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결국 그대가 선택한 길이 그거라면 나도 별도리가 없군. 허나 나의 사촌이여.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깨문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뭐, 내가 이렇게 충고를 해줘도 그대는 지금 달을 뛰어넘어 태양이 되고 싶은 마음뿐일 테지. 그래서 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눈에 뵈는 게 없을 거야.
하지만 기억하게. 태양에 가까워지려 했던 이카루스는 불에 타죽고 말았네. 그대의 행태가 이와 다를 게 무엇인가?
프리드리히. 내 친구여. 하늘을 나는 독수리에게 지상의 사자는 우스운 존재겠지.
허나 날개가 있다고 안심하지 말게. 그 활짝 펼친 날개가 언제 용에게 물어 뜯겨서 바닥으로 추락할지 모르는 일 아닌가?
이쯤 하면 자네도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네. 아직 할 말이 많네만 이만 줄이도록 하겠네.
어차피 전장에서 다시 만날 텐데 그때 못다 한 말들을 나누며 회포를 풀면 될 일 아니던가.
아, 그런데 혹여 그대가 한 번이라도 날 앞선 적이 있었던가? 내 기억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열심히 해보게. 어쩌면 이번이 그대가 날 뛰어넘을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르니.
작센과 바이에른의 정당한 군주. 하인리히 사자공이 슈바벤의 공작 프리드리히에게]
콰직!
편지를 다 읽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구겨버린 프리드리히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하, 죽기 전에 마지막 발악을 하는군.”
“사자공이 저희와 대적하겠답니까?”
자신을 황제라 칭하지도 않고 여전히 바이에른을 자신의 것이라 얘기하고 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렇소. 아무래도 끝까지 항전을 할 모양이오.”
“차라리 잘됐습니다. 이참에 확 쓸어버리지요.”
“흐음….”
사자공이 자신들과 맞서 싸우겠다면 당연히 자신들도 병력을 동원해야 했다. 문제는 이게 예정에 없던 출혈이라는 점이었다.
바이에른이 사자공을 외면하고 작센의 귀족들마저 자신이 내린 칙명에 흔들리고 있었기에 하인리히는 쓸데없는 피를 흘리지 않고 사자공을 쫓아낼 생각이었다.
그가 살아있다는 게 여전히 떨떠름하긴 하겠지만, 지지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작센과 바이에른을 잃어버리고 뭘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의 처가라고 할 수 있는 영국도 사자심왕 사후 프랑스에게 박살이 나고 있었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사자가 무서운 건 그 이빨과 발톱이 남아있을 때뿐이니까.
하지만 아직은 그에게 이빨과 발톱이 남아있었고 그런 그를 상대로 싸운다면 승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사자공에게 다시 한번 편지를 보내야겠습니다. 이전보다 조건을 조금 완화해서….”
“폐하. 그러지 말고 이참에 확실히 정리하시지요.”
“그렇습니다. 폐하의 자비를 거부한 이에게 다시 한번 자비를 베풀려고 해봤자 폐하의 위신만 깎아 먹을 뿐입니다.”
두 선제후의 말에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서둘러 표정 관리를 했다. 말이야 자신의 위신이니 체면이니 하는 그럴듯한 말을 씨부리고 있지만, 실상은 아니다.
저들도 사자공을 제외하고 모든 게 남아있는 작센을 점령하는 것은 부담스러울 것이다.
힘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귀족들과 그들의 밑에 있는 강력한 정예병들. 사자공과 벨프가가 수십 년간 구축해 놓은 질서와 통치의 잔재들을 하루아침에 지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참에 한번 작센의 기를 확 꺾어버리고 불순분자들을 걸러내고 싶겠지. 그리고 그런 기회는 이번처럼 대규모 군을 동원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알겠소. 그럼 사자공이 제대로 된 방비를 갖추기 이전에 서둘러 도착해야 할 거요.”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이 되는 대로 행군 속도를 높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전투가 정해졌기에 그에 대비를 하기 위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당황스러운 얼굴을 한 콘라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폐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그냥 여기서 하게.”
프리드리히는 선제후들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지만 콘라드는 안절부절못하며 선제후들의 눈치를 살핀 뒤 황제의 귀에 속삭였다.
“폐하. 굉장히 심각한 일입니다.”
“…알겠네.”
콘라드가 이렇게까지 얘기하자 진짜 급한 일이라는 걸 깨달은 황제는 선제후들이 기분 나쁠 걸 알면서도 그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밖으로 내보냈다.
“그래. 대체 뭐 때문에 그러나?”
“폐하. 남부에서 칼리나 변경백이 병력들을 끌고 북상 중이라고 합니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대규모의 병력들이 밀라노에서 북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계속 첩자들이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니 아마 늦어도 내일쯤에는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그제야 황제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콘라드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칼리나가 대체 왜? 설마 날 치려고 하는 건가?”
“그것까진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병력을 일으켜서 뭘 할지는 너무나 명백하지 않습니까?”
구린내가 난다는 콘라드의 말에 황제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모든 걸 내려놓고 자비를 바라는 편지를 보낸 지 며칠이나 됐다고 곧장 자신을 도발하는 편지를 보낸 사자공. 그와 동시에 병력을 끌어모아 북상하는 칼리나.
이 둘의 타이밍이 우연히 맞았다기에는 너무 수상하다. 물론 칼리나가 뽑아 든 검이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별다른 연락이 없던 걸 보면 누구에게 향할지는 명백했다.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나?”
“예?”
“생각해보게. 내가 재판에서 사자공의 모든 지위를 박탈한 지 며칠이나 지났나?”
“어… 이제 막 2주가 되어가지 않습니까?”
“그래. 만약 칼리나가 이쪽에 첩자를 집어넣었다고 가정해보게. 이 소식이 그녀에게 전해지고 곧바로 병력을 소집해서 끌고 올라오려면 며칠이나 필요할 것 같나?”
그제야 황제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깨달았는지 콘라드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리 출진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근데 그렇게 생각하면 또 이상한 게 사자공은 왜 알면서도 내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냐는 거야. 뭔가 이상하지 않나?”
확실히 황제의 말대로라면 앞뒤가 안 맞았기에 콘라드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어쩌면 사자공과 칼리나 변경백이 폐하를 압박할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그를 위해 무력시위를 생각했고 병력을 소집했던 와중에 갑자기 일이 터진 겁니다.”
“그나마 그게 그럴듯한 추론이군. 근데 지금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나.”
지금 중요한 건 칼리나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온다는 건 검은 용군단은 물론이요. 라그나르가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네. 어차피 싸우기로 한 거 빠르게 사자공을 밀어버리고 그 기세를 몰아서 칼리나도 정리해야겠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안 될 건 또 뭔가. 수많은 병력을 끌고 남부로 내려가 기약 없는 공성전을 하는 게 부담되는 거지 야전은 자신 있다네.”
“알겠습니다. 그럼 병력들의 행군 속도를 조금 더 높이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콘라드는 자리를 비우자 홀로 남은 황제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선제후들이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면, 자신 역시 그들을 이용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공평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자공을 굴복시킬 수 있고, 이쪽은 칼리나의 날개를 꺾을 수 있으니.
“용은 자신의 둥지에 머무를 때 가장 무서운 법이지. 그 안락한 둥지를 벗어나는 순간 날개가 꿰뚫리며 추락하게 될 텐데… 안타깝군. 칼리나 변경백.”
황제는 칼리나의 최후를 상상하는 건지 피식 웃으며 깃펜을 들었다.
“그 전에… 그 능구렁이 같은 년이 무슨 생각인지 좀 알아봐야겠군.”
* * *
[바이에른 공국 ― 뮌헨 동서부 검은 용군단의 주둔지]
“생각보다 수월한데? 별다른 방해도 없고.”
오랜만에 만난 칼리나는 재미없다는 듯 이야기했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대꾸했다.
“우릴 상대로 앞을 가로막는 건 제발 죽여달라는 말이 아닐까?”
7천의 대병력에 기병은 물론이요. 기사들까지 섞여 있었다. 동아시아 지역이야 허구한 날 몇천, 몇만씩 뽑아내고 심심하면 몇십만 대군 이러니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세에, 그것도 수많은 영주들이 군림하며 분열되어 있는 신성 제국에서 5천 이상의 병력을 뽑아낸 건 과장 조금 보태서 살림 밑천까지 끌고 온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슈바벤 쪽을 지날 때는 뭔가 조금 저항이라도 있을 줄 알았지. 황제의 직할지잖아.”
“뭐, 우리가 왜 올라가는지는 모를 테니까. 필리프가 있기도 했고.”
그녀의 말대로 북상하는 길은 바이에른과 슈바벤의 경계지점을 거쳐 가며 이동했는데 거쳐 가는 도시마다 별다른 저항 없이 우릴 위해 길을 열어줌은 물론이요 물자와 잠자리까지 지원해주었다.
뭐, 이미 사자공의 소집요청을 거부한 만큼 저들에겐 자신을 지켜줄 새로운 방패가 필요했을 것이다. 칼리나는 그 조건에 딱 부합했을 테고.
일단 이번 원정에서 보여줬듯 수많은 병력을 동원할 힘도 있으며 영지 간의 거리도 있으니 자신의 자치권이 침해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추후 황제의 휘하에 들어갈 때 황제를 견제하는 용도로 쓸 수도 있을 테고. 요점은 서로 간에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얘기다.
물론 수많은 인간군상이 있는 만큼 중간중간에 우릴 상대로 헛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약간의 물리력을 동반한 설득 앞에 얌전히 길을 열어주었다.
거기에 바이에른을 지날 때는 슬금슬금 다른 귀족들도 병력을 끌고 우리에게 합류할 정도였다. 아마 이 정도의 병력 숫자라면 뭘 할지는 몰라도 콩고물은 얻어먹을 수 있을 거라고 나름대로 확신이 든 거겠지.
그런 박쥐 같은 놈들은 중간에 쳐낼까 고민했지만 그래도 일단 머릿수가 많으면 황제에게 압박이 될 테니 데리고 가기로 했다.
말했듯 황제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인기투표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게 계속해서 북상을 하고 있던 때 저 멀리서 신성 제국의 문장을 휘날리며 이곳으로 다가오는 전령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경쟁하듯 벨프 가문의 인장이 새겨진 전령이 뒤쫓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목적지는 이곳으로 보였다.
“오, 칼리나. 인기 좋은데? 그 콧대 높은 양반들이 저렇게 전령을 보내는 걸 보면 말이야.”
“그러게나 말이야. 정작 내가 필요할 때는 관심도 없었으면서 말이지.”
이거 완전 로판 제목으로 쓸 수 있는 거 아닐까? ‘몰락한 백작 영애인 내게 공작 전하와 황제 폐하가 집착합니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내가 웃기지도 않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두 명의 전령은 칼리나의 앞으로 인도되었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품속에서 편지를 꺼냈다.
“각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폐하께서 변경백 각하의 앞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변경백 각하. 바이에른과 작센의 공작이신 사자공 전하의 전언이 담긴 편지입니다.”
“읽어보고 답변을 줄 테니 쉬고 있게.”
하지만 칼리나는 편지를 읽지도 않고 곧장 축객령을 내렸고 그 냉담한 반응에 전령들은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물러났다.
괜히 여기서 칼리나의 심기를 건드려서 일을 어그러뜨리는 것보단 얌전히 물러나는 게 더 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