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한글? 아니 그보다 라그나르 당신 이 글자를 읽을 줄 아는 겁니까?”
“어? 아니, 읽을 줄 안다고 해야 하나? 어… 음…….”
한국인에게 한글 읽을 줄 알아요? 라는 소리를 들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아니 근데 왜 한글이 여기에 적혀있는 거지?
설마 환단고기니 환국이니 하는 뭐 그런 얼토당토않은 것들이 구현된 건가? 혹시 게임사가 엄청난 환빠였던 건가? 내가 알기로 다 외국인으로 구성된 걸로 알고 있는데?
이런 내 의문은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풀리게 됐다.
[본 문서는 우리의 찬란한 문명을 후손들에게 남기기 위해 적어둔 것이다. 그러나 라틴어로 글을 적는다면 외적들에게 우리의 기술이 유출될 염려가 있기에 우리는 새로운 암호체계를 만들었다.]
[물론 이조차 완벽한 보안은 아닐 것이다. 또한, 이 문서가 후대까지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정작 이를 읽는 방법이 소실된다면 이 글은 쓸모없는 종잇조각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면 로마가 멸망하고 우리가 증오했던 적들이 우리의 유산을 가로챌 수도 있겠지.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이여. 그대가 로마의 후예라면 로마의 찬란했던 영광과 정수를 다시 재건할 수 있을 것이며 이방인이라면 로마에 버금가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흠… 이게 이런 식으로 구현되나 보네.”
본래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도시를 개발하거나 재건축을 하다 보면 낮은 확률로 고대의 문명 이벤트가 발생한다.
당연히 고대의 문명은 로마를 의미했고 그들이 가졌던 찬란한 문명의 일부를 재현하는 게 가능했다. 가령 송수로 기술이라던가 도로를 까는 기술이라던가 건물을 짓는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근데 현실은 게임이 아니었기에 이런 식으로 고대의 유물처럼 발견되는 모양이었다. 안의 내용이 한글인 건 당연히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런 것일 테고.
“그래서 라그나르. 진짜 이 안의 내용을 읽을 수 있는 겁니까?”
“뭐, 대강은?”
내 말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고 힐데는 못 믿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입니까? 당신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은 따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라틴어나 독일어에 대한 교육을 못 받았다는 거지 룬 문자는 읽을 줄 알어.”
“룬 문자? 그건 오딘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얻어낸 글자 아닙니까?”
“너 그런 것도 알아? 그거 이단 행위 아니야?”
이건 북유럽 신화에 정통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실이다. 정화교단의 고위 성직자인 힐데가 북유럽 신화를 알고 있으면 그림이 좀 이상하지 않나?
“당신이 종종 자장가 대신 북유럽 신화에 대해 얘기해주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이게 그 룬어라는 겁니까?”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글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물었고 나는 적당히 대꾸했다.
“뭐, 대강 비슷하긴 하지.”
솔직히 힐데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녀에게 사실 나는 한국인이고 이건 세종대왕이 창조한 한글이라고 얘기할 순 없지 않은가.
“근데 왜 룬 문자가 여기 지하실에 있는 겁니까? 적혀 있는 양을 보아하니 단순히 일기나 수필을 한두 줄 적어놓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아, 이거 고대 로마인들이 적어놓은 거야. 나도 대강 훑어봐서 자세히는 모르는데 고대의 기술들에 대해 적어놓은 것 같아.”
“하, 자신들을 멸망시킨 이들의 언어로 적어놓다니.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군요.”
그러고 보니 로마는 게르만 때문에 망했지. 바이킹이 게르만은 아니지만, 뭐 같은 계열이긴 하지. 애초에 노르만도 게르만의 한 갈래니까.
“글쎄… 아무튼 좀 더 분석해봐야 알 테지만 도로와 수도교에 관한 내용인 것 같아.”
“로마의 송수로 기술과 도로를 까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요. 이런 곳에서 이런 행운을 마주할 줄은 몰랐군요.”
“일단은 입단속… 크흠. 사제님. 지금 여기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함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 정중한 부탁에 사제는 힐데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아후라마즈다에게 맹세했다. 자신의 신을 걸고 맹세한 만큼 어지간해선 입을 열지 않으리라.
“힐데. 일단은 이 글을 읽는 방법을 가르쳐줄 테니 나중에 입 무거운 사람들 몇 명 데려다가 글 전부 해석해서 레오나르도랑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가져다줘.”
내가 직접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는데 나는 봐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글로 적혀있는데 모르는 게 말이 되냐고?
수학 문제를 읽는다고 그 문제들을 다 풀 수 있는가? 이게 정녕 한국말인지 의심이 드는 전공 서적들을 읽으면 곧장 이해가 되던가?
이곳에 적혀있는 것들은 대충 그런 느낌의 글들이었다. 읽어도 내가 뭘 읽은 건가 싶고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글들.
거기에 양도 한두 장이 아니었기에 나 혼자서 이걸 해석하는 건 무리였다. 적당히 요점만 간추리려고 해도 뭐가 중요한지 아닌지 나는 모르기에 통짜로 번역을 할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그리스의 불에 대한 내용이 없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걸로 만족해야지.”
개인적으로 로마의 고대 기술 중에 제일 탐나는 건 그리스의 불이었지만 수도교와 도로도 나쁘진 않다. 급으로 따지자면 A급 정도?
특히 도로에 관한 기술은 지금의 내겐 로또나 다름없었는데 나는 나중에 검은 용군단 일원들의 교류와 무역을 위해 각 도시들 사이에 추가적으로 도로를 깔고 정비할 생각이었다.
그때 기술 복원에 성공한다면 훨씬 더 적은 돈으로 효용성 좋은 도로를 놓을 수 있을 테니 로또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 * *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가 머무르는 뉘른베르크의 황궁. 그곳에는 수많은 방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몇 개의 방은 굉장히 특별했는데 그 방들에 손님들이 들어오는 건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에 그곳에 선제후 두 명이 찾아온 것에 이어 새로 세 명의 손님이 들어왔는데 이들 역시 선제후들에 비해 뒷배경이 만만치 않았다.
마인츠와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
그들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도 선제후에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이들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저들은 제국에서 교회의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게 가능했다.
“흐음, 황제가 왜 우리를 소집한 것 같소?”
이단 심문관 출신이라 이런 정치적인 일에는 다소 어두운 마인츠의 대주교가 말문을 트자 그 옆에 있던 쾰른의 대주교가 답했다.
“뻔하지 않습니까? 본인이 아쉬운 소리를 하려고 불렀겠지요.”
“그거야 그렇겠지만, 당최 무슨 소리를 할지 이해가 안 가는구려.”
“얼마 전 선제후들이 이곳을 방문했다고 하는 걸 보면 그와 연관된 게 아니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또다시 이탈리아 원정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를 위해 선제후들과 저희에게 지원을 요청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그럴듯하기는 한데… 설마 아직도 그 헛된 망상에 빠져있단 말이오?”
“나도 이탈리아 원정은 아니라고 보오. 몇 년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그곳에는 칼리나 변경백이 휘어잡고 있지 않소?”
“선제후들과 우리가 함께 압박한다면 칼리나 변경백도 굴복하지 않겠소? 그가 사자공처럼 기반이 튼튼한 것도 아니니….”
대주교들은 서로 생각하고 있던 바를 얘기했지만 그렇다고 결론이 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건 당사자인 황제가 와야 알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더 흐르자 마침내 이 모든 의문을 해결해줄 인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들 오시오. 이곳의 주인으로서 손님들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오, 아닙니다. 덕분에 저희도 오랜만에 이렇게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폐하도 아시다시피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이 막중하다 보니 시간을 내는 게 힘들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게라도 얘기해줘서 고맙구려. 그럼 그렇게 바쁘신 분들의 시간을 뺏는 것도 죄송한 일이니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겠소.”
간을 보지도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에 대주교들은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저 능구렁이 같은 황제가 교묘한 혓바닥으로 사람을 쥐고 흔들며 압박을 했던 사례가 얼마나 많던가?
그런 그가 밑밥도 안 깔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건 그가 굉장히 여유롭거나, 똥줄이 타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얘기였다.
“본 황제는 이번에 제국의 기강을 바로 세울 생각이오.”
“북이탈리아로 다시 한번 원정을 가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황제는 북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날 때 남부 분란의 해결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교황권을 짓누르고 황권을 드높이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숨어있었다.
그런 만큼 기강을 세우겠다는 황제의 말은 북이탈리아 침공을 의미한다 여겼지만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어차피 그곳은 칼리나 변경백이 새롭게 세력을 구축하고 있고 본 황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굳이 그녀와 부딪힐 이유가 뭐가 있겠소?”
황제의 말대로 칼리나 변경백은 보니파시오를 꺾은 뒤 남부의 실력자로 급부상했으며 검은 용군단이 결성되고 하이르 앗 딘을 토벌한 이후로 그녀의 명성은 전 세계에 진동하고 있었다.
오랜 숙원이었던 북이탈리아 원정과 함께 칼리나 변경백의 콧대를 한번 꺾으려는 게 아닌가 했지만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결국 대주교들은 황제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에 그의 입을 통해서 정답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번에 사자를 사냥할 생각이오.”
그 순간 이 넓은 응접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고 대주교들의 눈알이 뒤룩뒤룩 굴러가는 소리만 들렸다.
반면 황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도 알겠지만 최근 들어 하인리히의 행동은 도를 넘고 있소. 지금까지는 제국에 헌신한 그의 공을 봐서 참고 넘어갔지만 그는 지난번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선을 넘었소.”
“폐하….”
대주교들은 뭔가를 얘기하려 했지만 황제는 듣지 않고 자기 할 말을 했다.
“물론 내가 사자공과 사적으로 안 좋은 관계인 건 맞소. 허나 나는 늘 그를 대할 때 사적인 감정은 숨긴 채 공과 사를 구분했지만, 그는 그게 안 되는 모양이더군.
결국, 전쟁은 패배했고 제국의 위신은 땅바닥에 떨어졌으며 병사들은 핏값을 치러야 했고 나는 모두의 술안줏거리가 되었소. 그의 고집과 억지로 인해 수많은 손해를 입었고 나는 대의를 위해서 그를 숙청할 생각이오.”
황제의 말이 끝났지만 그의 말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인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게 갑작스러운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그대들도 알다시피 사자라는 짐승은 한 번에 사냥을 성공하지 못하면 반대로 사냥꾼이 사냥당할 정도로 무서운 짐승이오.”
“폐하.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내전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그를 방지하기 위해 그대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오. 사자공을 파문해주시오.”
파문. 이 행위는 오직 교황의 권한이자 그가 휘두를 수 있는 최고의 무기였다. 그걸 해달라는 건 문서를 위조하라는 얘기밖에 더 되겠는가.
“할 수 있겠소?”
황제의 물음에 마인츠의 대주교는 답변 대신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에 대한 대가로 저희는 무엇을 받을 수 있습니까?”
“황제와 호엔슈타우펜의 이름을 걸고 그대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겠소.”
자신만만한 황제의 말에 세 명의 대주교는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하더니 마인츠의 대주교가 대표 격으로 답변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지금 당장 답변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사안에 대해 의견을 통일한 뒤 다시 면담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편할 대로 하시오. 허나 기억해두시오. 나는 그대들이 어떤 결정을 하건 칼을 뽑아 들 것이라는 걸.”
그 말을 끝으로 바르바로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아마 이쯤이면 저 엉덩이 무거운 양반들도 자신의 말뜻을 알아들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