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제국 법원에서 사자공이 아웃로(Outlaw) 형벌에 처해졌다.―
이 판결은 순식간에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그와 함께 황제가 사자공을 토벌하기 위해서 병력을 일으켰다는 소문도 따라붙었다.
본래 누군가를 숙청할 때는 은밀하고 조용하게, 상대가 반항할 틈조차 주지 않고 이루어져야 했다. 숙청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하지만 황제는 사자공을 상대하기 위해선 여론의 도움이 필요하다 여겼는지 재판의 결과를 하나도 숨기지 않고 그대로 공표했다.
그 소식에 황제파들은 환호와 갈채를, 사자공을 따르는 이들은 분노를, 중립을 지키는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은 둘 이상만 모이면 이에 대해 떠들어댔으며 돈과 명예를 노리고 용병과 상인들이 뉘른베르크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때를 기다리던 황제는 마침내 2만이 넘는 병력을 직접 이끌고 작센을 침공했다.
물론 후방에 사자공의 영지인 바이에른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우두머리인 사자공만 추방하거나 숙청하면 끝나는 게임이었기에 황제는 과감하게 작센으로 칼끝을 돌린 것이었다.
황제의 판단은 의외로 정확했는데 바이에른에는 구심점 역할을 해줄 귀족이 없는 데다 정벌에 앞서 황제는 오직 사자공만을 숙청할 것을 천명했다.
거기에 바이에른은 아무래도 사자공이 직접 머무는 작센보다는 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본인이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사자공의 편에 설 테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황제는 말 그대로 사자공과 끝장을 볼 생각이었고 그렇기에 혹시 사자공을 돕는 귀족이 있다면 똑같이 아웃로의 형벌을 적용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사자공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파문하자 결국 바이에른의 귀족들은 그 누구도 먼저 나서지 못하고 그저 황제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그런 바이에른의 모습에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대주교들과 두 명의 선제후들,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
물론 사자공이 이끄는 사자기사단과 이민족과의 전투로 단련된 휘하의 정병들을 무시할 순 없었지만 그뿐이었다.
명분도 이쪽에 있고 병력의 수도 이쪽이 우월했으며 아군의 사기도 훨씬 드높았다.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전투였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자공에게 연민의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타깝구나. 하인리히. 사자공이니 제국의 기둥이니 뭐니 하면서 많은 이들이 그대를 떠받들어 줬지만, 정작 네가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들고 일어날 이가 하나도 없다니.”
* * *
<신성 로마 제국 남부 밀라노 ― 칼리나 변경백의 영지>
거대한 회의실에 8명이나 되는 인원들이 모여있었지만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깬 건 이곳의 영주이자 남부의 변경백인 칼리나였다.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켠 뒤 진중한 목소리로 좌우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본 변경백이 왜 그대들을 불러모았는지는 다들 알 거라 믿습니다.”
칼리나의 말에 다른 귀족들은 미묘한 얼굴로 침음을 흘렸지만 칼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라그나르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고 우리는 우리의 안위를 위협하는 현실에 맞서야 합니다.”
이래저래 포장했지만 전쟁을 준비하라는 칼리나의 말에 귀족들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허나 변경백 각하. 아웃로는…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황제는 지금 칼을 뽑아 들었고 앞을 가로막는 게 누구든 그 칼을 휘두를 겁니다. 자신을 막는 이들까지 전부 아웃로의 형벌을 부과하겠다는 걸 보면 내전도 불사할 생각입니다.”
“더군다나 사자공의 직할지인 바이에른조차 저렇게 가만히 있는데 저희가 거기에 참전할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미리 얘기가 되어있던 귀족들이 주저하면서 반대를 이야기할 만큼 아웃로의 파급 효과는 엄청났다.
사실 아웃로라는 형벌 자체는 교황의 파문과 다를 게 없었지만, 선제후들은 물론이요 대주교들까지 합심해서 황제를 밀어주자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큰 파급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그대들의 걱정은 이해합니다. 허나 그러면 반대로 묻겠습니다. 황제가 북부의 사자공을 숙청하고 나면 그다음 칼끝은 어디로 향할 것 같습니까?”
“으음….”
“뭐, 제가 직접적으로 황제의 명을 거절하지도 않았고 사자공을 숙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숙청하지는 않겠지요.”
칼리나의 말대로 여러 차례 황제와 반목한 사자공과는 다르게 그녀는 다소 비협조적이라도 어쨌든 황제가 얘기를 하면 듣는 척이라도 했다.
실제로도 황제의 명을 받들어 하이르 앗 딘을 참살하기도 했고, 불만을 표시했을지언정 폴란드 침공에 라그나르를 보내지 않았던가.
거기에 스스로 가문을 일으켜 세웠으며 합리적으로 영지를 다스린 데다 보니파시오와 맞서 싸우며 남부를 지켜냈기에 제국 내에서 그녀에 대한 우호 여론은 꽤 높은 편이었다.
그런 그녀마저 별다른 명분 없이 숙청한다면 중립을 지키고 있는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고 이 이상 내전이 확대되면 프리드리히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로부터 제국은 내전으로 망한다고 하지 않던가? 고대의 로마 제국이 그러했고, 동로마 제국도 내전으로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갔으니 같은 로마의 이름을 이어받은 신성 로마 제국 역시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비록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지만 말이다.
거기에 원역사에서도 사자공을 팽함으로써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며 제국이 탄탄대로만 걸어갔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당장 지금은 알 수 없을지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제국은 서서히 힘을 잃어갔다.
그 증거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손자이자 하인리히 6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가 죽고 난 뒤에는 제국은 대공위시대가 열린다.
그렇게 50년이 넘는 긴 시간을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버텨냈던 제국의 황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하게 된다.
그 시기를 거치며 제국은 중흥기를 맞이했으나 30년 전쟁에서 두들겨 맞고 이후 나폴레옹에게 철저하게 짓밟히게 되고 결국 마지막 황제였던 프란츠 2세에 의해 제국은 해체되고 만다.
“그러나 사자공이 숙청되고 나면 우리의 행동반경이 줄어들고 이전에 비해 간섭이 커질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금인칙서로 우리의 자유를 보장받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막대한 힘 앞에 그런 건 한낱 종이 쪼가리일 뿐입니다. 안 그래도 이탈리아 북부 공략에 열을 올리고 있는 황제가 우리에게 종군을 요구하면 어쩔 겁니까?”
황제가 사자공의 죄를 물을 때 내세운 게 명령 불복종이었다. 실상이 어쨌건 겉으로 볼 때 사자공은 황제의 명을 수차례 거절했으니까.
그런데 이 시점에 황제의 종군을 거절한다? 당장은 그냥 넘어가더라도 황제가 뒤끝을 보이면 감당이 안 된다.
“한두 번이야 종군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매년마다 연례행사처럼 이어진다면 병력의 손실과 소모되는 물자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황제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기에 결국 다른 귀족들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병력을 일으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겠군요. 변경백께서는 황제 폐하와 사생결단을 내실 생각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중재를 위해 가는 겁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폐하가 저희를 공격한다면 저희도 자위를 위해서 반격해야 할 테지만 그게 아니고선 칼 한 번 휘두를 일 없을 겁니다.”
“병력은 어느 정도나 동원할 생각이십니까?”
“이곳을 지키는 병력도 둬야 할 테니 5천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데 제 휘하의 용기사단도 동원할 생각입니다.”
당사자인 칼리나는 담담히 얘기했지만 정작 그녀의 말을 들은 영주들은 하나같이 놀란 얼굴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용기사단까지 동원한다는 건 그녀가 그만큼 이번 내전에 진심이라는 걸 의미했으니까.
“벨렌테 경. 이번에 제노바에서도 쇠뇌병들을 지원해준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아마 사흘 내로 500명 정도가 도착할 겁니다.”
“총독께서 큰 결단을 내려주셨군요. 만일 이번 중재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얻게 될 테고 저는 그것들을 전부 그대들과 공정하게 나눌 생각입니다. 또한….”
칼리나는 직접 다른 영주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으며 그들의 의문을 해소해주고 보상을 이야기하며 그들을 고무시켰다.
또한,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녀 특유의 카리스마와 리더쉽을 발휘해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내부 결속을 다졌다.
사실 이전에 미리 약조가 된 만큼 계약서와 함께 칼리나의 권위를 이용해 이들을 찍어 내리며 출병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사기가 바닥을 찍는 것은 기본이요 자칫 잘못하면 중간에 배신을 때릴 수도 있었기에 그녀는 최대한 말로써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또한, 명분은 충분합니다. 말했듯 우리는 황제와 싸우러 가는 게 아니라 제국의 내전을 막으러 가는 거니까.”
물론 물리력을 동반한 중재겠지만 때로는 말과 법보다 주먹과 칼이 가까운 법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황제가 자신감에 넘쳐 있을 때는 좀 두들겨 패줘야 한다.
“흠… 다른 건 전부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라그나르 백작.”
“예. 말씀하십시오.”
“그대 휘하에 있는 폐하의 차남이신 필리프 경과 사자공 전하의 아들인 오토 경은 어쩔 생각이오?”
몽페라토의 후작인 윌리엄 5세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지만 미리 예상한 질문이었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함께 종군시켜서 사자로 쓸 생각입니다. 사자공이든 황제 폐하든 아무래도 제 말보다는 아들들의 말은 듣지 않겠습니까?”
“만약 폐하와 싸우게 된다면 어쩔 생각이오?”
“폐하와 싸우게 된다면 보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건 명분이 중요하다. 우리가 사리사욕을 위해 일어난 게 아닌, 제국의 분열을 막고 황제에게 충언을 올리기 위해 들고일어났음을 모두에게 보여줘야 한다.
“확실히, 그게 서로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겠군. 알겠소.”
윌리엄 5세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그의 뒤를 이어 알본의 여백작 베아트리체가 병력의 판도를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라그나르 백작. 저는 그대와 칼리나 변경백께서 제 원수를 갚아준 만큼 이번 출정에도 적극적으로 임할 생각입니다. 허나 우리와 사자공의 병력을 합쳐도 황제 폐하의 병력 숫자에 비해 크게 모자라지 않습니까?”
“예. 대충 계산해보면 우리 쪽은 1만 정도 되겠군요.”
물론 그 1만도 모든 병력들 박박 긁어서 모았다는 가정하에 계산한 거다. 원역사에서 사자공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장해제 돼서 도망쳐야 했으니까.
물론 이번에는 다를 테지만 그래봤자 그 휘하에 몇이나 모이겠는가? 아마 잘 쳐줘도 2~3천이 한계일 것이다.
“제가 비록 전쟁에 대해 잘 모르고 전투가 병력의 숫자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 숫자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승산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를 위해서 제가 그렇게 밖을 돌아다니지 않았습니까?”
“폴란드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허나 내전에 외세의 세력을 끌어들이면 오히려 우리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황제 폐하는 폴란드라면 치를 떨지 않습니까.”
“그 부분은 저희가 감당해야지요. 결국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 뒷감당은 선택에 대한 대가일 뿐이고요.”
모든 선택에는 후회가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선택을 함에 있어서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가 한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라 믿는다.
“동의합니다. 라그나르 그대라면 이번 일도 현명하게 대처하며 우릴 이끌어 나가겠지요. 그대를 믿겠습니다.”
“반드시 백작님의 믿음과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베아트리체의 질문을 끝으로 대강 이야기가 정리되는 듯하자 칼리나는 박수를 치며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나흘 뒤에 출정할 겁니다. 그전까지 다들 준비를 끝마쳐 주십시오. 각자 집합 포인트까지 늦지 않게 나와주십시오.”
물론 이곳에 한 번에 모여서 가는 게 아니고 다들 집합해서 가는 거라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를 위해서 미리 물자들을 집적화시켜놓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가도를 따라 이동할 생각이니,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