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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96화 (96/205)

▣ 096화

종종 힐데와의 과거를 봐서 그런지 나는 이 기묘하면서도 익숙한 기분을 느끼며 제3자가 되어 젊은 시절의 라그나르와 어린 소녀였던 칼리나를 바라보았다.

둘의 많고 많은 추억 속에서도 내가 본 것은 이별의 현장이었는데 라그나르는 말 위에 타고 있었고 그런 그의 밑에서 어린 칼리나는 원망스러운 얼굴로 라그나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칼리나는 그녀는 지금에 비하면 훨씬 더 어린 모습이었지만 얼굴 여기저기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었기에 정체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화의 물꼬를 튼 건 칼리나였는데 그녀는 차분함을 가장하려 했지만, 울음기가 섞여 있는 어조로 라그나르에게 물었다.

“정말 가는 거야? 진짜? 이대로 가버린다고?”

“나와 네가 맺은 계약이 끝났으니 별수 없지.”

“새로운…새로운 계약을 할게! 그러면 되는 거잖아!”

그녀의 목소리에서 어떻게든 라그나르를 붙잡겠다는 의지가 느껴졌지만 라그나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글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넌 원수를 죽였고 잃어버렸던 땅을 되찾았으며 복수는 끝났어. 더 이상 내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

“당신이 내게 얘기했잖아! 내 빈자리를 채워주겠다고! 근데 왜 떠나겠다는 건데!?”

칼리나의 말에 라그나르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그렇게 얘기하긴 했는데 그게 남편 자리는 조금 아니지.”

“나랑 결혼하면 뭐든지 다 가질 수 있잖아! 당신 같은 야만인이 어디 가서 나처럼 예쁘고 헌신적인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본인을 예쁘다고 하는 건 엄청난 자신감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칼리나는 스스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하하하,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치만 너도 알고 있듯 난 네게 걸림돌이 될 뿐이야.”

“내가 아니라고 하잖아! 왜 내 말을 안 들어주는 거야!”

“글쎄, 지금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거야.”

“난 몰라! 그런 거 모른다고! 이 거짓말쟁이!”

어느새 악을 쓰는 칼리나의 눈가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있었다. 라그나르는 그런 칼리나를 부드러운 눈길로 쳐다보더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음에 또 인연이 되면 보게 될 거야.”

“알겠어. 그럼… 그럼 가기 전에 한 번 안아줘.”

차마 거기까지는 거절할 수 없었는지 라그나르는 말에서 내려 가볍게 그녀를 안아주었다. 아니, 정확히는 안으려고 했지만 칼리나는 라그나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를 끌어안고 기습적으로 키스했다.

엉겁결에 한 방 먹은 라그나르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하하, 꼬맹이 주제에 조숙하기는.”

“꼬맹이가 아니야! 그리고 기억해. 이건 당신이 내 것이라는 마킹이야.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야! 그래서 나 같은 여자를 차버린 걸 후회하게 해줄 거라고!”

악을 쓰듯 소리치는 칼리나를 보며 라그나르는 정중하게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웃으며 말 위에 올랐다.

“기대하고 있을게. 마이 레이디.”

그리고 그 장면을 끝으로 나는 과거에서 다시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때와는 괴리감이 생기는 칼리나의 모습에 내가 잠시 멍을 때리고 있자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갑자기 멍때리고 그래? 혹시 나와의 입맞춤이 너무 환상적이었어?”

“아니, 갑자기 우리가 헤어질 때가 떠올라서. 그때도 이랬던 것 같았는데 말이야.”

“푸하핫, 확실히 그때도 그렇긴 했지. 그나저나 어때?”

“뭐가?”

“그때 해뒀던 마킹의 효력 말이야.”

그녀는 입술을 매만지며 요염한 표정으로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난 걸 보면 성능 하나는 확실한 것 같네.”

“그렇지?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식으로 날 떠나지 마. 뭐, 이제는 당신이 어디로 도망친다고 해도 당신을 찾아낼 테지만.”

다른 건 몰라도 저 말은 농담처럼 안 들리네. 장담하건대 내가 그녀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무섭군.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웃으며 얘기했다.

“진심이야.”

“보통 그럴 때는 농담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당신과 관련해서는 언제나 진지하거든. 궁금하면 한번 시험해봐도 좋아.”

글쎄, 이번에도 내가 그녀를 떠난다면 그때야말로 지하실 엔딩이 아닐까? 솔직히 칼리나의 살 떨리는 기벽들과 집착을 생각해볼 때 꽤 참아주고 있는 건데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잖은가.

“사양할게.”

“그것 참 아쉽네. 뭐 좋아. 사적인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공적인 얘기를 해볼까? 당신이 이렇게 허겁지겁 내려온 건 황제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거나 낌새를 눈치챘기 때문이겠지?”

“눈치가 백 단인데?”

“말했잖아. 당신에 대한 건 전부 꿰뚫고 있다고.”

“뭐 짐작했던 대로야. 황제는 사자공을 숙청하려 하고 있어.”

“숙청이라… 그냥 겁박하는 정도가 아니라?”

“겨우 그 정도에서 그치진 않을 거야. 아마 해외로 쫓아내거나 그가 가진 기반을 전부 초토화시키겠지. 아마 바이에른은 본인이 가지고 작센은 갈기갈기 찢어서 귀족들에게 나눠주지 않을까?”

원역사에서도 그랬고 지금의 상황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확신이 깃든 내 말에 칼리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서 내가 수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얘기함은 물론이요 수집한 정보들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당신 말대로 숙청의 가능성도 충분해 보이네.”

“충분한 게 아니라 황권 강화에 미친 그 황제는 일을 저지를 거야.”

“흠,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유가 있겠지.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숙청을 막아야지. 사자공이 몰락하면 다음 차례는 누구라고 생각해?”

칼리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검지로 자신을 찍으며 ‘나?’라고 얘기했고 나는 심각한 상황과 걸맞지 않은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절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어?”

“검은 용군단의 일원들을 모아줘. 그들을 설득하려면 네 힘이 필요해.”

* * *

그럴듯한 가설과 나의 부탁. 이 두 가지가 시너지를 일으켜 칼리나는 하이르 앗 딘 토벌전 이후로 다시 검은 용군단을 불러 모았다.

물론 이전처럼 대놓고 밀라노로 모이진 않았다. 그때야 우리가 뭔 짓을 하건 황제의 칙명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남부에 거대한 세력들이 회합을 한다? 황제가 사자공을 조지기 전에 우리부터 조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법의 모든 보호를 박탈하는 아웃로(outlaw)라는 형벌은 병신같지만, 효과적이었고 칼리나도 그 처벌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교황의 파문이 상징적인 의미라면 황제의 처벌은 실질적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우리는 각 일원들에게 전령을 보낸 뒤 은밀하게 살루조로 집결했다. 살루조는 각 영주들이 머무는 도시의 중간 정도에 위치했기에 짧은 시간에 모여서 흩어지기에는 최적의 도시였다.

물론 황제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나와 칼리나의 대역은 제노바로 향했으며 각 영주들도 자신들의 대역을 적당한 곳에 보내서 최대한 첩자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우리는 조심스럽게 살루조로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마침내 나와 칼리나를 포함한 8명의 영주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본래라면 이를 기념해서 성대하게 연회를 열 테지만 지금은 떨어지는 나뭇잎도 조심해야 할 시기였기에 나와 칼리나는 성의 지하실에서 영주들을 맞이하며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우리는 서로 간의 안부를 물어보고 정치적, 사업적인 이야기도 나누며 친목을 다졌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나는 본론에 들어가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호출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여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검은 용군단의 일원으로서 칼리나 각하께서 부르시면 모이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칼리나의 말에 대꾸한 건 같은 여백작인 베아트리체였는데 그는 하이르 앗 딘을 참수함으로써 남편의 원수를 갚았기 때문인지 맹목적으로 칼리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변경백 각하께서 허투루 저희를 소집하실 분은 아니니 분명 큰 건수가 있겠지요.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무역으로 톡톡히 흑자를 올리고 있는 프로방스의 백작 라몬 베렌게르가 환히 웃으며 물었지만 나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얘기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닙니다. 제가 얼마 전 황제 폐하의 명으로 북부에 갔던 걸 알고 계십니까?”

“아, 들었소. 폐하께서 일방적으로 그대를 폴란드에 인질로 보냈다지?”

“뭐, 내가 듣기로는 인질보다는 거래 수단으로 썼다고 하던데….”

사보이의 백작 험버트 3세와 살루조의 후작 만프레드 2세가 각자 들은 바를 이야기했다. 이 둘은 그동안 치고받고 싸운 사이인데 내가 필사적으로 케어한 보람이 있었는지 지금은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뉘른베르크에서 제가 들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그것 때문에 여러분들을 소집한 것입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그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렸다.

“황제 폐하께선 사자공 전하를 숙청하려 하십니다.”

그 순간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방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 누구도 대꾸를 하지 못했으며 서로 눈알만 뒤룩뒤룩 굴리며 눈치만 볼 뿐이었다.

“충격적인 얘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는 제가 수도에서 면밀하게 정보를 얻은 결과 도출해 낸 결론입니다. 여기 문건들을 한번 확인해주십시오.”

나는 미리 준비해온 증거물들을 각 영주들에게 나눠주었고 안의 내용을 확인한 영주들은 충격을 받았는지 침묵했다.

그러던 와중에 테살로니카 왕국의 왕인 보니파시오의 아들을 내쫓고 몽페라토의 후작위에 오른 윌리엄 5세가 우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꽤 큰일이구려. 사자공의 숙청은 우리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여파가 올 것이오. 황제가 황권 강화에 미쳐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열에 아홉은 안 좋은 영향을 끼치겠지요. 제 생각이지만 그다음은 이쪽 남부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여력이 있겠습니까? 사자공을 숙청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아웃로(outlaw)의 형벌을 내린다고 해도 말입니까?”

내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파문이야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대부분은 정치적인 쇼였지만 아웃로는 그야말로 너 죽고 나 죽자는, 자칫 잘못하면 내전으로 번질 수 있는 형벌이었기 때문이다.

“허면 칼리나 각하께서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무슨 대책이 있으니 저희를 소집하신 게 아닙니까?”

어색한 침묵 속에서 입을 연 건 니스에 자리 잡은 제노바 도제의 아들이자 내가 구출해온 벨렌테였다. 그는 내 밑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제노바를 대신해 왔기에 칼리나 역시 그에게 존대를 해주었다.

“물론입니다. 자세한 건 라그나르 백작이 설명해줄 겁니다.”

칼리나의 대답에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칼리나 변경백 각하께선 사자공 전하나 황제 폐하와 함께 제국을 지지하는 수호신이라 불리고 있지만, 그 세력이 견고하지 않기에 황제 폐하나 사자공 전하가 무너지면 지금의 균형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사자공 전하의 숙청은 최종적으로 제국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만일 사자공 전하께서 반발하신다면 최악의 내전이 벌어질 것이고 이는 제국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현재의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겠소? 폐하께서 칼을 뽑은 이상 뭐라도 자르려고 할 텐데?”

“요점은 힘의 균형추를 맞추는 겁니다. 폐하께서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질 게 뻔한 도박을 하실 리는 없잖습니까?”

내 말에 프로방스의 백작은 미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라그나르 백작. 사자공과의 동맹은 합리적이긴 하지만 이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사안이오.”

“동맹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인 협력이지요.”

“그 협력은 당연히 군사적인 도움이겠구려.”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단순히 말로만 끝내실 분도 아니잖습니까.”

“그러느니 차라리 일찌감치 중립을 선언하는 게 좋지 않겠소?”

“중립은 힘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싸움이라는 게 내가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좋소. 라그나르 백작. 그대의 말대로 병력을 끌고 가서 사자공을 구한다고 치지요. 허면 황제의 분노가 우리를 향할 텐데 그걸 잠재울 방도가 있습니까?”

“그건 제가 황제 폐하와 만나서 직접 담판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이를 위해 제가 북부에 다녀온 겁니다. 북부에 어떤 국가들이 있는지는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이쯤 되면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세 살짜리 어린애라도 내가 어디를 끌어들이려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이들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나는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그들을 설득했다. 사실 저들의 부정적인 시선과 거부감은 당연한 것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사자공이 숙청당할 거라는 얘기도 모자라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청받는다면 그 누가 반발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자칫 잘못하면 반란에 연루될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처음 얘기했던 것과 다르게 어느 정도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일단 언제든지 병력을 출정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되 먼저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황제가 어떤 액션을 보이면 그때 곧바로 행동을 개시하는 게 협의 내용의 주요 골자였다.

내 입장에선 답답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의견 조율이라는 건 어느 정도는 상대의 의견도 받아들여 절충해야 함을 의미했기에 나는 여기에 만족하기로 했다.

뭐, 굳이 긴 시간을 기다릴 것도 없이 저들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서 준비를 끝마칠 때쯤에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그때까지는 나도 얌전히 니스에 틀어박혀서 예전에 했던 개혁을 마저 처리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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