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준비가 되는 대로 올라가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헌데 백작 각하. 단순히 절 그곳에 보내서 제 충성을 시험하는 게 목적은 아니시잖습니까? 그곳에서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눈치 하나는 빨라서 좋다.
이곳에 두고 쓸 거라면 내 말에 의문을 품지도 않고 시키는 그대로 복종하는 인물이 다루기 훨씬 편했다.
하지만 북부로 보내는 만큼 내 조언이나 지시 없이도 상황을 헤쳐나갈 정도로 눈치 있고 강단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물론 그녀가 탈다스와의 내부 권력다툼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그건 내가 개입해서 그런 것일 뿐 그녀 정도면 합격선에 부합할 정도로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난 자네의 그 빠른 눈치가 참 마음에 들어. 아랫사람이 눈치가 빠르면 윗사람이 편하거든.”
“상인이 눈치가 없다면 혀 깨물고 죽어야겠지요.”
“그 패기는 마음에 드는군. 일단 자네는 북부에 자리를 잡은 뒤 하랄 블로탄과 교역을 하게. 내가 보냈다고 하면 그도 흔쾌히 교역에 응할 걸세.”
어차피 북부에서 우리가 무역을 할 곳이라고 해봤자 폴란드나 하랄 블로탄밖에 없다.
적대국인 덴마크는 우리와 무역을 해주지도 않을 테고 스웨덴 역시 지난번에 우리를 도와주긴 했지만 그건 단순히 덴마크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하랄 블로탄이라면 이번에 백작 각하께서 지원을 가셨던 바이킹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서류를 건네줄 테니 한번 쭉 읽고 가게. 괜히 그쪽에서 예의 없이 행동해서 목 잘리지 말고.”
내 말이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요한나는 작게 웃었지만 내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자 그녀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이곳도 그렇지만 그곳도 말보다 도끼가 더 가까운 곳이거든. 뭐, 내가 보낸 만큼 자네 목이 수확될 일은 없겠지만 야만인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정중하게 대하게. 특히 하랄 블로탄은 나를 대한다 생각하면 편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본거지는….”
나는 찬찬히 놓인 지도를 살피다가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는 벨렌테에게 물었다. 그의 식견도 듣고 싶고 내 요청에 의해 투자를 하는 만큼 그의 의견도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벨렌테. 자네는 북부에 새로 둥지를 튼다면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예? 어… 저라면 여기 비스마르나 뤼벡 쪽에 자리를 잡을 것 같습니다.”
“흐음, 이유는? 거리상으로만 보자면 여기 그라이프 스발트나 로스토크, 슈트랄 준트가 훨씬 더 낫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곳에는 아직 야만인들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도로나 도시의 치안은 말할 것도 없고 대도시인 함부르크와 인접한 비스마르나 뤼벡이 물건의 처분이나 물자를 지원받기에도 좋을 겁니다.”
“정확하네. 요한나. 방금 벨렌테가 얘기한 것처럼 뤼벡이나 비스마르 둘 중의 한 곳에 자리를 잡게. 개인적으로는 뤼벡이 더 좋을 것 같지만 텃세 때문에 자리 잡기도 힘들고 땅값이나 물가도 더 비싸겠지.”
만약 하이르 앗 딘이 발트해에 자리 잡고 있으면 무역을 할 생각 자체를 접었겠지만, 그는 이미 내게 토벌됐기에 북부에서 물자가 털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아직 사자공의 동방 식민지 운동에 굴복하지 않은 야만인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 수가 소수에 긴 시간이 지난 만큼 그들도 동화되어 가고 있으니 그렇게 큰 위험은 아니다.
“그럼 비스마르에 자리를 잡을까요?”
“그건 자네 판단에 맡기겠네.”
나였다면 스스로의 무력에 자신이 있기에 야만인들의 구역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겸사겸사 야만인들 털어서 노예나 물자 수급도 하고.
하지만 요한나에게 그런 무력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 그녀에게 온전히 맡기는 게 나을 것이다.
“그리고 거래를 할 때 모피나 광물, 철 등을 주로 구매하게. 뭘 내다 팔지는 자네가 알아서 생각하고.”
북부는 모피와 광물, 철이 특산품으로 나오는 데다 물품의 특성상 썩는 것도 아니니 창고에 모아두기도 편할 것이다. 남부로 가져와서 팔면 비싸게 되팔 수 있기도 하고.
“벨렌테. 제노바의 함대를 빌리면 일 년에 몇 번 정도 발트해로 갈 수 있겠나?”
내 물음에 벨렌테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대답했다.
“북해의 바다가 워낙 극성이기도 하고 거리가 거리인지라 그곳까지 가는 비용도 고려해 본다면 1년에 두 번 정도가 적당할 겁니다.”
“1년에 두 번이라… 그 이상은 힘들겠나?”
“물론 각하께서 부담해주시는 비용과 동행할 상선의 수, 저희가 얻게 될 이익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제노바나 백작 각하나 서로 간에 웃기 위해선 1년에 두 번이 적합할 겁니다.”
그의 대답에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지금 당장 요한나가 북부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하랄 블로탄과 교역을 한다고 해도 분기에 한 번이 최대일 것이다.
저쪽에서 받은 걸 처분하지 못해 재고가 쌓이고 돈이 묶이겠지만, 이쪽에서 돈을 지원해줄 생각이니 반년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얼마 뒤에는 내가 직접 북부로 올라갈 생각이기도 하고.
“좋아. 그 부분은 총독께 한번 여쭤봐 주게. 자세한 내용은 요한나가 북부로 올라가서 실제로 하랄 블로탄과 거래하는 양을 보고 추가로 전해주겠네.”
배 한두 척으로도 다 싣고 올 수 있는 양인데 굳이 4~5척을 보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거기에 지금 당장 처리할 일도 아니기에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나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전권을 줬다는 건 그대에 대한 내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네.”
“알고 있습니다.”
“내 신뢰와 믿음을 빌미로 내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지 말게.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통수 맞는 걸 썩 좋아하진 않거든.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걸 명심하게.”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커다란 가슴을 두들기며 얘기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녀의 가슴으로 시선이 따라갈 뻔했다. 아마 옆에서 힐데가 이 모습을 봤다면 눈을 치켜뜨며 잔소리를 하지 않았을까?
갑자기 힐데 하니까 최근 들어 바쁘다는 핑계로 그녀와 떨어져 지냈던 게 생각났다.
물론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랬던 거지만 너무 안 찾아가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애초에 그녀가 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내 존재 그 자체였으니까.
* * *
둘과의 대화를 끝마친 나는 곧바로 힐데를 보기 위해 성을 나섰다. 고드프리가 조언하길 요새 그녀는 최근 사원에서 숙식을 하고 있다고 하니 엇갈리지만 않는다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정화교단의 사원이나 기독교의 교회나 영주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10분 정도 걷자 사원에 도착했다.
원래는 말을 타고 갈 생각이었지만 바로 접었다. 원래 어디든 간에 상급자나 권력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부담스러운 법이다.
그 때문에 전령을 통해 방문 의사를 전하고 곧장 가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에 일부러 느긋하게 걸어온 것이다.
“오… 제법 그럴듯한데?”
정화교단의 사원은 일반적인 교회와는 다른, 오히려 이슬람의 모스크 같은 모양새였는데 작긴 해도 나름 웅장한 맛이 느껴졌다.
내가 고개를 찬찬히 돌리며 구경하고 있자니 정화교단의 사제가 수행원들을 이끌고 허겁지겁 내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 각하. 이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사제는 능숙하게 나를 이끌며 사원 여기저기를 설명해주었다.
물론 내 방문 목적은 단순히 힐데를 보는 거였지만 저쪽에서 저렇게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하는데 매몰차게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힐데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하더군요.”
“힐데? 아… 힐데가르트 수녀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예.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사제는 나를 지하실로 이끌었는데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모습과는 다르게 지하실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사제님. 교단의 사원은 지은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습니까?”
“아, 맞습니다. 다만 이 사원이 지어지기 전에 이곳은 교회의 터였다고 합니다.”
“교회의 터 위에 사원을 올렸다는 말씀이십니까?”
뭐지? 이거 완전 NTR 아닌가? 시체 능욕도 이 정도면 선을 넘은 건데? 이 정도면 사탄도 눈물을 흘리면서 박수를 쳐줄 것이다.
“음… 그게 저희도 그 사실을 모르고 지은 데다 교회에 얘기해봤는데 그쪽에서도 난감해하더군요. 그래서 신성 모독과 같은 행위만 안 한다면 묵인해주겠다고 했습니다.”
하긴, 이미 건물 다 올려놨는데 부술 수는 없지 않은가. 교회 입장에서도 정화교단의 수녀인 힐데가 내 심복으로 있는데 굳이 갑질을 하며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도 않을 테고.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요. 헌데 힐데가 지하실에는 왜 들어가 있는 겁니까?”
“아, 그게 지하실의 재건축 때문에 안을 뒤지던 중에 오래된 고문서들이 나왔습니다.”
“고문서요?”
“예. 언제 쓰던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양이 꽤 되더군요. 그래서 교회에 얘기해서 그쪽의 성직자를 불러왔는데 그쪽에서도 고개를 젓더군요.”
“그럼 지금 그 문서들을 해독하고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사제에게 자초지종을 듣는 사이 힐데가 머무는 곳에 도착했고 그의 말마따나 힐데와 몇몇 교인들은 방에 틀어박혀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다.
“힐데?”
“라그나르? 여기엔 무슨 일입니까?”
내가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그녀는 눈을 땡그랗게 뜨며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네가 며칠 동안 여기에 틀어박혀 있다고 해서 와봤지.”
친근하게 날 이름으로 부르는 힐데의 모습에 교인들이 기겁했지만 내가 별로 신경 쓰지 않자 꽤 놀라는 눈치였다.
하긴, 밖에서 보면 고위 귀족에게 반말을 뱉은 꼴이니까. 아마 나와 힐데의 진짜 관계는 정화 교단 내에서도 고위급이나 그때 당시의 관계자들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뭐 걱정이랄 건 없고 궁금해서 와본 거야. 근데 이게 다 고문서들이야?”
“예. 저도 나름대로 언어에는 정통하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읽어봐도 해석은커녕 어떤 언어를 기반으로 만든 건지조차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 힐데는 정화교단의 성녀이니만큼 이런저런 지식은 물론이고 언어학에도 능하다.
그런 그녀가 감조차 못 잡는 언어가 있다고?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책을 하나 집었고 이내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거… 하… 나참.”
“왜 그러십니까?”
“이거 한글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