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그렇게 라그나르가 남부에서 평화롭게 도시를 발전시킬 무렵. 북부는 긴박하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었다.
“폐하. 프랑켄 공국의 에버하르트 3세 공작 각하와 로트링겐 공국의 사이먼 1세 공작 각하께서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집무실에서 서류 더미에 파묻혀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황제는 궁정백 콘라드의 말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정말인가!?”
“예. 다만 이곳에 와서 폐하와 이야기를 나눈 뒤 어떻게 할지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으음… 그거야 당연히 그럴 테지. 그래서 언제 온다던가?”
“지금 두 분 다 뉘른베르크로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전령이 보고하기로 곧장 출발했다고 하니 점심이 되기 전에 도착할 겁니다. 아무래도….”
“둘이 입을 맞춰놨나 보군. 그게 아니고서야 한날한시에 내 제안을 승낙하고 둘이 사이좋게 뉘른베르크로 올 리가 없을 테니까 말이야.”
제법 잔머리를 굴린 둘의 행태에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보안 유지에 신경을 쓰는 게 아니겠습니까?”
“정확히 내 진의를 파악하고 싶은 거겠지.”
말을 마친 프리드리히는 조용히 눈을 감고 에버하르트와 사이먼 1세를 떠올렸다. 둘 다 프랑켄과 로트링겐 공국을 다스리는 공작이자 선제후였지만 그 이상 생각나는 건 없었다.
물론 누구의 아들이고 자식은 몇 명이고 등과 같은 자잘자잘한 정보들은 떠올랐지만 이거다! 하고 떠오를만한 건 없다는 얘기였다.
좋게 말하면 특별히 흠잡을 일 없는 군주이고, 나쁘게 말하면 우유부단하며 강단 없는 군주라는 얘기다.
오히려 그 두 명보다 야만인이었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훨씬 더 자신에게 큰 울림을 줄 정도였으니까.
“라그나르… 그래. 라그나르.”
“예?”
뜬금없이 라그나르를 되뇌는 황제의 모습에 콘라드가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황제는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말을 했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그 친구 말일세. 꽤 능력 있는 친구였지?”
“예… 뭐, 그렇습니다. 칼리나 변경백 휘하에 있는 걸 감안해도 본인의 능력 자체가 괜찮은 친구입니다. 다만 최근 거슬리는 소문이 조금 떠돌고 있습니다.”
“거슬리는 소문?”
“남부에 있는 영주들을 결속하고 있다 합니다.”
“그거야 이전에 내가 하이르 앗 딘 토벌을 명한 뒤로 계속해 오고 있는 것 아니었나?”
물론 자신의 명령은 어디까지나 명분이고 실제로 연합을 구성한 건 라그나르의 능력일 것이다. 대체 야만인이 그 콧대 높은 영주들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그 친구도 참 영악해. 내가 내린 명령을 명분으로 그렇게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정도니 말이야.”
황제의 말에 콘라드 역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은 몰라도 원수 사이나 다름없던 제노바까지 끌어들인 건 솔직히 놀랐습니다.”
“듣기로 홀몸으로 도제의 아들을 구해냈다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 줄 모르겠군.”
“아마 칼리나 변경백이 그를 띄워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소문을 낸 게 아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혼자서 그게 가능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하긴, 라그나르를 꽤 아끼는 듯하더군. 자네가 보내온 보고서들을 보다 보면 이게 진짜 그 칼리나 변경백이 맞나 싶을 정도야.”
“실제로 칼리나 변경백이 부재 시 라그나르가 연합을 이끌어가는데 그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만 봐도 라그나르에 대한 칼리나 변경백의 신뢰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지요.”
콘라드의 말에 황제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흠… 이거 재수 없으면 제2의 사자공이 나올지도 모르겠군.”
“그건 너무 비약하신 것 아닙니까?”
“생각해보게. 사자공이 왜 그리 힘이 커졌나? 전쟁을 하는 족족 승리하고 내정에 충실했기 때문 아니던가. 지금 딱 라그나르의 모습이 그렇지 않나?”
황제의 말에 콘라드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 말대로 최근 니스는 연합의 막대한 지원과 투자를 바탕으로 전쟁의 상처를 딛고 도시를 재건 중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총대장으로 참전한 전투에서 늘 승리를 거두었다. 례셰크를 사로잡을 때도 그랬고, 하이르 앗 딘을 토벌할 때도 그랬으며, 폴란드 북부의 검의 형제 기사단을 토벌할 때도 그랬다.
“외부에서 압력을 넣어서 견제를 해볼까요?”
“아니, 어차피 제노바와 손잡은 이상 베네치아와 라틴, 테살로니카 공국과 부딪힐 수밖에 없네. 괜히 이쪽에서 손을 써서 경계심을 늘릴 필요는 없지.”
“하지만 그 세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칼리나 변경백이 지금까지 저희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던 건 따로 세력 구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잖습니까.”
“나도 그건 알고 있네. 하지만 생각해보게. 내가 이번에 사자공을 숙청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녀가 세력을 키우건 말건 무슨 상관인가?”
어찌 보면 광오하다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칼리나와 라그나르의 기세가 오르고 있다 한들 사자공만큼은 아니었다.
세력이 사자공보다 큰 것도 아니었고 선제후가 아니었기에 정통성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그녀는 여자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녀는 캐스팅보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그 때문에 황제가 사자공을 숙청해서 지각을 변동시키면 그녀가 가진 힘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둘이 동맹을 맺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는 위아래로 포위당하게 됩니다. 혹여 잘못하면 내전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게 아닌가. 그리고 그를 위해 지금껏 은밀하게 몇 년 동안 준비해왔으니 걱정할 필요 없네.”
“허면 필리프에게 보내오는 정보의 양을 늘리라고 하겠습니다.”
“뭐, 그건 자네 좋을 대로 하게. 다만 쓸데없이 뒷조사하다가 걸려서 망신당하는 일은 없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콘라드와의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에버하르트와 사이먼이 황궁에 도착했고 콘라드는 즉시 그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황제 역시 집무실을 간단하게 정리한 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렇게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자니 타이밍좋게 콘라드가 선제후들을 데려왔다.
“어서들 오시오. 콘라드.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내가 아껴뒀던 와인을 가져오게.”
콘라드가 나가자 배에 살짝 살이 붙은 에버하르트 공작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안 그래도 폐하를 뵌 지가 너무 오래돼서 한번 찾아뵐까 했는데 이리 기회를 만들어주시는군요.”
“하하, 원래는 내가 그대들을 찾아가는 게 맞지만 최근 공사가 다망하다 보니 이렇게 됐소. 혹여 기분이 나쁘더라도 용서해주시오.”
“허허, 덕분에 머리 아픈 집무에서 벗어나 이렇게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데 저희가 폐하께 감사 인사를 올려야지요.”
“하하하, 그렇다면 다음에는 그대들이 나를 초대해주면 좋겠군.”
황제는 와인 2병이 빌 동안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끌었고 선제후들 역시 조급해하지 않고 황제가 본론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대들도 알고 있겠지만 제국은 5개의 부족공국으로 시작되었소. 그리고 그 공국들의 지배자를 선제후라고 불렀지.”
뜬금없이 역사적 사실을 들먹이자 에버하르트와 사이먼 공작은 의문을 표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늘 이야기를 할 때 철저하게 밑밥을 깔아놓기 때문에 그 어떤 이야기도 허투루 들어선 안 된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선제후들은 신성 제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소.”
“그렇지요. 비단 저희뿐만 아니라 폐하께서도 선제후가 아니십니까?”
“맞소. 헌데 작금의 상황을 보시오. 슈바벤, 로트링겐, 프랑켄, 작센, 바이에른! 이 5개의 공국 중 작센과 바이에른이 사자공의 손에 들어가 있소. 그리고 내가 다스리는 슈바벤 또한 영토의 일부가 그의 치하에 들어가 있지.”
이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사실이 황제의 입에서 나오자 그 무게감은 남달랐다. 애초에 선제후를 두 명이나 불러놓고 노골적으로 저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으음… 그래서 사자공을 단죄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소. 그대들도 알다시피 나는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바이에른에 대한 통치권을 사자공에게 넘겨주었소.”
정확히는 사자공이 정당한 계승자이기도 했고 어린 사자공이 서로 영지가 맞닿지 않은 두 개의 공국을 다스리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기에 선심 쓰듯 던져준 것이었다.
그를 대가로 대범함과 대의를 가진 황제라는 이미지를 얻었으며,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이탈리아 원정에 대한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거기에 추후 하인리히가 양 공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해 바이에른의 민심이 들끓을 때 다시 되찾을 생각이었다.
문제는 사자공이 생각보다 정치 수완이 좋았는지 바이에른이나 작센이나 별다른 불만 없이 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는 점이었지만.
“하지만 그는 어떻소? 내가 대의를 위해 폴란드를 공격할 때도 사적인 감정을 앞세워 제대로 전투를 벌이지 않거나 전쟁 도중에 발을 빼는 등 이적행위를 하였소.”
물론 엄밀히 따지고 들면 그게 사자공의 잘못만은 아니었고 서로 간에 정치적인 관계가 얽혀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었지만 그런 건 황제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믿지 못할 아군이 되었고 지금은 황제인 나보다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지.”
황제의 말에 에버하르트와 사이먼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다른 걸 내려놓고 명분만 보자면 지나치게 치졸했다.
전쟁에서 조금 말 안 듣고 통치하는 땅이 많다는 이유로 멀쩡한 제후를 불복종죄로 숙청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던가.
하지만 그런 졸렬한 명분을 통해서라도 사자공을 숙청해야 될 정도로 그의 세력은 커져 있었다. 그걸 알기에 자신들 역시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아니던가.
“확실히 지금의 그는 황제 폐하를 제외하면 누구도 제어할 수가 없겠지요.”
“제어? 대저 세상에 누가 그 날뛰는 사자를 제어할 수 있겠소.”
“으음… 헌데 저희와 황제 폐하의 힘으로 사자공을 짓누르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다른 영주들에게도 이야기를 해볼까 했지만 그랬다간 보안이 샐 수도 있기에 그대들만을 부른 것이오.”
“남부의 칼리나 변경백에게도 도움을 청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녀가 이끄는 용기사단은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 않습니까?”
사이먼 공작의 말에 황제는 욕설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눌러 담았다. 칼리나의 어깨 위에 있는 게 장식이 아니라면 그 소식을 듣자마자 중립을 선언하며 몰래몰래 하인리히를 도울 것이다.
그녀 입장에서 보자면 사자공이 숙청됨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테니까. 어쩌면 그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렇게 머리를 조금만 굴려도 인과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데 눈앞의 공작이라는 놈은 왜 이렇게 정치적 감각이 뒤떨어진단 말인가?
거기에 선제후들만 불러모은 건 이 일을 선제후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로 마무리 짓기 위함이었는데 이건 뭐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줘야 할 판이다.
하지만 이를 입 밖으로 냈다간 숙청은커녕 자신이 사냥당할 판이었기에 황제는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네만 최근 라틴과 베네치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하더군. 변경백은 아마 본인 영지의 방위 때문에 병력을 보내기 힘들 것이오.”
그렇게 황제는 최선을 다해서 그 둘을 설득했고 마침내 자신의 뜻에 따르겠다는 언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정확히는 계속 실패만 하는 자신과 다르게 성공만 하며 그 세력을 키워나가는 사자공에 대한 두려움과 그가 숙청당했을 때 얻게 될 콩고물들에 관심을 가진 것뿐이었지만…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할까.
사자공이 죽는 그 순간 황제의 위치는 확고부동한 절대자의 위치로 자리매김할 것이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영원토록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독차지하게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