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신성 로마 제국 작센 하노버 ― 하인리히 사자공의 본거지]
달그락. 달그락.
홀로 쓰기엔 넓은 공간이지만 황제와 버금가는 권위를 가진 사자공의 집무실에서 식기 소리가 울렸고 마지막 남은 빵조각을 삼킨 사자공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와인을 들이켰다.
“흠. 오늘 밥은 특히나 더 맛있군. 시종장. 자네가 날 대신해 주방장에게 고맙다고 전해주게.”
“….”
하지만 사자공의 말에도 시종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이상함을 느낀 사자공은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시종장?”
“….”
“시종장!!!”
“아, 부르셨습니까. 공작 전하.”
두 차례나 더 그를 부르고 나서야 시종장은 고개를 들어 사자공을 바라보았고 사자공은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철두철미한 자네가 정신을 놓고 있다니 드문 일이군. 고민거리라도 있나?”
“으음, 고민거리라기보단 조금 신경 쓰이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자네가 고민을 할 정도면 꽤 중요한 첩보겠지. 얘기해보게.”
사자공은 자신의 앞자리를 바라보며 손짓했고 시종장이 자리에 앉자 손수 와인을 따라 그에게 건네주었다.
“자, 어디 한번 얘기해보게.”
“으음, 그게….”
말하라고 판까지 깔아줬지만 시종장은 혀로 입술만 축일 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사자공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고 마침내 시종장은 작은 목소리로 오늘 아침에 보고받은 첩보를 전달했다.
“오늘 아침에 뉘른베르크에서 첩보가 왔는데 황제 폐하께서 쾰른과 마인츠, 트리어의 대주교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대주교들을?”
대주교라는 말에 사자공의 눈이 가늘어졌고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말이 첩보지 확실하게 걸러지지 않은 정보였기에 본래라면 시종장은 그냥 말하지 않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아니, 보고를 하더라도 확실히 내용을 파악 후 거를 정보는 걸러서 깔끔하게 갈무리한 뒤 보고를 해야 했다.
이는 애초에 확실하지 않은 첩보를 보고해서 혹여나 꼬투리를 잡힐 일을 만들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들어오는 정보들을 사자공에게 보고하는 순간 사자공은 그 보고를 바탕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보고한 정보가 잘못된 거라면? 응당 그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져야 했다.
하지만 얼마 전 황제가 선제후들을 만난 데다 이번에 대주교들까지 만났다? 이건 3살짜리 어린아이가 봐도 너무 수상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는 않아도 보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예.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런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자네가 확실하지 않은 정보를 내게 올리는 건 꽤 드문 일인데….”
사자공이 눈살을 찌푸리며 질책하듯 이야기하자 시종장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물론 이런 변명은 당연히 일 처리를 못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빠른 보고가 우선이라 생각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공작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황제와 선제후, 대주교들은 이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들이지 않습니까? 만약 그들이 불순한 의도를 품었다면….”
“황제가 선제후에 이어 대주교들과 독대를 했다라… 이건 확실히 좋은 소식은 아니군.”
“뭔가 구린내가 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애초에 그게 황제가 할 일이잖나. 나도 종종 다른 귀족들이나 주교들을 만나 친목을 다지지 않는가? 심증만으로 황제를 압박하거나 트집 잡을 수는 없지.”
“물론 황제의 위치에 있는 이상 선제후나 대주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그것도 업무의 일환이지만 이렇게 단시간에, 그것도 한두 명과 보는 게 아니라 그들 전부와 보는 건 명백히 수상합니다.”
“흠….”
필사적으로 사태의 심각성과 ‘만약’의 경우를 이야기하며 공작을 설득하자 그게 어느 정도 먹혀들었는지 사자공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시종장은 그런 사자공을 설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칼리나 변경백이라면 몰라도 공작 전하는 작센과 바이에른의 공작이자 선제후 중 한 분이십니다. 헌데 공작 전하만 쏙 빼놓고 모인다는 건 의심스럽습니다.”
“즉, 황제가 나 몰래 뒤에서 작당을 하고 있다는 말이로군.”
“예. 그리고 예상하건대 대주교들과 선제후들을 불러모은 건 여론을 구성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여론은 필경 전하께 좋은 여론은 아닐 겁니다.”
“지난 전쟁에서 내가 발을 뺀 것에 대해 따지고 들 수도 있겠군.”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찌 됐건 저희도 그에 대한 대비는 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부분은 일단 생각해보겠네. 자네도 알다시피 지금은 자중해야 할 때가 아니던가.”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안 좋아졌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지난번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아군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고 황제의 명을 충실히 따른 것도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확실히 황제의 행동이 수상하긴 했지만 그게 오히려 황제의 노림수일 수도 있었다. 이쪽에서 안달 나서 먼저 움직이면 그를 빌미로 트집을 잡아 자신의 숨통을 단번에 죄어오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실제로 황제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했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건 꽤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으니 일단은 나름대로 대비책을 세워두기로 했다.
“혹시 오토나 남부에 심어놓은 첩자들에게서 온 편지에 이에 관한 내용도 적혀있었나? 가령 황제가 칼리나 변경백과 독대를 했다든가, 아니면 라그나르 백작을 뉘른베르크로 불렀다든가 하는 것 말일세.”
“그런 내용은 딱히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설사 황제가 날 공격하려 해도 배후에 칼리나 변경백을 두고 일을 벌일 리가 있겠나?”
만약 자신이 숙청당하고 나면 그다음은 칼리나가 될 것이다. 그녀가 바보가 아니라면 얌전히 황제의 행동을 바라만 볼 리는 없겠지.
거기에 황제는 최근 연이은 패배로 인해 귀족과 민중들로부터 믿음과 신뢰, 위엄을 잃은 상태였다. 이미 부리와 발톱이 다 빠진 독수리가 감히 사자를 사냥할 수 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이런 첩보를 들었는데도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사자는 손쉬운 사냥감을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 않던가.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이지.”
“따로 생각해둔 대책이 있으십니까?”
“우선 황제와 선제후들이 머무는 뉘른베르크와 프랑켄, 로트링겐에 첩자를 더 파견하고 주교들을 구워삶아서 대주교들이 뭘 하려는지 파악하게.”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황제가 나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게 사실로 밝혀지면… 황제는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될 걸세.”
“‘만약’을 위해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믿고 있겠네.”
계속 마음 한구석에 걸렸던 불안을 해소해서인지 시종장은 한층 밝아진 얼굴로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방을 나섰다.
다시금 넓은 집무실에 홀로 남게 된 사자공은 이전과는 다르게 생동감 넘치는 눈빛으로 벽에 걸려있는 지도를 바라보며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호엔슈타우펜이라고 처음부터 황제는 아니었지. 그렇다면, 벨프가가 그 자리를 노려봐도 되는 것 아니겠는가.”
* * *
[신성 제국 남부 니스 ― 라그나르의 본거지]
“흐음. 생각보다 다들 잘 해주고 있군.”
나는 이비의 무릎을 베고 침대에 누운 채 보고서를 훑어보며 감탄했다. 엄선해서 뽑은 인재들에 내가 기초적인 방향성을 정해줘서 그런지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하고 있었다.
다만, 힐데는 그런 내가 못마땅스러웠는지 경멸 어린 눈초리로 날 바라보며 힐난했다.
“정작 라그나르 당신이 제일 게으름을 피우는 건 알고 있습니까?”
“게으름이라니, 세상에 나처럼 근면 성실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확실히, 놀고먹는 것에 한해서는 굉장히 근면성실하더군요. 그 카이로프랙틱인지 뭔지를 빌미로 이븐 시나의 몸을 주물럭거리는 것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건 치료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거라니까? 너도 받고 나면 몸이 풀린 것 같다고 좋아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나는 지금 휴식을 취하는 중이야.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쉬는 것도 그 이상으로 중요하거든.”
솔직히 지금까지 쉼 없이 달려왔으니 약간의 휴식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하지만 힐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휴식이라는 건 일을 해야 의미가 있는 법입니다. 일도 안 하고 휴식을 취하다니, 세상에 그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에 있더라. 내가 바이킹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자아 성찰 하나는 기깔나게 하는군요.”
“물론이지. 소크라테스가 이르길 ‘너 자신을 알라고 했잖아?’ 나는 야만인이지만 개념찬 야만인이거든.”
내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능글맞게 대꾸하자 힐데의 눈꼬리가 올라갔고 이는 그녀의 잔소리가 길어진다는 신호와도 같았다.
안 그래도 북부로 올라가게 되면 쉬고 싶어도 못 쉴 텐데 나는 이 꿀 같은 휴식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화내지 말고 너도 여기 와서 좀 쉬어.”
나는 기습적으로 힐데를 끌어당겼고 그녀는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벌러덩 엎어졌다.
“이게 무슨… 아얏! 수염은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난 듣지 않고 열심히 수염을 그녀에게 문질렀다. 당연히 힐데는 내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아직까지 그녀가 내 손아귀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한참 힐데를 붙잡아서 괴롭혀주고 있는데 갑자기 고드프리가 노크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그의 무례에 대해 뭔가를 얘기하기도 전에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뱉었다.
“백작 각하. 황제가… 황제가 마침내 병력을 일으켰습니다!”
* * *
<신성 로마 제국 뉘른베르크>
선제후와 대주교들로 이루어진 법정에서 하인리히 사자공에 대한 판결은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신속하게 이뤄졌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사자공에게 이적행위, 내란 선동, 불복종 죄를 물었고 선제후들은 제국의 법이 게르만의 전통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사자공을 보호해주던 모든 법을 박탈하는 형벌과 함께 그가 가진 모든 영지를 몰수하는 판결을 내렸다.
자기 입맛에 맞춘 판결이 내려지자마자 바르바로사는 곧장 사자공 토벌을 천명하며 작센을 침공하기 위해서 병력을 동원했다.
선제후들은 기다렸다는 듯 황제의 소집에 응했고 황제를 따르는 병력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콘라드. 드디어 사자를 사냥할 시간이 왔네.”
“축하드립니다. 폐하.”
“고맙네. 다 자네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덕분이네.”
물론 남부의 칼리나 변경백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녀가 뭘 하기도 전에 모든 일이 끝나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녀의 처분도 정해야겠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든가, 그게 아니라면 팔다리 정도는 뽑아놔야 하지 않겠는가. 그도 아니면 이탈리아 남부 공략에 써먹을 수도 있을 테고.
벌써부터 행복한 미래가 그려졌지만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단은 눈앞의 적에게 총력을 쏟기로 했다. 비록 자신이 원하던 대로 흘러가기는 했지만, 사자공은 여전히 버거운 상대였으니까.
“하인리히. 네가 가진 모든 것들을 빼앗아주마. 법의 보호를 박탈당한 너를 지지하고 도와줄 영주는 그 누구도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