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8화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나와 다르게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며 내게 인사했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작 각하. 미천한 소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뭐, 그대와의 만남이 꽤 강렬해서 잊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여기는 어쩐 일이지?”
“백작 각하를 만나 뵙기 위해 왔습니다.”
“레비아탄의 상단장을 자처하면서까지 말인가? 내가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은데….”
“물론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곳에서 일주일이나 머무르면서 백작 각하께서 오시기를 기다렸으니까요.”
“흠… 점심은 먹었나?”
“백작 각하께서 대접해주신다면 몇 번이고 또 먹을 수 있습니다. 설사 그러다 배가 터져서 죽더라도요.”
그녀는 상인 특유의 능글능글한 웃음을 지으며 얘기했고 난 코웃음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자기의 목을 걸고 배짱을 부리는데 얘기 정도는 들어줘야겠지.
“배짱은 여전하군. 뭐 좋아. 그대의 인내에 대한 보상으로 잠깐 시간을 내도록 하지.”
그녀는 감사의 의미로 내게 고개를 숙였지만 난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고드프리에게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고드프리 경.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워주실 수 있으십니까?”
“알겠습니다. 이후 시찰은 점심 이후에 하시겠습니까?”
“그러시지요. 볼일이 끝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방문을 나섰고 나는 식사를 준비하라는 말과 함께 다른 시종들 역시 전부 다 방에서 내보냈다. 그렇게 단둘만 남자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분명 우리가 마지막에 헤어질 때는 더 크게 성공해서 날 사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자네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는 않군.”
내가 그녀를 놓아줄 때 나는 그녀 스스로를 입증해보라고, 본인이 탈다스보다 뛰어나다는 걸 증명해보라 했고 그녀는 승낙했다.
하여 자신을 택하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지금의 굴욕을 몇 배로 되돌려 주겠다고 호기롭게 나섰지만… 글쎄, 지금 꼴을 보니 어느 정도 재기는 성공한 듯싶지만 거물이 된 것 같지는 않다.
“그 말씀대로입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저는 다시 상단을 세웠고 조금씩 세를 불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스스로 하기에는 낯뜨겁지만 저처럼 수완 좋은 상인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자네는 자네의 오빠에게 지지 않았나? 이랬거나 저랬거나 레비아탄의 상단장은 여전히 탈다스지.”
“물론 그렇습니다만 그건 라그나르 백작님의 존재 때문이었지 결코 제가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자연재해를 이기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남 얼굴에 금칠하는 재주 하나는 대단하군. 계속해 보게.”
“예. 그렇게 세를 불리면서 백작 각하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각하께서는 저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지셨더군요.”
“과장이 심하군. 이 정도는 누구나 하는 거 아닌가?”
“용병으로 참전해 정의공의 아들을 붙잡고, 검은 용군단을 조직했으며, 하이르 앗 딘을 참수하는 게 말입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고 그녀는 조바심이 나는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른다면 도저히 백작 각하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아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뭐, 내가 조금 대단하긴 하지. 자아, 그래서 신변잡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날 찾아온 목적을 얘기하라는 무언의 압박에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무릎을 꿇었다.
“백작 각하.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비록 그때의 약조와는 다르게 제가 많이 초라하지만, 백작 각하를 섬길 준비는 되어있습니다.”
“내가 그대를 거둬서 얻게 될 이익이 뭐가 있지?”
“절 편하실 대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가령, 밀무역을 한다든가 아니면 미리 북부에서 자리를 잡아 백작 각하의 충실한 정보원이 될 수도 있지요.”
굳이 북부를 언급하는 걸 보면 내가 제국 북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하긴, 그간 내 행보를 보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긴 하지.
“흠…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지. 하지만 나는 사람 굴리는 게 제법 험한데 괜찮겠나?”
내 말에 그녀는 자신 있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굴리셔도 됩니다. 그게 곧 제가 유능하다는 반증이 될 테니까요.”
“좋아. 이 얘기는 추후에 더 하도록 하지. 일단은 식사라도 하지. 그동안 자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좀 들어야겠으니.”
* * *
요한나와의 식사 자리는 나름 유익했다. 나와의 관계가 어떻건 밑바닥에서 다시 한번 상단을 일궈낸 걸 보면 그녀는 상당히 유능한 인재였다.
거기에 안 그래도 북부에 하랄 블로탄을 지원할 사람을 보내는 한편 한자 동맹과 같은 연합을 만들기 위해서 밑 작업을 해둘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거기에 딱 맞는 인재였다.
이쪽에서 데리고 좀 키워주다가 북부로 보내면 되겠지.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힐데는 눈살을 찌푸리며 반대했다.
“그런 건 탈다스 상단장에게 맡기면 되는 것 아닙니까?”
“탈다스는 이곳에 기반을 잡고 있잖아. 그리고 유사시를 대비해서 돈줄을 관리할 사람은 있어야지.”
“제노바도 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북쪽에 자리를 잡을 거면 제노바 같은 해양 도시가 자리 잡는 게 더 편리하지 않겠습니까?”
“제노바는 지중해 쪽 무역을 관장해야지. 그리고 아직 베네치아도 건재한데 다른 데 시선을 돌릴 여유가 어디 있어. 무엇보다 제노바에서 북해로 가면 그쪽에서 반발이 심할걸?”
“…….”
“거기에 제노바는 동맹이지 내 수하가 아니잖아. 지금부터 내 입맛대로 키우면 편리할 거야.”
“틀린 말은 아닌데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까 의도가 불순하게 느껴지는군요.”
“흐흐, 질투하는 거야?”
“질투? 어이가 없군요. 아시겠습니까 라그나르? 지금의 당신은 야만인 용병대장이 아니라 한 도시의 영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힐데의 잔소리가 길어질 것 같기에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이비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힐데와 이비를 데리고 나온 이유는 간단했는데 둘에게도 시킬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힐데.”
“…그러니까 당신은… 예?”
“정화 교단에 가서 최대한 교회랑 마찰 일으키지 말라고 해줘. 또한, 문제가 있을 시 내 중재안을 받아들일 것을 확답받아주고.”
“알겠습니다. 또 추가로 말씀하실 사항 있습니까?”
“아니, 일단 이 정도만 지켜주면 별다른 터치는 없을 거라고 전해. 세금은… 따로 안 물리도록 하지. 대신 행정 관련해서 어느 정도 협조를 해줘야 할 거야.”
“백작 각하의 관대함에 정화 교단을 대신해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공과 사를 구분하는 건지 내게 성호를 그으며 감사를 표했고 나 역시 예를 갖추었다. 뭐, 이정도 얘기했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녀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렇게 힐데를 보낸 뒤 나는 이비를 데리고 레오나르도를 찾았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연구 중이었는데 내가 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나를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 각하.”
“그래. 그간 별일 없었나? 아, 앉아서 얘기하게. 어차피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내 말에 레오나르도는 다시 소파에 앉았고 나는 이비를 옆에 앉히며 품속에서 서류를 꺼냈다.
“어제 올라온 보고서들을 읽는데 자네의 제안이 꽤 재밌어 보이더군.”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내가 니스를 떠나기 전에 그에게 맡긴 건 상하수도의 계획안을 짜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같은 천재에겐 그 정도 일은 식은 죽 먹기였는지 몇 가지 제안을 추가로 올렸다.
그중 당장 시행할 수 있는 제안 몇 가지만 꼽아보자면 물자의 집적화 및 단위와 도량형의 통일, 그리고 서류 및 보고서 양식의 통일 등이 있었다.
이게 뭐가 대단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런 건 다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것이다. 먼저 물자의 집적화는 불필요한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기존의 제도가 중앙에서 모든 물자를 다 모았다가 필요시에 뿌리는 형태라면 집적화는 필요한 개소에 물자를 쌓아두겠다는 의미다.
이에 대한 장점을 예로 들자면 우선 물자 운반에 필요한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고 운반과정에서 생기는 손실 등을 방지할 수 있다.
또한, 전쟁 시에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물자를 보급받음으로써 기동성을 높이는 것도 가능하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병사들에게 쌀을 짊어지고 가게 한 것도 다 집적화가 안 돼서 그런 것이다.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닌데 물자를 쌓아둔 곳이 적의 손에 넘어가면 답도 없어진다.
그 때문에 운반과정에서 손해를 보는걸 알면서도 주도로 모아두는 거였는데 이곳은 공격받을 염려가 없었기에 레오나르도가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단위나 도량형 통일은… 미국 놈들이 쓰는 인치나 갤런, 화씨, 마일, 야드 같은 것들만 봐도 답이 나올 것이다.
이 부분은 추후 니스를 넘어서 검은 용군단 연합 전체가 도량형을 통일하면 무역이 한층 편리해질 것이다. 이 부분은 칼리나에게 건의해봐야겠군.
마지막으로 보고서와 서류의 양식 통일도 비슷한 맥락인데 일단 양식이 통일되면 자료를 파악하기가 한층 수월해진다.
지금 니스도 내가 다스린 지 얼마 안 돼서 보고 양식이 중구난방인데 하나로 통일한다면 업무처리에 드는 시간과 피로도도 줄어들 것이다.
“일단 본제부터 얘기하자면 자네의 설계를 채택할 테니 성 내부에 한해서 상하수도 시스템을 구축해보게. 외부에서 물을 끌어오는 건 무리라도 내부 정도는 할 여력이 생기지 않았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인력이 모자라서….”
“돈은 지원해줄 테니 필요한 부분은 청구하게. 그리고 이비 너는 레오나르도에게 붙어서 물이 도중에 고이거나 오염되지 않게 조치하도록. 적어도 상수도에 관해서는 위생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돼. 무슨 말인지 알지?”
“알겠습니다. 주군.”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식사라도 하면서 느긋하게 얘기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대가 추가로 올린 안건은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네.”
“영주님의 부름을 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나 역시도 그대와의 식사가 기대되는군. 몇 번을 봐도 굉장히 획기적인 생각이야. 역시 그대를 데려온 보람이 있어.”
“영광입니다. 백작 각하.”
“그것과는 별개로 그대의 성과에 대한 포상을 준비해두겠네. 나중에 필리프에게 찾아가 보게.”
수하들의 충성은 말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잘하면 상을 주고, 못하면 벌을 주고. 이 간단한 법칙이 지켜지지 않아 무너지는 도시와 왕국, 제국을 보았다.
그 때문에 적당히 레오나르도의 공을 치하하며 당근을 내린 나는 곧장 고드프리의 집무실로 향했다. 여전히 니스는 작은 도시였고 영지의 발전을 위해서 아직 발로 뛰어야 할 시기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