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9화
“내가 알기로 품종의 개량은 꽤 긴 시간이 걸리는 거로 알고 있는데 미켈란젤로 자네 실력이 정말 대단하군.”
“감사합니다. 비록 지금은 제대로 된 개량 효과를 내지 못하겠지만 땅이 안정화되면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곡식과 과일을 거둘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성 밖의 과수원과 논밭을 보며 감탄했고 내 곁에서 함께 걷던 미켈란젤로는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얘기했다.
미켈란젤로는 평상시에 조금 음침하며 어두운 성격이었는데 천생이 예술가여서 그런지 자신의 업적이 고평가를 받자 눈에 띄게 기뻐했다.
뭐, 게임에서야 적당히 테크트리 찍으면 연구가 완료됐다고 뜨지만 여기서는 직접 사람을 갈아가며 시간과 노동력, 그리고 돈을 투자해야 했다.
그런데 운이 좋았는지 미켈란젤로는 이전부터 품종개량에 대해 연구 및 고찰을 하고 있었고 덕분에 약간의 지원이 보태지자 반년도 안 돼서 결과물을 내놓았다.
“그대가 보고했던 대로 씨알이 굉장히 굵군.”
나는 내 주먹만 한 감자와 토마토를 이리저리 살피며 얘기했다. 옥수수 역시 일반적인 것들보다 알의 크기가 1.5배는 더 컸고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역사에서야 한참 뒤에 들어올 작물들이지만 여기에선 구황작물이란 이름으로 수확하는 게 가능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게임을 플레이할 때 무조건 평지와 평야를 가진 쪽이 유리했으니까.
삼국지로 비유하자면 하북이랑 중원 먹으면 게임 끝인 거랑 비슷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삼국지는 불타는 밀프헌터가 원가 놈을 잡았을 때 추가 기울어졌다고 생각하니까.
아무튼 지중해 인근에 기후도 온난하고 꽤 넓은 평야를 가지고 있는 내가 왜 구황작물의 품종 개량에 반색을 보이냐면, 내가 북부로 올라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추후 소빙하기가 풀리며 북부도 따뜻해지고 삼포제니 심경이니 하는 것들로 북부의 생산력도 올라가지만 언제 기후가 풀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때문에 북부의 생산력이 바닥을 기고 있는 지금, 이 개량 품종들은 내 비장의 한 수가 되어줄 것이다.
“흠… 근데 맛이 썩 좋지는 않군. 배고프면 그런대로 먹기는 하겠지만….”
내가 삶은 감자와 옥수수를 먹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미켈란젤로 역시 민망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일단은 생산력과 크기의 확대에 초점을 맞춰놓아서 그렇습니다. 추후 맛도 개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건 자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 믿네. 그러고 보니 보리나 밀도 개량 중이던가?”
“그렇습니다. 첫 수확을 하는 즉시 백작 각하에게 바치겠습니다.”
“기대하겠네.”
물론 밀이나 보리 같은 건 구황작물에 비하면 재배시간이 길었기에 개량에 좀 더 시간이 걸릴 테지만 노하우가 생긴다면 금방금방 개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아직 낱알이 여물지는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일반적인 밀보다 뿌리도 깊었으며 전체적인 크기도 더 컸기에 나름대로 기대 중이다.
“아, 그리고 백작 각하. 리슐리외 경에게 이야기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각하께서 명하신 비료 연구는 제가 이어받아서 하기로 했습니다.”
“그대가? 이것만으로도 바쁠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품종 개량과 비료의 상관관계는 무시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굳이 같은 테마의 연구를 나눠서 하는 것보다 차라리 제가 혼자서 하는 게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함께 연구 중입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혹시 내 지원이 필요하다면 눈치 보지 말고 언제든지 이야기하게.”
“감사합니다.”
“절대 백작 각하를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병충해나 추위에도 강한 품종의 개량도 가능하겠나?”
“병충해와 추위 말씀이십니까?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믿고 있겠네.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참으로 커.”
그 말과 함께 나는 내 옆에서 따라오는 시종에게 턱짓했고 그는 조심스럽게 미켈란젤로에게 다가가 가지고 있던 옷을 건넸다.
“백작 각하?”
“내 이번에 뉘른베르크에 가지 않았던가? 그곳을 돌아다니다 옷가게가 보여서 옷을 몇 벌 사던 중 갑자기 자네가 입고 있는 낡은 옷이 떠오르더군. 약소한 선물이지만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내 말에 미켈란젤로는 그답지 않게 눈시울을 붉히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각하. 오늘 하사해주신 이 옷은 제가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하하하, 사람 참. 아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하겠네.”
“물론입니다. 각하께서 제게 보여주신 믿음과 신뢰에 반드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다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 성과도 좋고 다 좋지만 자네의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줬고 결국 그는 고개를 떨군 채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게 미켈란젤로에게 포상을 수여한 나는 느긋하게 다시 시찰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고드프리는 굉장히 미묘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초리로 쳐다보십니까? 고드프리 경.”
“음… 이런 말씀은 불쾌하실지 모르겠지만 나이에 비해 굉장히 노회하시군요.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계십니다.”
“하하, 제가 용병으로 몇 년이나 굴렀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건 몰라도 고용주를 거하게 빨아주는 입담과 눈치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하긴, 백작님의 그 현란한 말솜씨에 저도 넘어갔지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고드프리 경께서 그렇게 얘기해주시니 기분이 좋군요. 그 누가 예루살렘의 왕에게 이런 칭찬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말씀하시는 것만 보면 야만인은커녕 닳고 닳은 노회한 귀족처럼 보이는군요.”
“독수리와 사자, 그리고 용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야만인도 문명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대꾸했고 결국 고드프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처음에도 느꼈지만 보면 볼수록 기묘한 매력을 가지셨군요. 칼리나 변경백 각하가 왜 그렇게 백작님을 아끼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고드프리와 가벼운 이야기를 이어가며 친목을 꾀했고 그와의 대화는 라파엘로가 머무르는 곳에 도착하며 끝이 났다.
라파엘로는 따로 성의 한구석에 현대식 공장처럼 보이는 구조의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자 건물의 크기에 비해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대부분이 낡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피곤해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백작 각하. 오셨습니까?”
“리슐리외? 자네는 왜 여기에 와있나?”
“제가 맡은 업무 중에 라파엘로의 협조를 얻어야 할 부분이 있어서 직접 왔습니다. 라파엘로도 불러서 보고드려도 되겠습니까?”
“자네 편할 대로 하게.”
“알겠습니다. 이봐 자네!”
“저, 저 말씀이십니까 나으리?”
“그래. 자네 말씀이시니까 당장 가서 라파엘로를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지명당한 이는 허겁지겁 안쪽으로 들어갔고 나는 공장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뭔가 교도소 같은 느낌이 강하게 풍겨왔다.
높은 담장이라든가 굉장히 열악해 보이는 생활 환경이라든가 걸레인지 옷인지 모를 것들을 걸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감옥을 연상케 했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드프리가 내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생각하시는 것처럼 저들은 노예들입니다. 태반이 산적질이나 하던 놈들이지요. 그러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노예라… 오토랑 얀 3세가 제법 고생했겠군.”
“예. 진압 과정에서 피해가 나기는 했지만 수많은 도적들을 사로잡아서 포로와 돈, 물자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병사들의 숙련도도 상승했고요.”
하긴, 이론만 빠삭한 병사가 무슨 소용인가. 애초에 레벨업이나 상위 티어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결국은 경험과 숙련도가 쌓여서 정예화되는 과정을 게임상으로 표현한 것뿐이다.
“근데 포로치고는 꽤 많은 수의 인원을 관리하고 있군. 보통은 팔아치우지 않나?”
“본래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산채를 털면서 부가적으로 올린 수입도 많고 제노바의 지원도 있기에 당장 급하진 않더군요. 거기에 이 분업화라는 게 실상은 단순 노동이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가령 ‘뱀’이라는 단어를 칠 때도 기존의 제도는 한 명의 장인이 ‘뱀’이라는 단어를 전부 다 친다면, 공장식은 한 명이 ‘ㅂ’을 치고, 다른 한 명은 ‘ㅐ’만 치고 또 다른 사람은 ‘ㅁ’만 치는 행위였다.
당연히 단순 노동에 반복적인 작업이었고 공장일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심지어 몸은 몸대로 힘들고 기술이 쌓이는 것도 아니며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다.
“추후에는 공정 과정을 좀 더 체계적으로 개편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인력을 갈아 넣어야 하는 상황이라 노예들을 대거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고드프리의 설명을 듣는 사이 눈 밑에 다크써클이 진하게 새겨진 라파엘로가 허겁지겁 내 앞으로 달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 각하. 미리 나가서 영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괜찮네. 자네가 고생하고 있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잘 알고 있으니까. 일단, 진행 상황에 대해 설명이나 해보게.”
“예. 그때 백작 각하께 기존의 도제제도 탈피의 일환으로 분업화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
“시범적으로 노예들을 이용해서 운용해 봤는데 생각보다 효율이 좋습니다. 이게 한 명의 장인이 만든 제품이고 여기 있는 것들은 분업화를 통해 만든 것들입니다.”
라파엘로는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군화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분류하며 얘기했다.
“흠….”
나는 우선 장인이 만들었다는 군화를 들고 여기저기 살펴보았다. 역시 장인이 만들어서 그런지 품질 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곳곳에 새겨진 자수와 문양은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노예들이 뺑이쳐서 만든 군화를 살펴봤는데 투박하고 단순한 모양이었지만 그만큼 튼튼하고 실용적으로 보이는 게 나름 괜찮아 보였다.
“전체적인 품질로만 보자면 당연히 장인이 만든 물품을 따라갈 수 없지만 일전에 말씀드렸듯 기술의 습득속도도 빠르고 품질도 균등하며 무엇보다 생산력이 비교를 불허합니다.”
“다른 곳에서 베껴갈 가능성은?”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영지에는 장인들의 길드가 퍼져있기 때문에 힘들 겁니다. 그들이 조직적으로 뭉치면 영주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잖습니까.”
하긴, 영주가 그런 움직임을 보이려고 하면 길드에서 로비를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반발을 할 텐데 영주 입장에서 굳이 돈줄인 그들과 척질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겠지.
“좋아. 그럼 뭘 주력으로 만들 생각인가?”
“그 부분은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껏 뒤에서 조용히 얘기만 듣고 있던 리슐리외가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 공간에 대장간을 추가적으로 증축해서 병장기와 군수 물자들을 만들 생각입니다.”
“전쟁이라도 할… 아, 살라딘에게 수출할 생각이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에게 들으셨겠지만 품종 개량이 성공하는 대로 식량도 함께 수출할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군. 그대로 진행하게.”
안 그래도 살라흐 앗 딘과 뭘 거래할까 고민이었는데 잘됐다. 질 좋은 병장기와 식량을 수출하면 좋다고 받겠지.
아이유브가 나일강을 끼고 있긴 하지만 전쟁을 준비하는 살라딘에게 전쟁물자는 아무리 비축해도 모자랄 테니까.
그 대가로 여러 과학지식과 향신료, 소금 등을 받아오면 되겠지. 딱이군.
“혹시 추가로 더 당부하실 사안이 있으십니까?”
“질이 좋지 않은 철들을 수입해서 농기구를 만들어 배포하게. 지난번에 나무 삽으로 땅을 파는데 욕이 다 나오더군.”
“예. 미켈란젤로가 좋아하겠군요.”
“그럴 테지. 그리고 고드프리 경. 무역에 관한 부분은 전권을 드릴 테니 리슐리외, 제노바와 협의한 뒤 보고서만 올려주십시오. 그게 통과되면 다시 한번 아이유브에 가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물론 무역이라는 게 단순히 우리 거래합시다! 하면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뭘 수출할지, 뭘 수입할지, 관세는 어떻게 할지, 대금은 무엇으로 지불할 건지, 환율은 어떻게 할지 등등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그건 내가 알 바는 아니다.
애초에 이렇게 동료들을 모집한 것도 내가 할 일을 대신 시키면서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