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성의 외부를 한 바퀴 돈 나는 성안을 돌아보기로 했고 그중에 가장 먼저 프리드리히의 둘째 아들인 필리프를 만나보기로 했다.
“백작 각하. 기왕 필리프 경을 뵐 거라면 오토 경도 함께 부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토를 말입니까?”
“예. 백작 각하께서 필리프 경을 먼저 뵈려는 건 단순히 그가 예산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잖습니까?”
“그렇긴 하지요.”
“백작님의 생각은 그렇지만 타인이 볼 때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혹여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수도 있으니 두 분을 한 번에 뵙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아…… 어이가 없지만 고드프리 경의 말이 맞습니다. 혹 괜찮으면 오토를 데려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고드프리가 자리를 비우자 나는 내 본거지에서도 정치적인 균형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퍼 한숨을 내쉰 뒤 집무실 문을 두들겼다.
“필리프. 나일세.”
그 말과 함께 집무실 안에서 무언가 쓰러지고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당황한 모습의 필리프가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배, 백작 각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 돌아왔으니 이것저것 보고를 받으러 왔네. 자네도 고작 한두 장짜리 보고서로 그간의 일을 전부 얘기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아, 그건 그렇지요.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제가 보좌했을 텐데….”
“그럴 필요 없네. 바쁘게 일하는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것도 못 할 짓이지. 그런데 자네 자고 있었나?”
뺨에 노골적으로 새겨진 자국과 살짝 떡진 머리는 누가 봐도 꿀잠을 자고 있었다는 걸 의미했기에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예? 아… 그… 예. 최근 너무 일이 밀려서 야근을 자주 하다 보니….”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무리하지 말게. 이러다 자네가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내가 황제 폐하를 어찌 보겠나?”
“예.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꼭 이븐 시나를 찾아가서 검진을 받게. 절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고 명령이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슬슬 비켜주겠나? 날 계속 밖에 세워둘 생각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나는 필리프의 맞은편에 앉았고 그는 간단한 안줏거리와 함께 와인을 가지고 내 앞에 마주 앉았다.
내가 와인을 잔에 따르는 사이 그는 끙끙거리며 수십 장의 서류를 들고 왔고 그 엄청난 두께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왜 가져왔나?”
“예? 그간의 예산 사용에 관해서 보고를 듣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자네가 알아서 어련히 잘했겠지. 혹시 이상한 곳에 돈 횡령했나?”
내 물음에 필리프는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즉각 대답했다.
“절대 아닙니다. 저는 물론이고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네.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 텐데 내가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웃긴 일 아니던가. 수하에게 일을 맡기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지는 것.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네.”
“백작 각하의 믿음에 감사드립니다.”
“자, 그럼 그 흉물스러운 종이 더미는 저리 치워버리고… 지금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예산이 얼마나 되나?”
“당장 쓰실 현금을 얘기하시는 겁니까?”
“현금도 포함한 모든 물자를 얘기하는 걸세.”
내 물음에 잠시 동안 고민하던 필리프는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두세 장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제일 위에 있는 건 저희가 가진 모든 물자입니다. 그 뒤에 있는 건 현재 보유한 현금이며 그다음 장은 물자들이 적혀있습니다.”
완벽하게 내가 원하는 답을 내놓는 필리프를 나는 기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전수조사는 또 언제 했나? 그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쉬운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말이군. 고생했네.”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아니기는, 원래 돈을 만지는 게 굉장히 피곤한 일이야. 각 부서마다 와서 여기는 왜 예산을 주는데 우리는 안 주냐고 땍땍거리는 건 기본이고 뭐가 부족하니 사달라, 어디가 망가졌으니 고쳐달라, 저것 좀 해달라… 굉장히 힘든 일이지.”
나는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확실히 예산, 인사와 관련된 부서는 힘이 세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래저래 피곤한 게 현실이다. 걸핏하면 야근이고. 개같은 거.
“하하… 그래도 덕분에 정무적인 감각을 익힐 수 있게 됐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께선 제가 이런 것들을 배워오길 바라셨는지도 모르지요.”
“글쎄, 내가 황제 폐하의 깊으신 뜻을 어찌 알겠나.”
물론 깊은 뜻이랄 것도 없고 황제는 단순히 사자공이 오토를 보내니 자신도 그에 질세라 아들을 보낸 것뿐이다. 겸사겸사 내가 뭘 하나 염탐도 하고 싶을 테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가장 중요한 예산 집행과 세수에 관한 일을 필리프에게 맡겼다.
이는 필리프가 돈이 나가고 들어오는 구멍을 다 알고 있으면 역으로 프리드리히에게 내가 원하는 정보를 흘리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마 황제는 필리프가 보낸 보고서들을 보고 나에 대한 경계심을 줄였을 것이다.
특히 군대를 행군시키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돈과 물자를 필요로 하는데 예산 담당관인 필리프의 눈을 속여서 그 많은 돈을 빼돌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물론, 내 휘하의 병력들이 움직일 돈은 칼리나와 제노바를 통해 유통하기로 했고 물자의 집적화로 인해서 기존에 들던 비용의 절반만으로도 가능했기에 필리프를 속이는 게 가능했다.
그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어차피 황제에게 정보가 흘러들어 갈 테니 쌤쌤 아니던가.
“아무튼 정말 고생했네. 당분간 고생했으니 내게 인수인계하고 이 주… 아니, 한 달 정도 푹 쉬고 오게. 원한다면 뉘른베르크에 갔다 와도 좋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게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계속 일하게 해주십시오.”
“자네도 참 특이하군. 그래도 사흘 정도는 쉬게.”
이것까지 거부하기는 어려웠는지 필리프는 고개를 끄덕였고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와 함께 고드프리와 오토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백작 각하.”
“아, 어서 오게. 오토. 안 그래도 자네에게 물어볼 게 있었는데 딱 맞게 잘 와줬네.”
나는 아까 필리프가 건네준 서류를 뒤적이며 그에게 형식적으로 병력 운용이나 예산 지원에 있어 생기는 고충 사항을 몇 가지 물었다.
사실상 오토를 부른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내가 누군가를 편애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기 위함이었기에 그는 적당히 대답했고 나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필리프. 예산이 안정됐으니 오토에게 조금 더 지원을 해주게. 아무리 돈이 부족해도 그렇지 산적들이 쓰던 장비를 주워서 쓰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물론 군대의 육성을 명 받은 얀 3세가 오토의 병력 중 알짜배기만 빼가고 그쪽에 중점적으로 예산을 지원했으니 그런 거지만… 뭐 어쩌겠는가. 애초에 오토가 지휘하던 병력들은 군대라기보단 경찰에 가까웠으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기본적인 제식용 병장기를 일괄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하게.”
나는 충분히 필리프를 위무한 뒤 밖으로 나와 오토와 함께 복도를 거닐며 물었다.
“오토. 새로 뽑은 병력들의 상태는 어떤가? 갑작스레 정예병들을 차출해서 공백이 클 텐데.”
나는 기존의 경찰과 군대를 혼합해놓은 형태에서 얀 3세에게 군대 육성을 명하며 확실하게 서로의 역할에 선을 그어놓았다.
“저도 그를 걱정했습니다만 이전과는 다르게 역할이 확실하게 분담되어서 부담은 많이 줄었습니다.”
뭐, 그야 그렇겠지. 현대를 기준으로도 경찰과 군대는 서로 하는 업무가 다르지 않던가.
오토의 병력들도 기존과는 다르게 니스의 치안을 지키는 게 주 임무가 됐으니 신병이나 빈약한 장비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애초에 민간인들을 상대하는 이들을 완전 무장을 시키는 것도 사치고.
“헌데 자네 휘하의 병력들도 산적 토벌에 합류했다던데 크게 다친 이들은 없나?”
“예. 주공을 맡은 건 아니고 도망치는 병력들을 쫓거나 포위하는 선에서 지원을 했기에 크게 다친 이들은 없습니다.”
“그래. 자네가 이 니스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기에 내가 안심하고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거라네.”
나는 오토를 위무하는 것 이외에도 경비대가 머무는 숙소들을 점검했다. 당연히 안에서 쉬고 있던 경비대원들은 오뚜기마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편히 쉬고 있게.”
물론, 영주가 그렇게 얘기한다고 진짜 편히 쉴 정도로 배짱 좋은 이들은 없었기에 나는 서둘러 건물 안을 훑어본 뒤 오토에게 돈 꾸러미를 건넸다.
“그간 고생했는데 수하들이랑 회식이나 하게. 지금 근무를 하거나 집에서 쉬는 이들도 나중에 꼭 맛있는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조치하게나.”
“알겠습니다. 백작 각하.”
“그래. 수행은 이쯤이면 됐고 자네도 마저 볼일 보게.”
그렇게 오토와 헤어진 나는 근처에 있는 병력들의 막사로 들어갔다. 이미 내가 시찰을 다닌다는 얘기가 돌아서 그런지 얀 3세는 병력들을 사열시킨 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 각하.”
“사열하느라 고생이 많았네. 병사들의 군기가 바짝 들어있군.”
“아무래도 며칠 전에 대규모로 도적들을 토벌해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하긴, 실전을 경험한 군대와 안 한 군대와는 천지 차이다. 이… 정신적인 무장이 잘 되어 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이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그대 휘하의 병력들이 크게 활약했다고 하더군. 고생 많았네.”
“감사합니다.”
“토벌 과정에서 다치거나 죽은 이들은 얼마나 되나?”
“사망자가 둘, 중상자가 다섯, 경상자가 열다섯 정도 됩니다.”
“생각보다 많군. 당사자나 유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게.”
“예. 그 부분은 고드프리 경께서 지시하셔서 특별히 신경 써서 처리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고드프리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난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 숙인 뒤 병력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혹시 병력 운용이나 조련 과정에서 발생하는 애로사항이 있나?”
“예. 다른 게 아니라 둔전 정책을 재고해주셨으면 합니다. 둔전으로 인해서 병력들이 피로도가 쌓여 있습니다.”
“흐음….”
“둔전의 장점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군사훈련과 농사일을 겸해서 하다 보니 본격적인 군사훈련에 매진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아시다시피 전투력이라는 게 좋은 장비를 찬다고 올라가는 건 아니잖습니까.”
확실히 둔전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병력들 입장에선 군사훈련도 받으면서 농사까지 지어야 하니 죽을 맛일 것이다.
실제로 게임에서도 둔전제를 시행하면 식량의 소모는 눈에 띄게 줄어들지만 사기와 전투력 역시 그에 걸맞게 감소한다.
“확실히 그건 나도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네. 다행히 투자가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예산에도 여유가 있으니 둔전은 올해까지만 경작하면 될 걸세. 일단 시작한 건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병장기도 추가로 지급해 주겠네. 물론 지금 당장 전원에게 배분하는 건 힘들 것 같고 순서대로 분배해줄 테니 사이즈를 조사해서 제출해주게.”
어차피 공장의 노예들이 숙련되기 전까지는 완성되는 병장기의 질이 그렇게 좋지는 않을 것이다. 이걸 팔아치울 수도 없으니 시범 생산한 것들을 건네주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