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7화
회담이 마무리된 뒤 영주들은 하루 정도 성에 머무르며 친목을 다진 뒤 각자의 영지로 흩어졌다.
나 역시 나를 따라서 니스로 오겠다는 칼리나를 간신히 어르고 달래서 떼어낸 뒤 서둘러 니스로 향했다.
다만, 그대로 니스로 직행한 게 아니라 노바라에 들러서 펠릭스와 탈다스를 만났다. 내가 그 둘은 만난 건 오랜만에 얼굴을 보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그 둘을 내 대리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나는 니스의 이권이나 통치에 관한 건 펠릭스에게 맡기고, 무역이나 상단과 같은 돈에 관한 건 탈다스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의 내게는 그 둘보다 더 뛰어난 이들이 있었지만 날 따르는 이들 대부분은 추후 내가 북상할 때 데리고 가야 할 이들이다.
애초에 니스는 지나가는 거점이자 성공을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 첫차를 살 때 중고차를 사는 것처럼 니스는 내게 내키는 대로 몰 수 있는 중고차이자 실험대와 같은 도시였다.
그렇다고 내 지지기반이 될 도시를 버릴 생각은 없다. 영주들이 십자군에 참전한다고 자기 가문 버리는 짓은 안 하잖은가.
물론 종교와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가산 다 처분하는 미친놈들도 있긴 했지만….
아무튼, 요점만 얘기하자면 난 추후 니스를 떠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날 대신해 도시를 관리해 줄 대리인으로 펠릭스와 탈다스를 낙점한 것이다.
배신의 염려도 있긴 하지만… 근방에 칼리나도 있고 내가 펠릭스의 약점도 알고 있으니 이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어도 될 것이다. 도시 경영을 못해도 내 통수만 안 치면 상관없다.
다만 아직 먼 이야기이기에 적당히 밑밥만 깔아둔 정도였다. 당장 이곳을 떠난다는 얘기를 해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테니까.
그렇게 노바라에서 떡밥을 뿌린 나는 열심히 니스를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도적들을 대대적으로 소탕했고 우리를 호위하는 병력들도 기병들이기에 행군에는 거침이 없었다.
“후우. 피곤하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노상에서 노숙을 하는 일이 잦았기에 나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피로감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주군. 이따가 마사지라도 해드릴까요?”
“오. 부탁 좀 할게.”
그때 한 번 마사지를 해준 뒤로 이비는 이 신문물에 꽤 흥미를 가진 모양이다. 물론 단순 마사지야 로마 시대부터 있던 거지만 나는 그녀에게 카이로프랙틱을 가르쳐주었다.
원래 이런 치료법이 자칫 잘못하면 사람 골로 가게 만들기 십상이지만 게임이 기반인 이상 훌륭한 치료법일 뿐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종종 내게 와서 마사지를 배웠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꽤나 훌륭한 마사지사가 되었다.
“그 온몸이 뚜둑거리는 행위가 뭐가 시원하다고 하는지 모르겠군요.”
“너는 아직 젊어서 그래. 너도 나처럼 나이 들어봐. 온몸의 뼈가 쑤시지.”
“당신이랑 저랑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난다고 그러십니까.”
글쎄… 17~8살 정도면 꽤 많이 나는 것 아닌가? 그녀의 나이를 고려해보면 거진 내가 2배 정도 더 나이를 먹은 셈이니까.
“글쎄… 널 키우느라 뼈가 삭았거든.”
“…그래도 저 정도면 말을 잘 들은 것 아닙니까?”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내게 버림받을까 두려워해서 어지간하면 울지도 않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뭐… 가끔 그 나이대에 걸맞게 펑펑 울기도 했는데 그건 내가 잘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내가 잘못한 건 아닌데 내 잘못이라는 것도 우습군.
아무튼, 그 때문에 힐데의 성격이 저렇게 배배 꼬인 게 아닐까? 그걸 감안해보면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예전에 말을 잘 들어서 지금은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물론 그녀는 늘 그렇듯 내 손을 쳐내면서 헛소리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그렇게 그녀와 투닥거리면서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니스에 도착했다. 미리 보낸 전령이 일찌감치 도착했는지 성문 앞 10km 앞까지 가신들이 나와 있었고 나는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회포를 풀었다.
다만 아직 피곤이 남아있었기에 그간의 밀린 보고나 업무처리는 나중에 받기로 했다. 첫날부터 일을 할 정도로 일 중독도 아니었고 어차피 내가 없어도 어련히 잘 처리하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하루를 푹 쉬고 난 뒤 나는 고드프리를 만나 대략적인 일의 진행도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다. 당연히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개혁은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뭐, 애초에 이럴 걸 대비해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을 끌어들였기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다. 고드프리처럼 고지식한 사람이 내게 잘 보이려고 거짓된 보고를 하지도 않을 테고.
다만 서류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고 하급자 입장에서 상관에게 애로사항에 대해 얘기하기는 힘들 테니 나는 성 내를 시찰하면서 내 눈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바쁘시겠지만 시찰에 동행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고드프리에게 보좌를 부탁한 건 그가 날 대신해서 모든 임무를 총괄하고 있기도 했지만 그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이다.
인재들을 불러모은 지 얼마 안 됐고 고드프리 역시 적응하기에 바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나는 귀환해서 처음으로 하는 시찰에 그를 보좌시켰고 이는 내가 여전히 그를 신뢰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어젯밤에 시중을 드는 이들까지 물린 뒤 그와 독대를 감행했다. 실제로는 가볍게 술을 마시면서 신변잡기나 나눈 정도였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밖에서는 알지 못할 것이고 혹여나 다른 이들은 고드프리가 자신의 험담을 한 것은 아닌지, 혹여 자신이 그에게 밉보인 건 없는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는 실제로 조선 시대의 왕들도 사관을 쫓아내고 독대를 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권신을 키우기도 했었다. 물론 자주 쓰면 알력 다툼이 나기 십상이지만 가끔은 써볼 만한 꼼수다.
“오, 물론이지요. 미흡한 부분은 제가 추가적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그와 함께 성안을 거닐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이조차 깊게는 안 들어가고 일을 어떤 식으로 진행했고 어떤 결과가 나왔다는 수준이었다.
“일단 말씀하신 대로 아이유브에 다녀왔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고드프리에게 살라딘에게 한번 다녀오라고 했었지. 살라딘은 훗날 누 르 앗 딘이 다스리는 장기 왕조를 밀어내고 중동을 차지할 테니 일찌감치 좋은 관계를 맺어야 했다.
겸사겸사 레반트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베네치아 놈들한테 엿도 좀 먹이고.
“오, 고드프리 경의 얼굴을 보아하니 나름 괜찮은 답변을 들은 모양이군요.”
“일단은 서두르지 않고 친분을 맺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서로 간에 불신의 골이 깊으니 천천히 진행해야겠지요.”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추후 백작님께서 돌아오신다면 다시 한번 방문하기로 약속을 잡았는데 그때 서로 간에 합의해서 얘기할 것들을 몇 가지 추려놓았습니다.”
그는 능숙하게 품속에서 서류를 꺼내 내게 건넸고 나는 찬찬히 안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이제는 글이 익숙해졌기에 꽤 빠른 속도로 내용을 이해하는 게 가능했다.
“학문 교류와 팔려간 노예가 있으면 돌려보내 주는 것, 문제가 생기면 최대한 외교로 풀 것… 뭐 이정도야 입 발린 소리고 진짜로 중요한 건 무역에 관한 내용이군요.”
“그렇습니다. 본래는 이 부분을 좀 더 진행해보려 했지만 제노바와 리슐리외의 협조도 얻어야 했기에 제 선에서 해결한 문제는 아니라 생각, 보류해두고 있었습니다.”
“무역… 아무래도 저희의 이름을 걸고 하는 건 무리겠지요.”
“조금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백작님께서 이교…그러니까 다른 종교를 믿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칼리나 각하의 총애 때문에 별다른 말이 나오진 않지만 추후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따지고 보면 이교도 영주가 또 다른 이교도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무역을 한다?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는 뻔한 일이었다.
이걸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이슬람에서 귀화한 사람이 북한과 친하게 지내는 걸 보는 느낌일 것이다. 그 의도가 어쨌든 간에 당연히 안 좋은 시선이 박힐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제노바와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들과 합의가 도출되면 다시 한번 아이유브로 가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정화교단은 어떻게 됐습니까? 오다가 슬쩍 보니까 사원이랑 교회가 동시에 지어지고 있던데.”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니스를 기준으로 동부는 정화교단이, 서부는 카톨릭에서 예배당을 짓고 있습니다.”
고드프리의 말에 나는 잠시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고 고드프리는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보고를 이어나갔다.
“교회는 이쪽에서 기부금 형식으로 돈을 일부 대주고 있고 정화교단은 본인들 돈으로 다 처리하는 중입니다.”
“뭐, 교회 놈들 뻔뻔한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아, 이런 죄송합니다.”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나는 서둘러 사과했고 고드프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린 말도 아니지요. 아마 영주님께서 최근 교회에 느끼시는 감정 대부분을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겁니다.”
교회의 타락이야 흔하디흔한 일이다. 애초에 종교가 정치와 엮이는 순간 그 종교가 내거는 모든 가치는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
“일단 쌍방 간에 충돌은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군요.”
뭐, 원래도 정화교단과 카톨릭은 서로 소 닭 보듯 하는 관계다. 악인을 불로 정화하고 선을 행하라는 정화교단의 가르침이 딱히 카톨릭에게 심히 거슬리는 내용도 아니었고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정화교단과 싸워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예. 힐데가르트 사제님께서 교단에서 꽤 높은 지위를 가지고 계셨는지 교회 측도 쓸데없는 트집은 안 잡더군요.”
성녀 후보였으니 높기야 엄청 높지. 원래라면 성녀가 됐어야 할 인물이고.
어쨌든 내 입장에선 좋은 일이다. 원래 교회의 사제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오면 플레이어한테 개종하라느니 기부를 하라느니 개지랄을 하는데 정화 교단이 있으면 알아서 견제가 될 테니까.
그렇게 점심이 될 때까지 성을 거닐고 있다가 문득 고드프리가 깜빡 잊었다는 듯 난감한 얼굴로 얘기했다.
“아, 그러고 보니 백작 각하. 얼마 전에 백작 각하를 뵙기 위해 찾아온 이가 있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누가요?”
제노바의 도제인가? 아니면 용군단의 일원? 그도 아니면 사자공이나 황제가 보낸 밀사? 잘하면 궁정백인 콘라드가 와있을 수도 있겠군.
머릿속에 여러 인물이 떠올랐지만 고드프리의 입에서 나온 건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본인을 레비아탄의 상단장이라고 소개하더군요.”
“레비아탄? 레비아탄 상단장은 여기에 오기 바로 며칠 전에 보고 왔는데 혹시 잘못 들으신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본인을 레비아탄의 상단장이라고 얘기하더군요. 제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레비아탄의 상단장이 백작 각하와 인연이 있다기에 일단은 귀빈실로 안내했습니다.”
“귀빈이 아니라 미친놈 같은데….”
“아마 미쳤다면 놈은 아니고 년일 겁니다.”
고드프리의 말에 나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호위 병력들을 대동한 채 귀빈실로 향했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예상했던 인물을 만났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요한나 레비아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