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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112화 (112/205)

▣ 112화

갑작스럽게 전장에 새로운 세력이 난입하자 공성은 중지됐고 이내 소강상태에 돌입했다.

황제와 사자공의 반응은 굉장히 판이했는데 일단 황제는 병력을 물리긴 했지만 그들의 창은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그 발톱으로 찢어발기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반면 사자공은 성벽 위에 있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먼저 떠난 오토가 제대로 설득한 건지 우리에게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들이 공격받던 와중에 우리로 인해서 전열을 다듬을 시간을 벌게 됐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우리가 자신들과 대적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어쨌건, 내가 원하는 대로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나는 필리프를 소환했다.

“부르셨습니까. 백작 각하.”

“어서 오게. 필리프. 앞서 얘기했던 대로 난 이제 자네를 풀어줄 생각이네.”

“…!”

내 말에 그의 내면에선 수많은 감정들이 회오리치는지 아무런 대답도 없었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할 말을 했다.

“자네가 황제 폐하께 가서 무슨 말을 하든 그건 자네의 자유일세. 다만 나와 칼리나, 그리고 검은 용군단의 뜻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네.”

“정녕 아버… 폐하와 호엔슈타우펜에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않으신다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나는 어디까지나 중재를 위해서 온 거라고. 물론 폐하께서 내게 창을 겨누신다면 나도 도끼를 뽑아 들 수밖에 없네.”

“알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봐온 백작 각하를 믿겠습니다.”

“부탁하지. 사실 이렇게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보다 말로 해결하는 게 서로 좋지 않겠나?”

내 말에 필리프는 고개 숙여 인사한 뒤 휘하의 병력들을 끌고 황제에게 떠났고 나는 병력들에게 캠프를 차리라고 명령했다.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최대한 대비는 해둬야 하지 않겠는가.

* * *

배후에서 나타난 검은 용군단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황제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맞이하게 되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필리프? 네가 여기는 어떻게?”

“아버지.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군대를 물리셔야 합니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혹여 라그나르가 군대를 물리라고 하더냐?”

필리프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황제는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분노했다.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던 필리프는 조심스럽게 황제의 귀에 속삭였다.

“라그나르 백작은 폐하와 사자공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서 올라온 겁니다. 허나 그 과정에서 저희가 협상을 거절한다면 그는 사자공의 편에 서서 싸울 겁니다.”

“하, 필리프. 나는 제국의 황제다. 내가 저따위 야만인과 남부의 촌놈들이 무서워서 병력을 물릴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제국의 황제이신 폐하께서 두려워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허나 아버지. 생각해보십시오. 변경백까지 이 전쟁에 참전하면 이건 더 이상 숙청이 아니라 내전으로 변질됩니다. 누가 이기든 피로스의 승리가 돼버린다는 말입니다.”

“…후우.”

필리프가 정곡을 찌르자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자신 역시 알았기에 최대한 빠르게 하노버를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체스가 그렇듯 사자공이라는 머리만 붙잡는다면 게임은 끝나는 법이니까. 하지만 킹은 죽지 않았고 이젠 그냥 내다 버리는 용도로 쓰려던 폰이 퀸이 되려 하고 있었다.

“일단 얘기라도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중재안이 마음에 안 든다면 그때 가서 다시 결정해도 되지 않습니까?”

천진난만하게 얘기하는 자신의 아들을 보니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애초에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의 압박에 굴한 게 아니던가?

만약 자신이 사자공과 칼리나를 다 쓸어버릴 힘이 있었다면 대화고 지랄이고 둘 다 사이좋게 지하감옥에 가뒀을 것이다.

뭐, 이런 점은 자신이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 때문에 황제는 짧게 대답했다.

“고려해보마.”

“그리고 협상을 할지 안 할지는 아버님의 판단에 달려있지만, 협상을 빌미로 시간을 끄는 게 어떻습니까?”

“어째서지?”

“현재 공성으로 인해 병력들이 많이 지쳐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은 공평하기에 사자공의 병력들도 회복할 시간을 주지만 무리한 병력 운용은 선제후들의 불만을 살 수 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필리프의 대답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필리프. 그럼 그것 이외에 내가 협상을 받아들여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느냐?”

어느새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황제의 말에 필리프는 두 눈을 뒤룩뒤룩 굴리다가 그럴싸한 대답을 내뱉었다.

“검은 용군단의 등장으로 요동치는 병력들의 사기와 불안도 잠재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그나르 백작의 위명은 이미 제국 전역에서 요동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음유시인들은 하이르 앗 딘을 참살한 라그나르의 위용을 노래하기도 했다. 야만인 출신의 백작이라는 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소재거리였으니까.

“그런 그와 대적한다고 하면 분명 병력들이 동요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칼리나 변경백은 용기사단까지 끌고 왔습니다. 그런 그녀와 대적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원하던 대답이 맞았는지 황제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필리프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전장을 보는 눈이 넓어졌구나. 라그나르에게 배운 것이냐?”

“예?”

황제의 말에 선뜻 답하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그에게 배운 게 맞았다. 니스에서 예산을 담당하기는 했지만, 종종 그와 함께 종군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따라 배운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건 나 혼자서 쉽게 결정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선제후들과 상의를 할 테니 일단은 좀 쉬고 있거라.”

물론 황제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필리프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사자공과 칼리나의 연합군과 싸운다면 자신들이 필패할 테니까.

* * *

검은 용군단의 난입 이후로 하노버에는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 황제와 선제후가 이끄는 제국군. 하인리히 사자공과 그를 따르는 제후들이 이끄는 북부 연합군. 그리고 칼리나와 라그나르 이외에 수많은 영주들이 이끄는 남부 연합군.

이곳에 모여있는 병력들의 면면만 보면 거진 신성 로마 제국의 힘이자 저력이었으며 ‘어벤저스’ 그 자체였지만 문제는 서로를 향해 창칼을 겨누고 있다는 점이었다.

각 군영에 머무는 병력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무장한 채 상대방을 철저히 경계했고 각자의 의견을 담은 전령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각자의 군영을 드나들었다.

물론 협상을 하자는 것 자체는 서로 간에 쉽게 합의가 되었다. 본래 이렇게 공성과 수성을 하면 수성이 훨씬 유리한 입장이긴 하다.

그 때문에 수성 측에서 시간을 질질 끌며 적들의 물자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사자공은 너 죽고 나 죽자며 청야전술을 시행했고 그 덕에 쌓여있는 물자가 부족했기에 그 누구보다 이 협상을 반기는 눈치였다.

황제는 황제대로 선제후들 및 대주교들과 연합을 했기에 그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고, 협상을 거절하면 북부와 남부가 연합을 하려 했기에 어쩔 수 없이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저 먼 남부에서 이곳까지 병력을 끌고 올라왔기에 빈집에 대한 걱정은 물론이요 추가로 물자 보급이 어려웠기에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즉, 셋 다 똥줄이 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협상이 타결된 것이었다. 다만 어찌 보면 사소한, 어찌 보면 중대한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회담의 장소 선정이었다.

황제는 자신들의 군영에서, 사자공은 하노버에서, 우리는 당연히 우리 군영에서 하자고 했고 결국 가운데에서 천막치고 만나자고 했지만 사자공은 성에서 나오는 것 자체를 거부했기에 얘기는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렇게 사흘 동안 전령들이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닌 결과 그럴듯한 결과가 도출됐다.

우선 협상 장소는 하노버의 성안이다. 그곳에 백작이자 칼리나의 심복인 나와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일원이자 궁정백인 콘라드가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었고 나와 사자공이 연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칼리나가 인질로 황제의 군영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이쪽도 끗발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사자공의 아들인 오토와 황제의 둘째 아들인 필리프를 인질로 붙잡고 있기로 했고.

이게 생각 외로 효과가 좋았는데 나와 사자공이 연합하면 칼리나의 목이 떨어질 테고, 사자공과 황제는 연합할 리가 없고, 칼리나와 황제가 연합하면 콘라드와 내 목이 떨어질 테니까.

솔직히 인생 참 복잡하게 산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막말로 명예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목 잘라버리면 연합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기에 어쩔 수 없긴 했다.

아무튼, 이렇게 가위바위보처럼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가 형성되자 합의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우리는 기념비적인 첫 회담을 하기로 했다.

물론 서로 간에 감정이 쌓여있는 만큼 회담이 부드럽게 진행될 리는 없었다. 당장 하노버 성으로 들어가는 데만도 콘라드와 말다툼이 벌어졌으니까.

“콘라드 경. 이렇게 다시 볼 줄은 몰랐군요.”

“그러게 말일세. 자네가 뱃속에 그렇게 능구렁이를 몇 마리나 숨기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야만인의 가면은 그대의 시커먼 속을 숨기기 위함이었나?”

“문명인들보다, 문명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야만인이 더 문명인답지 않겠습니까?”

대놓고 날 타박하는 콘라드를 향해 ‘니네가 맨날 하는 짓이 이거 아니냐?’라고 돌려서 얘기하자 그는 작게 혀를 차며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말없이 성문 앞에 도달하자 병력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 성문이 열렸고 나는 당당히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사자공이 기사단을 이끌고 나와 콘라드를 맞이해주었는데 그는 그간 꽤 고생을 해서 그런지 얼굴이 굉장히 수척해져 있었다.

하긴, 마음고생을 할 법도 하지. 우리가 오지 않았다면 진작에 성이 함락당하고 그는 어딘지도 모를 지하 감옥에 처박혀서 죽어갔을 테니까.

거기에 말로는 협상과 중재라고 했지만 그 역시 절대 이전만큼의 위세를 누리지는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여기까지 왔으니 협상을 진행해야겠지.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는군요. 사자공 전하. 안 좋은 때에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예의를 차려서 인사했고 그도 희미하게나마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가 아니었다면 난 관속에 누워서 그대와 대화를 하고 있었을 텐데.”

“하하하, 그사이에 농담이 많이 느셨군요.”

“아무튼, 자네와 안면을 터 둔 게 내 목숨을 구해줬군.”

내가 사자공과 대화를 하며 분위기를 풀어가자 콘라드는 그게 못마땅했는지 크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 궁정백. 그래, 폐하께서는 안녕하신가?”

“물론입니다. 늘 정정하시지요.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의 성벽을 오르실 수 있을 정도로.”

콘라드가 대놓고 시비를 걸자 사자공의 뒤에 있던 호위가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지만 사자공은 오히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프리드리히라면 능히 그렇게 했겠지. 내 목을 베는 게 프리드리히 일생일대의 소원이었을 텐데 아쉽게 됐군.”

“글쎄요. 방해꾼만 없다면 지금이라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아쉽게도 그럴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군. 그걸 막기 위해 라그나르 백작이 이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올라와 줬으니까.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사자공 전하.”

“….”

“아무튼,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지. 귀한 손님들을 밖에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사자공은 뒤돌아서서 우리를 응접실로 이끌었고 나와 콘라드는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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