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응접실에 앉은 사자공은 와인 대신 우리에게 물을 건네며 미안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미안하네. 물자가 모자라다 보니 귀한 분들이 왔는데도 대접할 게 이런 것밖에 없군.”
“오, 저런. 안타깝군요. 돌아가서 구호물자라도 보내드려야겠군요.”
“괜찮네. 내 성 위에서 바라보니 병사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휘하의 병사들이나 배불리 먹이게.”
“사자공 전하께서 낱알 하나 남기지 않고 싹 쓸어가시다 보니 불쌍한 유민들이 생겨서 말이지요. 폐하께서 그들을 챙기다 보니 병사들의 식사가 다소 부실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흠, 그렇게 백성을 아끼시는 분이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벌여 과부를 양성하시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야. 그렇지 않은가?”
“글쎄요. 누군가가 쓸데없이 통수 칠 생각만 해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 전쟁도 통수를 맞기 전에 단죄하는 의미가 크거든요.”
살벌하군. 말 한마디 한마디에 뼈가 들어가 있다. 눈을 가린 채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 딱 이러할까?
물론 나는 직접적인 당사자는 아니기에 한 걸음 떨어져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는 게 가능했다. 다만 자칫 잘못하면 강도 불태울 수 있었기에 이쯤에서 중재를 하기로 했다.
“다들 조금 진정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잘해보자고 이렇게 모였는데 감정싸움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흠, 그럼 라그나르 백작. 어디 그대가 한번 협상을 이끌어가 보시오. 애초에 그대가 중재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소?”
사자공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하는지 별다른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오토로부터 중재를 한다고는 들었지만 정확한 내용까지는 알지 못하겠지.
“좋습니다. 일단 황제 폐하와 사자공 전하 사이에 평화협정이 맺어져야 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동의하십니까?”
“뭐, 일단은….”
“그건 동의하네. 다른 조건은?”
“우선 황제 폐하께서 이 아웃로라는 판결을 취하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사자공을 따른 이들에게 어떠한 법적 책임도 묻지 않는다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콘라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듯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건 불가하네! 제국 대법원의 판결은 신성한 법이야. 그걸 번복하면 영이 제대로 서지 않을 걸세.”
지랄. 자기들끼리 입 맞춰서 짝짜꿍해놓고 신성하기는 개뿔. 어차피 그건 핑계고 지금 사자공에게 씌워져 있는 아웃로라는 판결을 번복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게 생각 외로 큰 효과를 내서 바이에른은 물론이요, 작센의 귀족들도 꼼짝하지 못했으니까.
“그럼 애초에 협정 자체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이 아웃로라는 형벌 자체가 신성 제국에서 살지 말라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막말로 지나가던 노예가 사자공을 찔러 죽인다고 해도 그 노예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하지. 사자공 전하. 지금 모든 걸 내려놓으신다면 폐하께서 자비를 베풀어 그 뒤를 쫓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대로 하야해서 남은 여생을 편히 즐기시지요.”
궁정백이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듣는 내가 화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애초에 사자공이 본인의 목숨을 구걸하고 싶었다면 반기를 드는 일조차 없었을 테니.
“으하하하하하하하하.”
하지만 사자공은 화를 내는 대신 방 안이 떠나가라 크게 웃었다. 그걸 비웃음이라 생각했는지 콘라드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사자공은 개의치 않고 눈가를 훔쳐 가며 내게 얘기했다.
“라그나르.”
“예. 사자공 전하.”
“그대들 바이킹은 침대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는 걸 수치라 여긴다 들었네. 맞나?”
“뭐, 그렇습니다. 전장에서 전사로서 죽어 발할라로 가기를 원하지요.”
“발할라라… 비록 그대들이 이교도라지만 그 마음가짐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날 바라보며 싱긋 웃은 사자공은 두 눈을 부릅뜨고 궁정백을 노려보며 단언했다.
“궁정백. 나는 개새끼가 아닌 사자로 살다 사자로 죽을 것이네. 그 누구도 사자를, 벨프가를 길들일 순 없네.”
“…진심이십니까?”
“내가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 말에 궁정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자공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정녕 공작 전하를 따르는 모든 이들을 파멸로 이끌 생각이십니까? 공작 전하께서 이룬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고자 하십니까?”
“흠… 내가 이거에 관해서 프리드리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말이야… 나는 전장에서 패한 적이 없다네. 누구와는 다르게.”
쾅!!!
“사자공 전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애초에 폴란드와의 전쟁도 전하께서 후방을 지켜줬다면….”
“하, 그 이기지도 못할 전쟁 말인가? 내 들어보니 라그나르가 그쯤하고 퇴각하라고 조언했다더군. 실제로 들어보니 그 말이 옳았고 말이야. 황제라는 사람의 눈깔이 야만인보다 못한 소눈깔에 통찰력이 그따위인데 제국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겠나?”
“전하!!!!”
순식간에 분위기가 과열되자 나는 가볍게 박수를 치며 둘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둘은 씨근덕거리면서도 날 바라보았고 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두 분 다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일단 물이라도 드시면서 진정하시지요.”
내 조언에 콘라드는 속이 타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사자공 역시 잔을 비우며 끓는 속을 가라앉혔다.
“물을 내오신 게 신의 한 수셨군요. 두 분 다 와인이 들어갔으면 취기를 빌미로 칼부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니까요.”
뼈가 담긴 내 말에 둘은 헛기침을 하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거참, 다 큰 어른들이 애처럼 감정싸움을 하는 걸 보니 보는 나조차 답답하다.
“아무튼 궁정백 각하. 아까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면, 종종 교황 성하께서도 파문을 하시지만 취소하시지 않습니까? 한 번쯤 융통성을 발휘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 부분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네.”
“좋습니다. 그럼 이 부분은 추후에 황제 폐하의 이야기를 듣고 결정하도록 하지요. 괜찮겠습니까?”
내 질문에 둘 다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중재를 이어나갔다.
물론 서로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협상은 모든 안건마다 난항을 겪었다.
결국, 오늘은 서로의 의견 차만 확인하는 데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가끔 뉴스에서 타국과 협상을 할 때마다 서로의 의견 차만 확인했다느니, 어쨌느니 하는 뉴스를 보면서 월급 도둑놈 새끼들이라고 욕했었는데 이제는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이건 뭐 말이 먹혀야 협상을 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귀 막고 빼에에에엑 소리 지르는데 협상이 가능할 리가 없지.
그렇다고 전혀 진전이 없었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우선 평화협정을 맺는다는 사실 자체에는 둘 다 동의를 했고 이는 그래도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였다.
원역사에서도 사자공이 숙청당해 쫓겨나고 나서 몇 년 뒤 황제는 그에게 내린 판결을 취소해주고 브라운슈바이크라는 작은 영지를 내려줬으니까.
심지어 작긴 하지만 공국으로 승격시켜줘서 공작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시켜주기도 했고. 뭐, 그게 자신의 발목을 잡아 결국 사자공의 아들인 오토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위에 오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협상은 이제 시작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 건 아니지만 꾸준히 협상을 이어가면 절충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 * *
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제게도 있었습니다.
협상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첫날 했었던 협상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물론 쌍방 간에 조금씩 양보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자공은 평화협상을 대가로 바이에른의 절반을 떼어준다고 했지만 바이에른은 물론이고 작센까지 먹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황제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반면 황제는 아웃로 판결을 취소해줌은 물론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을 내준다고 했지만, 자신의 사지를 묶어서 결박시키려 한다고 생각한 사자공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본인들 딴에는 할 수 있는 선에서 통 크게 양보를 했는데도 상대측에서 들어먹지를 않으니 감정이 상해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말이 중재지 제대로 된 협상안이 나오지 않자 황제는 딴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협상을 질질 끌며 시간을 벌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라그나르. 교단 쪽에서 들어온 첩보인데 황제의 명을 받은 귀족들이 병력을 끌고 하노버로 집결 중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곧장 황제를 찾아가서 항의했다. 애초에 협상을 하면서 추가로 병력을 소집하는 건 협상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다는 것 아니겠는가.
“폐하! 병력을 소집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협상이 진행 중인데 이러한 행위는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해명해주십시오.”
“해명이고 자시고 협상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때를 대비해서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병력들을 불러모으는 게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오히려 뭐가 잘못이냐는 듯 뻔뻔하게 얘기하는 황제의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정 피를 보실 생각이십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군. 정녕 내게 대적할 생각인가 라그나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황제 폐하의 충신으로서 폐하께서 잘못된 길을 걷고 계시니 이 목숨을 걸고 그러시면 안 된다고 충언을 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목숨을 건다라… 진심인가?”
“물론입니다. 폐하.”
“그 병력으로 될 것 같나? 이미 수많은 병력들이 내 명에 따라 하노버로 집결하고 있네. 시간이 지날수록 자네들이 이곳에서 살아나갈 확률은 줄어들겠지.”
부우우우우우우웅! 부우우우우우우우웅!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웅!
황제의 말이 끝나는 순간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고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 충성스러운 영주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는 모양이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라그나르. 함께 하인리히를 토벌하고 과실을 얻는 게 어떤가?”
“오히려 제가 폐하께 제안하고 싶군요. 지금이라도 성실히 협상에 임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의미 없는 말장난은 그만두게.”
“저는 언제나 진심입니다. 폐하.”
“정녕 벌주를 마실 생각인가?”
“누가 벌주를 마실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계실 겁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얘기하는 건가?”
내가 그에 대답하기 전에 밖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고 황제는 인상을 쓰며 천막을 열어젖혔다.
“뭐가 이리 소란스러운….”
하지만 황제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는데 저 멀리서 엄청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저런 식으로 먼지를 일으킬 수 있는 건 오직 기병뿐이다.
그리고 황제가 보고받기로 자신에게 오기로 한 지원군의 대부분은 보병이었다. 애초에 공성전에서 기병의 역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저기서 자신을 향해서 달려오는 병력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
일정한 리듬으로 대지가 진동했고 그들이 가까워질수록 작은 돌덩이들이 팝콘처럼 튀기며 이곳으로 오고 있는 병력의 규모를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그렇게 그들의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적들의 모습을 확인한 황제는 두 눈에 불꽃을 튀기며 나를 노려보았다.
“…라그나르!!!!!”
“아무래도 이쪽의 지원군이 먼저 도착한 것 같군요. 폐하.”
나는 빙긋 웃으며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기병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말과 사람이 전부 중갑으로 무장했으며 5m에 이르는 장창을 보유한 무적의 중기병. 그리고 그들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거대한 날개 장식.
이 세상에서 저런 모습의 중기병을 운용하는 국가는 단 한 곳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