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흠, 생각보다 효과가 크진 않군.”
사자공과의 회담 내용이 파다하게 퍼졌지만 딱히 적군이 동요하는 모습은 없었다.
“지금 저기에 모인 이들은 폐하께서 아웃로의 죄를 묻는다고 해도 그의 휘하에 모인 이들입니다. 아마 어지간한 일로는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병사들은 조금이나마 동요하는 모양이더군.”
“예. 아무래도 그들은 황제 폐하와 맞서 싸운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운 모양입니다.”
“뭐, 더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거면 충분하네. 공성 무기도 거의 다 완공됐다지?”
“예. 현재 마무리 작업 중이니 점심 이후에 제대로 된 공성이 가능할 겁니다.”
거진 열흘이 넘게 공성 캠프 안에만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놀았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수많은 공성 병기들을 만드는 한편 외부에서 오는 지원군들도 물리쳤기에 이전에 비하면 사기는 굉장히 높았다.
“콘라드.”
“예. 폐하.”
“남부의 떨거지들은 어디쯤 왔다고 하던가? 바이에른의 귀족들을 움직여서 발목을 붙잡아야 될 것 같은데.”
어느새 칼리나와 라그나르가 떨거지들로 격하된 것으로 봐서 황제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하다는 것을 느낀 콘라드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이미 라이프치히 인근까지 왔다고 합니다.”
“뭐? 어떻게? 설마 바이에른을 가로질러 왔다는 건가?”
황제는 라그나르와 칼리나가 북상한다고 들었을 때 당연히 바이에른 동부 외곽의 경계지역을 따라 올라올 거라 생각했다. 제정신이라면 슈바벤 공국과 프랑켄 공국을 통과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국경지대를 따라서 행군하다 보면 헝가리가 지랄함은 물론이요 국경을 오가며 약탈을 일삼는 쿠만과 페체네그 같은 튀르크인들의 방해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장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이프치히까지 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바이에른을 가로질러서 왔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예. 들리는 소문으로는 영주들이 길을 열어주고 물자를 지원해 주는 것도 모자라 몇몇 영주들은 그의 행렬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굴복하고 사자공의 구원요청을 저버린 주제에 또 칼리나 변경백의 군대에는 길을 열어주는 건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박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짓거리에 황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잠재우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바이에른도 기강을 한번 잡아야겠군.”
“그 말씀에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일단은 칼리나 변경백에 대한 방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의 행군 속도라면 2주 안에 도착할 거라 생각됩니다.”
라이프치히와 이곳 하노버와의 거리가 200km를 넘는 걸 감안하면 적절한 판단이었다. 물론 죽자고 행군하면 시일을 줄일 수 있겠지만 칼리나도 남의 집 마당에서 제 안방처럼 움직이긴 힘들 것이다.
“흠, 그건 선제후들과 상의를 한 뒤 알려주겠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오늘부터 하노버를 공격할 테니 바로 병력들을 준비시키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선제후들이 제대로 싸우겠습니까?”
“뭐, 본인들이 계속 공격을 하자고 닦달했으니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겠나?”
선제후들은 자신의 영지를 비우고 너무 오랫동안 나와있는 게 불안했는지 공성 병기가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공격을 하자며 징징거렸다.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그럼 직접 병력 끌고 지휘해보겠냐고 묻자 그들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런 놈들을 데리고 싸워야 하는 자신이 불쌍한 건지, 이런 놈들에게 궁지에 몰려 청야전술까지 펼친 사자공이 불쌍한지는 오직 신만이 아시리라.
“아뇨. 제 말은 그들을 믿고 조공을 맡길 수 있느냐는 겁니다.”
“…어쩌겠나? 시선이나 끌어주길 바래야지.”
말을 마친 황제는 곧장 선제후들을 불러모았다. 몸이 달아있던 그들은 곧장 황제의 소집에 응했고 프리드리히는 현 상황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잘들 지내셨소?”
“폐하의 배려 덕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공격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많은 병력들을 모아놓고 바라만 본다면 세상 모두가 저희를 겁쟁이라 비웃을 겁니다.”
은근슬쩍 자신을 겁쟁이로 매도하는 선제후들의 행태에 구역질이 났지만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른 황제답게 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오. 그러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남부에서 칼리나 변경백이 병력을 끌고 북상 중이오.”
“변경백이? 뜬금없이 이곳에는 왜 온단 말입니까?”
“혹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고 싶어 하는 게 아닙니까?”
“이유는 나도 모르오. 다만 그런 의도라면 우리에게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겠소?”
“허면 사자공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고 있다는 겁니까?”
“말했듯 그것도 알 수 없소. 전령을 보내봤지만, 속 시원하게 대답을 안 해주더군.”
필리프는 중재를 위해서 북상한 거라 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는 법이다. 라그나르가 만약 필리프를 상대로 덫을 파서 거짓 정보를 흘린 거라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허면 차라리 칼리나 변경백부터 요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괜히 공성 중에 뒤라도 잡히면 골치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 숫자가 8천에 육박하는데도 말이오?”
“그래봤자 오합지졸이 아닙니까? 저희가 힘을 합친다면….”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주는데 그들의 선봉을 이끄는 건 라그나르요. 하이르 앗 딘을 참수하고 례셰크를 사로잡은 칼리나의 검이자 불패의 바이킹 말이오.”
“…….”
“거기에 이미 적들은 라이프치히까지 당도했다고 하오. 괜히 병력을 나눴다간 이쪽에서 각개격파 당할 우려가 있소.”
“허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변경백이 북진하는 걸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선제후의 말에 황제는 지도를 펼친 뒤 두 곳을 짚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이곳까지 오려면 힐데스하임과 브라운슈바이크를 통과해야 하오. 그러니 그곳에 병력을 오백 정도씩 차출해서 대기시키는 게 어떻소?”
“그들의 숫자가 8천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백이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들을 막진 못할 겁니다.”
“나도 그들을 막을 생각으로 병력을 파병하는 건 아니외다. 단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고 칼리나를 견제하는 용도로 쓰려는 것뿐이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두 명의 선제후들은 그다지 군략에 밝지 못했기에 프리드리히는 참을성을 가지고 자신의 작전을 설명해주었다.
“생각해보시오. 만약 변경백이 우리와 적대하려한다면 힐데스하임과 브라운슈바이크는 거슬릴 수밖에 없소. 배후에 소수기는 하지만 언제든지 자신들의 뒤를 잡을 수 있는 병력이 있다는 건 지휘관 입장에서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거든.”
“그럼 변경백이 악의를 가지고 함락시키면 어떻게 합니까? 애꿎은 병사만 잃는게 아닙니까?”
“그것만으로 그들이 할 일은 끝난것이오. 큰 성은 아니라고 해도 공성에 반나절에서 하루는 걸릴텐데 그동안 우리는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소?”
“으음….”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곳에 차출할 병력은 두 선제후들께서 맡아주실 수 있겠소? 아무래도 성벽을 끼고 칼리나를 견제하는 일이니만큼 정예병이 아니라도 능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오.”
성벽 뒤에서라면 그 누구라도 용감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공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수성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병력을 내놓으라는 말에 둘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전에 써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성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 정도야 감내할 수 있다고 판단했겠지.
“좋습니다. 허면 나이든 병사와 부상으로 전투력이 감소한 병력들을 돌리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오. 어차피 주공은 이곳이 될 테니까.”
그렇게 후방에 대한 대책이 나오자 황제는 자세를 바로 하며 본격적인 공성에 대해 논의했다.
“하노버 공성은 나와 내가 이끄는 기사단이 동쪽에서 주공을 맡을 것이오. 두 분 선제후들께선 북쪽에서 공격해 주시오.”
“차라리 성벽을 다 둘러친 뒤 사방에서 공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서쪽은 강이 흐르고 남쪽은 얼마 전에 성벽과 성문을 보수했다고 하니 공성 병기가 효과를 내기 힘들 것이오.”
거기에 굳이 얘기하진 않았지만 저 큰 성을 포위하면 당연히 포위망이 얇아질 수밖에 없다.
흔히들 공성전이 공격 측은 외각에서 성벽을 때리고 수비 측은 성벽 위에서 대응한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성 내부에서도 포위망이 얇아졌다 싶으면 언제든지 성문을 열고 기병대를 내보내서 병력들을 요격한 뒤 퇴각하기도 했다.
특히 사자공이 이끄는 사자기사단은 이런 게릴라전술에 굉장히 능했기에 되도않는 짓거리를 해서 병력을 잃느니 정석대로 차근차근 공성을 진행하는 게 더 낫다.
솔직히 선제후들이 1인분이나 해줄지도 의문이었고.
아무튼, 그렇게 합의를 본 프리드리히는 돼지와 소를 잡아 병사들을 배불리 먹인 뒤 공격명령을 내렸다.
“궁정백. 병사들에게 전하라. 성벽을 처음으로 오른 자는 그 용기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며 사자공을 사로잡은 자는 내가 친히 귀족으로 임명해주겠다고!”
“병사들의 사기가 치솟을 것입니다.”
막대한 보상과 인생을 역전할만한 기회는 병사들의 사기를 충천시기기에 충분했다.
“집행관. 공격을 집행하라. 내가 직접 전장에서 병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폐하께서 함께하신다니 영광입니다. 병사들도 목숨을 걸고 폐하께 승리를 바칠 것입니다.”
“반드시,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만약 여기서 하인리히를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의 위신이 무너짐은 물론이요 그 누구도 자신의 명령을 받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번 전투는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남을 알고 있기에 황제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하노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인리히. 반드시 너를 지하감옥에 집어넣어 주마. 네놈이 그곳에서 날 내려다보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어.
* * *
공성은 생각보다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무리하게 병력을 투입하는 대신 아침이 밝아오면 병력들을 투입했고 계속해서 예비대를 돌려가며 꾸준히 공성을 진행했다.
그렇게 그들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침은 물론이요 야간에도 따로 별동대를 조직해서 적들의 허를 찌르며 숫자의 우위를 통해 적들의 피로를 누적시켰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날카로웠던 적들의 예기도 점차 깎여나가는 걸 보자 프리드리히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천하의 사자공도 공성전에서는 별수 없군.”
사실 야전이 아닌 이런 공성전에서 사자공이 아니라 그 할애비가 와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적의 기병대가 서쪽 문을 열고 빙 돌아와 몇 번 기습을 하긴 했지만 이미 공성 캠프를 요새화시켜놨기에 그들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이대로 일주일만 더 두들기면 문제없이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무렵 갑자기 후방이 소란스러워졌다.
“콘라드. 저게 무슨 소란인가?”
“바로 확인….”
부우우우우우우웅!!!!
콘라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북과 나팔소리가 허공을 수놓았고 그 뒤를 이어 수많은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두 날개를 펼친 까마귀가 새겨진 깃발이 휘날리는 걸 확인한 프리드리히는 입술을 씹었다.
“라그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