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4화
뉘른베르크에서 밀라노로 길을 잡은 나는 지금까지 느긋하게 움직이던 것과는 다르게 최대한 빨리 남쪽으로 남하했다.
황제가 호위병을 빙자한 감시병을 붙였지만 나는 칼리나가 맡긴 일이 있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한 뒤 예비마를 수십 마리나 끌고 미친 듯이 남하했다.
밀프헌터 조가 놈에게서 도망치던 귀 큰 놈의 심정이 이랬을까? 따지고 보면 유비가 더 절박했겠지만 나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라그나르. 당신이 이렇게 서두르는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은 휴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미친놈처럼 달리고 있자니 들려오는 힐데의 충고에 나는 말의 채찍질을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말을 타는 것인지 말에 실려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퍼져서 탈진해가는 이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흐에엑… 헤엑…… 헤에에엑….”
“이런… 그러고 보니 이비는 기마술이 1밖에 안 되지.”
일반적으로 낮은 난이도에서는 기본적으로 기마술 3 정도를 찍어주고, 그게 불가능한 난이도에서는 기마술을 올려오는 템들을 주고 시작했기에 나도 모르게 페이스를 오버해 버린 모양이었다.
“예?”
“그냥 하는 말이야. 잠깐 이비 좀 돌보고 올 테니까 말들 좀 돌보고 있어.”
말들도 기계가 아닌 만큼 질주를 하고 나면 당연히 휴식이 필요하다. 물도 마셔야 하고 숨도 골라야 하며 다친 부분이 있다면 치료를 받아야 한다.
힐데는 꽤 오랜 시간을 용병으로서 떠돌았고 기마술도 높았기에 이 정도는 무리 없이 해낼 것이다. 거기에 주변이 훤히 트인 가도인 데다가 순찰병력들도 꽤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산적들을 만날 일도 없었고.
“이비. 물 좀 마셔.”
“흐에엑… 헤엑… 가, 감사합니… 구에에엑.”
그녀는 내가 건넨 물을 급하게 들이켰고 그대로 내 옷에 전부 다 게워냈다. 왜 왕건 부인이 물을 줄 때 버들잎을 띄워줬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뭐, 몇몇 변태 같은 놈들은 이걸 보고 ‘와. 성수!’라면서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내게 그런 변태적인 취미는 없었기에 얌전히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아무도 안 따라오니까 천천히 마셔.”
나는 부드럽게 이비의 등을 두들겨주었고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조금씩 물을 들이켰다. 다행히 이번에는 예의 ‘성수’를 뿜어내는 일 없이 얌전히 물을 마실 수 있었다.
애초에 이런 건 나보다 의사인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것조차 잊어버린 걸 보면 꽤 힘들었나 보다. 하긴, 기마술이 낮다는 건 경차로 스포츠카를 따라가는 느낌이니까 지칠 수밖에 없지.
“일단 누워서 좀 쉬고 있어.”
나는 괜찮다는 이비를 강제로 내 무릎에 눕힌 뒤 그녀의 가면을 벗기고 얇은 나무 판때기로 바람을 부쳐주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쉬자 그녀의 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켰다.
“몸 상태는 어때?”
“주군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진짜야? 괜히 무리하는 거 아니지?”
“예. 정말 괜찮습니다.”
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여전히 몸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의 짐을 다른 예비마들에게 배분해 실었다. 이러다가 진짜로 탈진해서 쓰러지면 답도 없으니까.
“그냥 나랑 같이 타고 가자. 조금 속도가 떨어져도 그게 더 나을 거야.”
“그것보단 그냥 마차를 끌고 가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어느새 말들을 나무에 묶어두고 물까지 주며 점검을 마친 힐데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내게 다가왔다. 역시 기마술 레벨이 높아서 그런지 꽤 빠르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마차는 너무 느려서 안 돼.”
“그렇게 빨리 가야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혹시 재수가 없어서 황제가 날 구금하면 좆되거든.”
“예?”
“너도 내가 모아 달라는 정보를 취합해서 대강 알겠지만 황제는 사자공을 숙청할 생각이야.”
“그런 낌새가 보이기는 했습니다만, 숙청하기 위해서라기보단 압박하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닙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자공을 숙청한다는 게….”
“아니. 황제는 칼을 휘두를 거야. 사자공을 조지고 나면 그 칼이 어디로 향할 거 같아?”
황권의 강화를 원하는 바르바로사에게 사자공과 칼리나는 눈엣가시 그 자체다.
지금까지는 사자공이 바르바로사의 어그로를 다 끌고 있었지만, 그가 몰락하고 난 뒤에는 칼리나가 다음 타깃이 될 것이다.
아마 사자공의 추종자들도 칼리나에게 모여들 테고 황제의 행태에 실망한 귀족이나 중립을 지키고 있던 귀족들도 그녀의 밑으로 모여들 것이다.
결국 그녀는 원치 않든 아니든 태풍의 핵이 돼버릴 수밖에 없다. 애초에 싸움이란 게 한쪽이 싸우기 싫다고 안 일어나는 건 아니잖은가.
“내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알았지?”
“저는 그저 당신이 레이디 칼리나를 빨리 보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했었는데… 솔직히 놀랐습니다. 다 생각이 있었군요.”
젠장. 어떻게 알았지? 힐데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가슴 한켠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공과 사도 구분 못 할 것 같아? 아무튼, 시간이 많이 지체됐으니까 서두르자.”
말이 길어지면 또 잔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적당히 그녀의 말을 끊은 뒤 서둘러 출발했다. 앞으로 어지간하면 힐데 앞에서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겠군.
* * *
“흐음… 말들이 꽤 지친 모양이네.”
나는 적당한 곳에 노숙할 준비를 마친 뒤 갈기를 털며 가볍게 투레질을 하는 말을 살펴보았다. 비단 눈앞에 있는 말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였다.
“쉬지 않고 달리는데 탈진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뭐, 그건 적당히 조절해서 그렇긴 한데….”
당연히 난이도가 올라가면 말들의 체력이나 스태미나도 보이지 않기에 대강 이렇겠거니 하고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말이 한두 마리가 아니라 이렇게 여러 마리가 되면 기준점을 잡기가 애매하다.
그 때문에 당연히 지치는 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고 최대한 쌩쌩해 보이는 말들로 갈아타다 보니 다 같이 늘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필요한 건 휴식이었는데 길게 휴식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신성의 힘을 사용할까도 생각해봤지만, 효율도 좋지 않은 데다 당사자인 내가 이미 신성 중독이기에 바로 고개를 저었다.
“마사지나 해줘야겠네.”
“마사지 말입니까?”
“마사지 몰라? 안마 같은 거.”
내가 양손으로 뭔가를 주무르는 것처럼 움직이자 힐데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압니다만 당신이 그런 재주도 가지고 있었습니까?”
“용병일을 하다 보면 별의 별걸 다 배우거든.”
물론 라그나르의 기억을 뒤집어봐도 마사지를 배운 적은 없었지만, 이곳에는 마사지사라는 직업이 있었고 고인물이었던 나는 당연히 마사지사로도 꽤 많은 시간을 플레이했다.
무쌍을 찍거나 책사로 활동하는 게 질리면 거지, 부랑자, 노예, 마사지사, 검투사 등등 온갖 직업으로 플레이했었는데 그중에 꽤 많이 고른 직업이 마사지사였다.
모드를 설치하고 예쁜 누나나 고귀한 여귀족들을 마사지하는 게 제법 끌리는 상황이었으니까. 거기에 정력까지 적당히 조절해주면 금상첨화다.
아무튼, 의도는 불순했지만 그때 하면서 단편적이나마 마사지에 대한 지식을 읽혔고 거기에는 말이나 소, 양 같은 동물에 대한 마사지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게 현실에서도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서만큼은 통할 것이다. 물론 직업이 마사지사가 아닌 만큼 효과가 탁월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그게 정말로 효과가 있긴 합니까?”
“당연하지. 이비. 의사로서 네 의견을 얘기해줘.”
“어…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는 합니다. 고대 로마에도 전문적인 마사지사나 안마사가 있던 걸로 봐서 나름대로 효율을 보이지 않았을까요?”
“뭐, 정 못 믿겠으면 말들한테 해주기 전에 네가 한번 받아보든가.”
“제가 왜 받아야 합니까? 애초에 마사지라는 명분으로 저나 이비의 몸을 맘대로 더듬으려는 수작 아닙니까?”
와, 이걸 들키네. 하지만 나는 천연덕스럽게 얘기했다.
“말한테 해줘야 되는데 이게 잘못하면 뒷발차기에 맞아서 날아가거든. 아무리 내가 인간치고는 튼튼해도 저거 한 번 잘못 맞으면 내장 다 파열될걸? 난 전장에서 죽고 싶지 발 뒷발굽에 맞아서 죽고 싶진 않아.”
발정 난 수말이 암말한테 달려들다가 뒷발차기에 죽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그래서 보통 암말과 종마를 교배를 시키기 전에 시정마를 집어넣지 않던가.
“으음… 그럼 그 마사지를 시험할 상대가 필요하다는 겁니까?”
“대강 그런 거지. 꽤 오래전에 배운 거라서 감도 익혀야 되거든. 이게 생각보다 주무르는 힘이 중요해.”
“음흉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건실하군요.”
물론 그런 생각도 있긴 했지만… 아니 그런 생각이 태반이었지만 나는 적당히 흘려 넘겼다. 이미 내 마음속에 있는 삼각형은 닳아서 원이 된 지 오래니까.
바로 어제 힐데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놓고 또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힐데의 어디를 마사지 해줘야 잘 해줬다는 소문이 날까 고민하고 있는데 의외로 이비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저, 주군. 괜찮으시다면 제게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태생이 의사라 그런지 새로운 의학이나 치료 방법에는 꽤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그녀는 곧장 바닥에 엎드렸고 나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며 그녀를 놀려줬다.
“흠, 손이나 발 정도면 되는데 꽤 적극적이네?”
“예? 아… 으… 죄,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것까진 없고… 어차피 잘됐어. 너도 계속 말을 타느라고 피곤했잖아? 근육이 많이 뭉쳤지?”
나는 혈도나 근육 뭐 이런 건 잘 알지 못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봤던 그대로 그녀의 몸을 주물렀다.
“흐으….”
“으읏….”
“아흐흐윽….”
다만 효과가 너무 좋아서 뭔가 퇴폐업소에서 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났기에 옆에서 그걸 보고 있던 힐데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내게 따지듯 물었다.
“지, 지,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뭘 하기는. 제대로 마사지하고 있구만. 어때 이비?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지?”
“예… 예. 아, 주군. 거기를 조금만 더 세게… 흐으으응.”
그동안 근육이 꽤 뭉친 데다 피곤이 쌓여있어서인지 이비는 내가 뭉친 곳을 풀어줄 때마다 녹아내렸고 나는 성심성의껏 그녀를 마사지해주었다.
물론 꾹꾹 누를 때마다 부드럽고 탄력 있게 튕겨 나오는 그녀의 피부 감촉은 덤이다. 애초에 마사지라는 게 생각보다 힘든 일인데 이 정도 보상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후우… 자. 끝. 아마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거야.”
“가… 감사합니다.”
그녀는 완전히 녹아내려서 흐물흐물해져 있었고 나는 맞은편에 힐데가 누울만한 자리를 팡팡 치며 얘기했다.
“힐데 너도 한번 받아 보는 게 어때? 이래저래 피곤하지 않아?”
내 말에 그녀는 조용히 나와 이미 녹아버린 이비를 보더니 입고 있던 갑옷을 하나씩 탈착한 채 쭈뼛쭈뼛 드러누웠다.
힐데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한 사각에 들어오자 나는 히죽 웃으면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을 기다려도 늦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동안 힐데를 울려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 다짐을 실행할 수 있게 됐다.
그만해달라고 울어도 봐주지 않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