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친애하는 나의 사촌이여. 최근 그대와 내 사이가 굉장히 소원했던 것 같더군.
하지만 우리의 사이가 처음부터 나빴던 건 아니었지. 내가 어린 시절, 아버지였던 오만공을 여의고 막 작센의 공작이 됐을 때를 기억하는가?
그때 우리는 바이에른을 두고 서로 다퉜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대는 통 크게 아무런 대가 없이 내게 바이에른을 양보해주었네.
그 이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 그대가 해줬던 아름다운 양보를 잊지 못한다네. 그때 내가 그대에게 느꼈던 감동은 아직도 내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네.
하지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했던가? 나는 그대의 결단이 나를 배려함은 물론이요 황제로서 베푼 넓은 아량이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지.
그저 내가 잘나서, 나를 달래기 위해 그대가 어쩔 수 없이 바이에른을 줬다고 생각한 거야.
결국, 나는 그대의 배려에 기대어 되도 않는 욕심을 부리며 이기적으로 행동했지. 이런 내 행동이 그대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거라는 것도 모른 채 말이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하네.
내가 대체 무슨 말로서 그대에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저 내가 그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미안하다는 말뿐이군.
그대가 날 용서해준다면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걸 내려놓고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겠네. 그러니 우리의 오랜 인연을 봐서라도 그대의 분노를 잠재워줄 수 없겠나?
그대의 위대함과 자비로움이 전설로 남아 천년만년 살아 숨쉬기를 바라며.
그대의 사촌으로부터]
프리드리히는 벨프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쓱 훑어보더니 코웃음 쳤다.
“하, 그 자존심 강한 친구가 이렇게 편지를 보낼 정도면 몸이 꽤 달았나 보군.”
“지금 와서 용서라도 구하는 편지를 쓴 겁니까?”
“비슷한데 한번 읽어보시겠소?”
황제는 입가에 가득 미소를 지으며 이 편지를 다른 선제후들에게 건넸고 그들은 조롱거리마냥 돌려 읽어가며 사자공을 비웃었다.
“구구절절한 게 누가 보면 연인에게 쓴 편지인 줄 알겠습니다.”
“하하하, 아마 여인에게 편지를 쓰고 기다리는 것보다 더 애가 타고 있을 것이오.”
기분 좋다는 듯 웃고 있는 황제를 보며 로트링겐의 선제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나 폐하. 당연히 사자공을 용서할 생각은 없으시겠지요?”
만약 여기서 갑자기 황제가 사자공을 용서한다? 그럼 자신들은 닭 쫓던 개 꼴이 나는 것이다.
황제라면 몰라도 로트링겐이나 프랑켄은 사자공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다. 물론 지금처럼 황제가 도와준다면 괜찮지만 그때는 이쪽에서 빚을 지는 것이다.
거기에 저 능구렁이 같은 황제라면 사자공을 자신들을 사냥하는 사냥개로 쓸 수도 있는 노릇 아니던가. 그 때문에 황제의 입으로 확실하게 사자공을 숙청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했다.
“물론이오. 그는 황제의 권위에 불복종한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까.”
원하던 답변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선제후들의 얼굴에는 불편함과 불안함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도 사자공과 똑같은 꼴이 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허면 폐하. 그때 약조했던 내용도 동일하겠지요?”
“아, 사후처리 말이요? 물론이오. 지난번에 얘기했던 대로 나는 바이에른을, 그대들은 작센을 나눠 먹으면 되지 않겠소?”
물론 황제 자신도 바이에른보다는 사자공이 머물며 발전시킨 작센이 더 탐났지만, 모든 연합은 내분으로 망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황제였기에 그는 바이에른에서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거기에 위치상으로 슈바벤은 바이에른과 인접했으며 로트링겐과 프랑켄은 작센과 영지를 맞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자신이 바이에른을, 작센을 선제후 둘이 갈라먹는 게 맞았다.
물론, 억지를 부리면 작센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아직 사자공을 숙청한 것도 아닌데 선제후들과 각을 세우는 건 다 된 밥에 잿물을 뿌리는 격이었다.
거기에 사자공처럼 영지가 떨어져 있으면 이런 유사시에 아무것도 못 하고 무장해제를 당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바이에른은 자신의 칙명이 떨어지자 그 누구도 사자공을 위해 일어나지 않았다.
말이야 자신의 명령 때문이라지만 이는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하고 실상은 이득 볼 게 없으니 그냥 조용히 있는 것뿐이다.
그러니 그의 경우를 본보기 삼아 자신의 직할지만큼은 자신의 눈이 닿는 곳에 두고 감시해야 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운이 좋으면 선제후들이 작센을 갈라먹을 때 서로 좋은 곳을 먹겠다고 싸울 수도 있었다. 먹을 것도 아니고 땅을 반으로 나누는 건 무조건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그때가 되면? 느긋하게 둘의 사이를 조율하며 얻어낼 걸 얻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 * *
[작센 공국 하노버 ― 하인리히 사자공의 거처]
최근 며칠 사이 사자공의 얼굴은 이전에 비해 폭삭 늙어있었다.
사자처럼 찰랑이던 그의 금빛 머리칼은 그 빛을 잃어 색이 바랜 지 오래였으며, 총기가 넘치는 그의 두 눈동자에는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윤기 나고 매끄럽던 그의 피부는 퍼석퍼석해진 지 오래고 다듬지 않은 수염은 제멋대로 나 있었으니 그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야인이라고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됐나?”
일의 성사 여부를 묻는 사자공의 말에 시종장은 차마 답변을 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편지를 내밀었다.
안의 내용을 보지 않아도 시종장의 모습과 태도에서 답을 미루어 짐작했는지 사자공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내뱉었다.
“실패했나 보군.”
“…폐하도 적당한 선에서 병력을 물리실 겁니다. 진정으로 공작 전하를 숙청하겠습니까?”
“그대도 내 사촌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나?”
“….”
사자공은 이 사태를 풀기 위해 황급히 황제에게 서신을 보냈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사태를 주도한 건 황제였고 그를 설득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테니까.
그 때문에 마지막으로 정에 기대어 그에게 편지를 보내봤지만, 아무래도 자신의 사촌은 기어코 그 칼에 자신의 피를 묻히고 싶은 모양이었다.
스륵.
제국의 화려하게 새겨진 봉인을 뜯고 안의 편지를 꺼낸 사자공은 떨리는 손으로 접힌 편지를 펼쳤다.
[내 사촌이여. 내가 그대에게 해줄 말은 단 한마디밖에 없네.
죽거나 도망치거나.
전자를 택한다면 그대는 장렬한 죽음을 맞을 것이며, 후자를 택한다면 그간의 인연과 의리를 봐서 뒤를 쫓지는 않겠네.
부디 그대가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빌겠네.
제국의 적법한 황제이자 슈바벤과 바이에른의 지배자.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봤지만 안의 내용은 다를 게 없었다. 거기에 바이에른의 지배자라. 이미 그는 바이에른을 먹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하하, 그래도 도망치면 그걸 쫓지는 않겠다고 하니 이를 고마워해야 하나?”
“공작 전하….”
“내 잘못이 크네. 시종장 그대의 말을 들었다면 이런 일에 처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제가 각하를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위안할 것 없네. 그보다 이제는 그대의 입에서 공작 전하라는 말도 듣지 못하겠군.”
사자공은 편지를 내려놓은 뒤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야겠지. 그나마 오토는 라그나르 백작의 밑에 있으니 다행이군. 황제도 그를 건드리지는 않을 테니….”
“전하. 그겁니다!!!!”
“뭐, 뭐가 말인가?”
박력 넘치는 시종장의 말에 사자공은 드물게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라그나르 백작과 칼리나 변경백이 있지 않습니까!? 남부에 서신을 보내서 이 일의 전말에 대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뭔가 새로운 대답이라도 나올까 봐 기대했지만 자신 역시 해봤던 생각이기에 사자공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전하. 바이에른과 다른 곳의 귀족들이 이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건 사자공 전하가 숙청을 당하든 뭘 하든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얘기이니 그런 게 아닙니까?”
“흐음… 그건 그렇지.”
“다른 이들은 이번 사태에서 어떻게 콩고물이나 얻어먹을까 생각하겠지만 그는 아닐 겁니다. 다음 차례가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다른 이들처럼 맘 편히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는 없겠지요.”
“프리드리히 역시 그걸 모르진 않겠지. 당연히 조치를 취하지 않았겠나?”
“어차피 밑져야 본전입니다. 이대로 망명하신다고 한들 다시 이곳을 밟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가진 모든 힘을 끌어모아서 저항이라도 해보시지요.”
“저항이라… 가능하겠나?”
“가능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사자공 전하 자신을 믿으십시오.”
시종장의 조언에 반쯤 죽어있던 사자공의 눈가에 생기가 돌아왔고 그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네 말대로 해보지. 즉각 발이 빠른 전령들을 준비시키게.”
“알겠습니다. 또한, 외부에 나가 있는 병력들을 전부 이곳으로 불러모으고 작센 전역에 공문을 돌려 귀족들을 끌어모으겠습니다.”
작센은 그래도 아직 자신의 입김이 남아있기에 최대한 병력들을 긁어모은다면 5천 정도는 징집할 수 있을 것이다.
“부탁하네.”
시종장은 서둘러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집무실을 뛰쳐나갔고 사자공 역시 바로 깃펜을 꺼내 들었다.
냉정히 따지고 보면 자신은 되도 않는 도박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자신의 편지가 도착하자마자 라그나르가 지원을 온다고 해도 빨라야 3개월, 일반적으로 6개월은 걸릴 테니까.
어쩌면 그가 자신의 편지를 무시할 수도 있었고 최악의 경우 황제의 편에 서서 자신을 뜯어먹기 위해 도끼를 휘두를지도 모른다.
상식적으로 들불처럼 번진 황제의 기세를 본다면 당연히 그에게 합류해서 콩고물이라도 얻어먹는 게 이득일 테니까.
“하지만 라그나르라면 분명 다음 차례가 자기라는 걸 알고 있겠지.”
그는 자신이 수없이 죽여 온 다른 야만인들과는 달랐다. 그는 정치적으로 닳고 닳은 귀족들보다 교활하고 신중했으며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노회한 야만인이었다.
거기에 그가 거절하든 말든 이미 자신은 끝났다. 자신의 처가라고 할 수 있는 잉글랜드는 사자심왕 리처드가 전사한 뒤 막장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그의 동생 존이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그는 실정에 실정을 거듭하며 프랑스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이 상태로 영국에 망명해봤자 그는 자신을 황제에게 팔아넘기고 프랑스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리라.
“후… 인생이란 게 이렇게 허무할 줄이야.”
전 세계를 호령했던 자신이 선제후도 아닌, 저 남부의 촌구석에 처박혀있는 변경백과 야만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했지만, 자존심이 밥 먹여주던가?
황제에게 한 방 먹일 수만 있다면 엎드려서 그들의 발이라도 핥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살아남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기만 한다면 언제고 프리드리히의 목 깊숙이 사자의 송곳니를 박아넣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