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편지의 내용은 예상했던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요약하자면 사자공의 편지는 “도우우우우우우움!!!!” 그 자체였고 황제의 편지는 “사자공 레이드 콜?”이었다.
뭐, 그 이외에 자신들을 도와주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시시콜콜한 내용들이 적혀있었지만 더 볼 것도 없었다.
애초에 우리는 중립을 지킬 것이고 처음 얘기했던 대로 행동할 생각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나는 연합의 영주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했다.
“일단 사자공에게는 긍정적인 뉘앙스의 답을 보낼 겁니다. 이쪽에서 거부하는 듯한 의사를 보이면 그냥 황제에게 항복해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애초에 이번에 우리가 나선 것 자체가 천하삼분지계를 위함인데 삼발이 하나가 무너져버려서야 본말전도다. 다만 어디까지나 갑은 우리였기에 적당히 희망을 주는 선에서 멈춰야 한다.
“괜찮은 생각이구려. 전령으로는 누구를 보낼 생각입니까?”
“오토를 보낼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는 것보다는 아들을 통해서 듣는 게 더 그럴듯하겠지요.”
내 말에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얘기하면 믿어주지 않겠는가? 오토는 사자공과 사이도 괜찮은 걸로 알고 있고.
“하긴, 우리가 도와준다고 해도 그걸 온전히 믿는 건 별개의 이야기지.”
“오히려 황제의 함정이 아닌가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오.”
“헌데 라그나르 백작은 이럴 걸 예상하고 오토 경을 데려온 것이오?”
“예?”
“그러고 보면 필리프 경은 황제 폐하께서 보냈다지만 오토 경은 라그나르 백작 그대가 직접 데려오지 않았소.”
“허어, 역시 통찰력이 대단하구려. 하이르 앗 딘을 잡을 때도 그렇고 이번에 사자공 전하의 숙청을 예상하는 것도 그렇고… 그대는 꼭 신화 속에 나오는 오라클 같구려.”
의도치 않게 나를 추종하는 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나는 적당히 그 분위기를 만끽한 뒤 헛기침으로 다시 시선을 모았다.
“크흠. 문제는 황제 폐하께 보낼 사절입니다.”
“그것도 필리프 경을 통해서 답을 보내면 되지 않겠소?”
“그건 그렇지만 황제 폐하는 우리가 오기 전에 사자공을 쓸어버리고 싶을 겁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예상할 수 있는 변수에 대한 답변을 하나씩 얘기했다.
“저희가 황제 폐하께 우호적인 답변을 보내면 후방을 신경 쓰지 않고 사자공을 밀어붙일 테고 적대적인 답변을 보내면 중재는커녕 추후 폐하와 적대하게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흐음… 황제 폐하 입장에서 굳이 변수를 만들고 싶진 않겠지.”
“허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오?”
“간단합니다. 아무런 답변도 보내지 않는 겁니다. 답이 없으면 스스로의 행동에 족쇄가 붙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예와 아니요는 두 가지의 선택지를 강요하지만 때로는 침묵이라는 선택지도 존재한다. 요즘 말로는 읽씹인데 아무런 말도 없으면 황제는 갑갑해서 못 견디겠지.
그냥 무시하고 가자니 뒤통수가 근질거리고 그렇다고 기다리자니 내가 어떻게 나올 줄 모르고.
“필리프 경의 사람을 통해 폐하께 이쪽의 행동 여부가 전해질 수도 있소.”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결정을 하는 건 저희니까요.”
회사에서 공문이 나기 전까지는 전부 뜬 소문에 불과한 것처럼 내가 직접 마음먹은 대로 행하기 전까지 필리프의 보고는 참고용밖에 되지 않는다.
“뭐 좋소. 그 부분은 그대가 알아서 잘할 거라 믿고 있겠소. 애초에 그럴 자신이 있으니 우리들을 소집한 것 아니오?”
“물론입니다. 절대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겁니다.”
“내가 지금까지 봐온 그대와 칼리나 변경백 각하를 믿도록 하겠소.”
어차피 지금 와서 내게 이래라저래라한들 바뀌는 것도 없었고 내분만 일어나기에 차라리 그들은 속 편하게 내게 모든 일을 맡겼다.
물론 이는 잘못됐을 때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걸 의미했지만 고인물인 내게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설사 모든 일이 꼬여서 황제와 대적하고 영혼까지 탈탈 털려서 사자공마냥 추방당해도 상관없다. 이베리아반도든, 동로마든, 이집트든, 어디든 가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요점은 내가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런 내가 판단하건대 지금의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 * *
황제는 자신이 보낸 전령이 뭔가 확실하지 않은, 이도 저도 아닌 답을 가지고 오자 고민에 빠졌다. 라그나르 이 개자식은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 이렇게 확실히 흑백을 가려야 하는데 회색을 표명했다.
“빌어먹을. 대체 무슨 꿍꿍이지?”
필리프가 몰래 보낸 편지에 라그나르 백작은 중재를 위해서 올라왔다고 적혀 있긴 했다.
문제는 중재를 위해 올라왔다는 놈이 몇천에 이르는 병력은 왜 끌고 왔으며 만약 그런 거라면 왜 확실하게 포지션을 정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안전을 위해선 사자공을 치기 전에 병력을 돌려서 그놈을 조져야겠지만….”
물론 그랬다간 사자공이 지금보다 더 철벽을 높이 세우고 작센 내의 귀족들을 소집해 자신에게 저항할 수 있었기에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저쪽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사자공을 숙청하는 게 최우선 순위였다. 라그나르는 그 이후에 생각해도 상관없었기에 원래의 계획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막 출발했을 테니 그놈이 이곳에 올 때쯤에는 모든 상황이 끝나있지 않겠는가?
거기에 이미 전장에 나온 이상 상대의 템포에 말려들면 안 된다. 상대가 뭔 개짓거리를 하건 다 무시한 채 자신이 계획한 대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마음먹은 프리드리히는 빠르게 병력들을 지휘해서 하노버로 진군했다. 중간중간 자신을 가로막는 이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은 병력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먹잇감에 불과했다.
“멍청한 놈들이군.”
병력을 끌어모아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판국에 게릴라를 해서 자체적으로 각개격파를 당한다?
사자공도 나이를 먹고 당황해서 그런지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안 할 실수를 한다며 비웃었지만, 하노버에 가까워질수록 황제는 왜 사자공이 시간을 끌었는지 알게 되었다.
“청야전술을 쓰다니…… 하인리히. 정말 끝장을 보자는 거군.”
진군을 할수록 논밭은 불타서 이삭과 낱알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도로는 파헤쳐져 있었고 마을들은 불에 타서 잿더미만 남아있었다.
당연히 중간중간 거점 마을에서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던 황제는 병력들의 사기가 바닥을 칠 걸 알면서도 노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사자공의 행태는 이곳에 현세인지 지옥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잔혹했는데 우물에 독을 푸는 건 기본이요 인근의 강에도 인분과 동물의 사체를 집어넣어서 식수마저 제한했다.
당연히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그 물을 마신 인원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드러누웠고 말들은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 잔혹하고도 악독한 행위에 황제를 비롯한 선제후들은 치를 떨어야 했다.
싸움을 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하노버까지 행군을 하는데도 부상자가 속출하며 전투력과 사기가 처참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좀 쉬려고 하면 야간마다 사자공 휘하의 기병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습격을 해왔기에 병력들의 피로는 계속 누적되어갔다.
한번은 참다못해 기병대들을 쫓아가 봤지만 오히려 적의 복병에 걸려 혼쭐이 난 뒤로 싸움을 걸어와도 무시하고 묵묵히 하노버로 행군만 할 뿐이었다.
그러기를 한 달째, 마침내 황제와 선제후, 대주교들은 눈앞에 닥친 모든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고 하노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군.”
황제는 처음 이스라엘의 땅을 밟은 십자군들처럼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제 이곳만 함락시키고 하인리히를 지하감옥에 처박는다면 모든 일이 마무리되리라.
“콘라드. 서둘러 공성 캠프를 짓고 병력들에게 휴식을 부여하게.”
“알겠습니다. 대신 주변 정찰과 사주 경계는 철저히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콘라드의 말에 황제는 이미 요새화된 하노버의 성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병력들을 출진시켜 성을 함락시키고 그 두꺼운 낯짝을 보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필패일 것이다.
전장에선 늘 냉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 화를 내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 이미 상대와의 심리전에서 완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차피 저 정도로 성벽이 높다면 사다리와 통나무만으로 함락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인력을 갈아넣는다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사자공만 숙청한다고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잖은가.
사자공의 숙청은 강력한 황권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영원한 적과 영원한 친구는 없는 것처럼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병력을 최대한 아껴놓아야 했다.
따라서 최대한 손실없이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선 공성 병기들이 필요했고 열흘 정도면 쓸만한 공성 병기를 만드는 건 물론이요 병사들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한 프리드리히는 오랜 행군으로 지친 몸을 뉘기 위해 막사로 들어가려던 때 기병 대장이 찾아와서 당황스러운 얼굴로 보고했다.
“폐하.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사자공이 폐하와의 회담을 요청했습니다.”
물론 그 얘기를 들은 황제는 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허, 뭐, 뭐라? 회담?”
“예. 직접 만나는 건 아니고 성벽 위에서….”
“이 지랄을 해놓고 회담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황제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분노를 표출하자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보던 기병대장은 황급히 얘기했다.
“…거절할까요?”
“아니, 그대로 진행하게! 대체 뭐라고 목숨을 구걸할지 궁금하구만.”
실상 지금 와서 하인리히와 얘기를 해봤자 좋은 말이 오갈 것도 아니고 달라질 것도 없었지만 프리드리히는 사자공의 제안을 승낙했다.
호위대를 거느리고 화살이 닿지 않는 곳에 멈춰선 황제는 성벽 위에서 자신을 내려보고 있는 하인리히를 향해 조롱 섞인 비아냥을 건넸다.
“하인리히! 내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디서 용기나는 바지라도 입고왔나보지?”
“용기가 나는 편지를 받긴 했지. 그나저나 프리드리히. 이곳까지 오느라 꽤 고생을 한 모양이군. 여행길에 심심하지 말라고 이것저것 준비하긴 했는데… 맘에 들었나?”
능글맞게 대꾸하는 하인리히를 보자 프리드리히는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았지만 화를 가라앉히며 그가 이야기한 용기나는 편지의 의미를 고찰했다.
아니, 고찰할 것도 없이 그건 칼리나 변경백과 라그나르를 의미하는 것일 테지. 다만 이는 확실치 않다.
어쩌면 사자공이 자신을 압박하기 위해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뭐, 이 부분은 라그나르가 이곳에 와봐야 판가름이 나는 문제였기에 지금은 신경을 끄기로 했다.
“하인리히. 그대가 날 능욕하고 기만했지만 본 황제는 누구보다 관대하다. 그대에게 열흘의 시간을 줄 테니 그 안에 항복하게. 그리하면 바로 옆에 있는 브라운슈바이크를 그대의 새로운 영지로 내려주도록 하지.”
나름대로 관대한 처분이었지만 사자공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거절했다.
“잘 살고 있던 집을 뺏고 개집을 준다고 하면 참 좋다고 하겠군.”
“지하감옥 대신 개집이면 나쁘지 않을텐데?”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슈바벤 공작.”
“하인리히 네놈이 정녕 정신줄을 놨구나. 이젠 제국의 전통이고 명예고 의무고 다 필요 없다 이건가?”
황제의 칭호를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앞장서서 수호하고 존중해줘야 마땅할 선제후가 이를 부정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글쎄… 다른 건 모르겠고 이곳에서 그대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제법 괜찮군. 나쁘지 않아.”
말투 하나하나가 거슬리고 시건방졌지만, 프리드리히는 넘어가기로 했다. 원래 높이 날아올랐을 때 추락하는게 더 극적이지 않겠는가.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겨둬라. 살아남는다면 두 번 다시 빛의 영광을 누리지 못한 채 차디찬 지하감옥에 처박혀서 그 질긴 목숨을 연명하게 될 테니까.”
회담은 그걸로 끝이었다.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서로 간에 감정표출만 한 회담이었지만 황제는 충분히 만족했다.
어차피 이 회담에서 나온 이야기는 호위병들을 통해 알음알음 퍼질 것이다. 한 사흘만 지나면 지나가던 강아지도 알게 되겠지.
그리고 그 결과 사자공은 황제의 정당하고도 신성한 권위를 부정했다는 낙인과 함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