해하며 협상을 마무리 지으신다면 저들은 얌전히 돌아갈 겁니다. 실제로 저들의 진격이 멈추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황제는 고개를 돌려 윙드 후사르들이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공성 캠프로부터 약 500m 떨어진 부근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대기하고 있었다.
“빠르게 결정을 내리셔야 할 겁니다. 사자공도 이 소란을 눈치챘을 테니까요.”
내가 가볍게 황제를 압박하자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이보게 라그나르.”
“예. 폐하.”
“차라리 그냥 나를 죽이지 그러나? 저들 윙드 후사르와 사자공, 그리고 칼리나와 그대라면 충분히 나를 죽이는 게 가능하지 않은가? 그냥 자네가 다 해 먹게. 황제든 뭐든.”
물론 나는 그 말에 얼토당토않다는 듯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읍소했다.
“폐하! 그 무슨 황망한 말씀이십니까. 저는 여전히 폐하의 충성스러운 신하입니다. 어찌 저보고 은혜를 원수로 갚으라 하십니까?”
“허, 지금도 실시간으로 그러고 있지 않나?”
“폐하. 제 충심을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후우…… 지랄하지 말게.”
그 말에 나는 즉시 연기를 멈췄고 황제는 여전히 굳건한 성벽처럼 랜스를 치켜든 채 서 있는 윙드 후사르들을 바라보더니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자네 말대로 제대로 된 협상을 진행하겠네. 그러니 사자공을 이리로 소환하게. 지금까지는 대리인들끼리 했지만, 결국 당사자들끼리 합의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황제는 결국 내 압력에 굴복했고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황제 폐하.”
* * *
황제와 사자공이 직접 협상을 진행하기로 해서 그런지 이전에 비하면 훨씬 빠르게 협상안이 만들어져갔다.
물론 그렇다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파바박 하고 협정문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었다. 황제는 선제후들과 대주교들의 의견을 들어야 할 테고 나 역시 이권을 위해서 발을 하나 얹어야 했으니까.
다만, 지금은 일단 둘이 합의를 할 때까지는 할 게 없었기에 나는 오랜만에 정의공을 만나서 회포를 풀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정의공 전하.”
“오랜만일세. 라그나르 백작. 얼굴이 좋아 보이는 게 아주 신수가 훤하군.”
“신하로서 황제 폐하를 옳은 길로 이끄는 데 이바지했으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저는 역사에 둘도 없을 충신으로 남을 겁니다.”
“푸하하하하. 하긴, 자네만 한 충신도 없지.”
호탕하게 웃는 그에게 나는 와인을 따라주며 그의 근황을 물었다. 원래 용건을 꺼내기 전에 가벼운 이야기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지 않던가.
“그래서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자네 덕에 새롭게 얻은 땅을 관리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었지.”
“주민들 사이에서 반발은 없습니까?”
“조금 있기는 했지만 자네 말대로 례셰크를 클라이페다 지역에 보내니 별다른 잡음이 나진 않더군. 아무래도 자네와 함께 다니다 보니 야만인들에게 별다른 편견이 없는 모양이야.”
“정의공 전하의 아드님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례셰크는 능히 정의공 전하의 뒤를 이을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 자수성가의 대명사인 자네가 그렇게 평가해주니 마음이 든든하군.”
“그나저나 놀랐습니다. 병력을 보내주실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많은 병력을, 그것도 직접 끌고 오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누구 부탁인데 거절하겠나? 그리고 애초에 우리는 약속하지 않았나?”
“약속과 신뢰라는 게 저기 떨어져 있는 돌멩이만도 못한 시대에 그 가치를 알아보고 지켜주는 이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나는 신뢰와 믿음 하나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이네. 그리고 자네도 알겠지만, 신성 로마 제국을 침공하겠다는데 싫어할 이가 누가 있겠나?”
뭐, 이건 조금 정치적인 얘기인데 사실 이번 침공으로 폴란드에서 얻어가는 건 없다.
물론 이쪽에서 어느 정도 보상을 해주긴 할 테지만 저렇게 많은 기병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리스크고 그 리스크에 비해 얻는 건 미미하다.
하지만 정의공은 그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신성 로마 제국을 침공하고, 폴란드 입장에서 좆같은 프리드리히에게 빅엿을 먹였다는 명분을 얻기 위해 출진을 감행한 것이다.
제국 침공은 그 어떤 위대한 왕들도 하지 못한 업적이었고 그 때문에 다른 공작들 역시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동원령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신성 제국에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시민들의 강력한 지지도 받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하긴, 황제의 힘이 강해지는 것만큼 폴란드에게 짜증 나는 일이 없겠군요.”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자네도 말은 중재라지만 결국 황제의 힘이 커지는 걸 경계하고 있는 거잖나?”
“그것도 그렇고 그다음 차례는 저희가 될 텐데 가만히 보고 있을 순 없잖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정의공 전하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자네 제안을 들어서 단 한 번도 손해 본 적이 없었지. 마음 편히 얘기해보게.”
“니스의 일을 마무리 짓는 대로 저는 북부로 올라올 겁니다.”
“덴마크의 에릭과 끝장을 보기 위해서인가?”
정의공은 오랜 기간 정치판에서 굴러서 그런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고 나는 그의 통찰력에 감탄하며 부연설명을 이어나갔다.
“뭐 그것도 있고 추후 발트해를 기준으로 상행을 할 생각입니다. 그를 위해서 엘베강 서쪽과 포메라니아 일대에 있는 야만인들도 솎아내고 해적들도 정리해야 하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들을 정리하고 영토를 나눠 먹자는 거군. 겸사겸사 무역을 해서 부도 채우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전쟁 자체가 결국은 다 돈 아닙니까? 물자와 자금 부담을 줄이고 승산을 높이기 위해 사자공을 끌어들일 생각입니다.”
“사자공? 그가 협조적으로 나오겠나?”
“원래도 그는 동방식민운동을 이끌었던 데다가 이번 협정에서 꽤 많은 영토를 뱉어낼 테니 협력적으로 나올 겁니다. 그리고 비협조적으로 나와도 상관없습니다. 협조적으로 나오게 만들면 되니까요.”
내가 황제와 사자공이 있는 막사의 방향을 힐끔 바라보며 얘기하자 정의공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네와 사자공이 함께한다면 못 할 것도 없지.”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 진행할 건 아니고 덴마크의 에릭을 토벌하고 난 뒤의 일이니 때가 되면 제가 다시 연통을 넣겠습니다.”
“알겠네. 나중에 사자공과 합의가 되는 대로 이쪽에 얘기해주게.”
* * *
“하인리히 자네가 야만인과 그렇게 친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네. 야만인들을 때려잡다 보니 그들과 정이라도 들었나?”
“사돈 남 말 하는군. 애초에 라그나르는 자네가 키운 작품이 아닌가? 기르던 개… 아니, 그 정도면 늑대겠군. 아무튼, 기르던 애완견에게 물린 기분이 어떤가?”
“어떻냐고? 뭐, 자네도 곧 알게 될 거야.”
“그게 무슨 말이지?”
“라그나르를 너무 믿지 말라는 말일세. 세상에 영원한 아군과 적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을 마친 황제는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으며 협정서의 초안을 훑어보았다.
1. 평화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일체의 무력행위는 금지한다.
2. 황제는 사자공에게 내려진 아웃로 처분을 취소한다. 또한, 사자공과 함께 한 이들에게 어떠한 보복도 있어서는 안 된다.
3. 사자공은 바이에른 공국을 황제에게 넘겨준다. 양도 기간은 1개월 안에 시행되어야 한다.
4. 3의 대가로 황제는 작센의 재건을 위해 돈과 물자를 3년간 지원해야 한다.
5. 중재의 대가로 황제는 칼리나를 선제후로 임명해야 한다.
6. 중재의 대가로 사자공은 후일 라그나르의 요청이 있을 시 그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단, 이 경우 황제에게 즉각 알려야 하며 그 창끝이 황제에게 향해서는 안 된다.
7. 오토와 필리프는 라그나르의 휘하에 5년간 있어야 한다.
“쯧….”
몇 번이고 읽어봤지만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협정서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어쨌거나 하인리히는 작센을 지킬 수 있었고 황제는 바이에른을 얻어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모두에게 공개할 합의서에 5번과 6번, 7번 항목을 넣을 수는 없었다. 실제 조약서는 1번부터 4번까지만 공개될 테고 황제와 사자공, 그리고 변경백은 5, 6, 7번이 첨부된 문서를 나눠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이 협정서에 싸인을 할 생각이 없었다. 바깥에서 돌아다니는 윙드 후사르가 무섭기는 했지만,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지원군이 도착한다면, 이 꼴 보기 싫은 놈들을 모조리 도륙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때를 위해서라면 이깟 굴욕쯤은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었다. 원래 인내는 쓰고 그 열매는 달다고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