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3화
“휴식은 편히 취하셨소?”
정의공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아주었고 나는 반쯤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배려해주신 덕분에 크라쿠프의 정취와 문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하, 내 입으로 이야기하기는 그렇지만 크라쿠프는 아름다우면서도 유서 깊은 도시네. 물론 그런 만큼 모든 공작들이 이 도시를 차지하기 위해 피를 흘리지만 그를 감수하고서라도 차지할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지.”
피처럼 붉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얘기하자 꽤 섬뜩해 보였다. 저렇게 부드러워 보이는 정의공이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형이자 공작들을 제치고 대공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니까.
“뭐, 잡담은 이쯤하고… 자네도 알겠지만 이번에 얻은 이득을 두고 조금 얘기가 길어졌네. 그에 대해선 사과하겠네.”
“괜찮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오랜만에 맘 편히 휴식을 즐길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얘기해주니 내 마음의 짐이 조금이나마 줄어든 느낌이구만.”
“헌데 대공 각하. 혹시 영토 분할을 어떻게 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 질문에 정의공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어디를 다스리는지가 그렇게 숨겨야 할 정보인 건 아니니까.
“형인 미에슈코 3세에게는 빌니우스를, 망명공의 아들인 미에슈코 4세에겐 카우나스를, 클라이페다는 내가 가지기로 했네. 남은 자잘한 성들은 다른 공작들이 알아서 나눠 가졌고.”
“미에슈코 4세에게도 말입니까?”
폴란드는 볼레스와프 왕 사후 그의 아들들에게 영지를 내려주며 수많은 공국으로 쪼개졌다. 그중에 장남이자 대공이 브와디슬라프 망명공이었는데 별명에서부터 알 수 있듯 그는 권력 싸움에서 패해 도망친 공작이었다.
망명공은 보헤미아와 신성 제국에 달라붙어 자신의 대공 작위를 찾아달라 요청했는데 그들의 개입으로 대공은 아니어도 실레지아의 공작자리는 얻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 가서 노환으로 사망했고 그의 작위는 아들인 미에슈코 4세가 물려받았다. 문제는 미에슈코 4세가 장남의 아들이었기에 왕의 막내아들이었던 정의공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난다는 점이었다.
“뭐… 미에슈코 4세를 견제하려면 어쩔 수 없었네. 미에슈코 3세와 4세가 힘을 합쳐 날 압박하면 나라도 버틸 수가 없으니.”
“어쩐지 공작들이 조용히 있던 이유가 있었군요.”
“먹이가 충분하다면 굳이 주인을 물지는 않을 테니까.”
뭐, 이해는 한다. 망명공의 아들인 미에슈코 4세는 정의공보다 7살인가 8살인가 나이가 더 많으며 보헤미아와 신성 제국의 비호를 받고 있다. 당연히 정의공에게 정치적으로 부담되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흠… 정의공 각하.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 가지 조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자네의 조언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일세.”
“클라이페다에 례셰크를 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례셰크를?”
“예. 제가 감히 단언하건대 례셰크는 정의공 각하를 참 많이 닮았습니다. 만약 례셰크가 조금 더 경험이 많고 노련했다면 그와 마주했을 때 포로가 되는 건 저였겠지요.”
“하하하, 례셰크를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닌가? 솔직히 나는 자네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돼서 참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네. 그렇게 생각하니, 레셰크를 드레스덴에 보낸 게 신의 한 수였군.”
“오히려 각하께서 저를 띄워주시는군요. 아무튼, 클라이페다에 례셰크를 보내면 북부의 하랄 블로탄과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덴마크와 전쟁을 한 이상 새로운 동맹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랄 블로탄이라… 확실히 왕의 자질을 가진 자였지.”
“직접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를 따르는 바이킹들 모두가 용맹하며 두려움을 모르는 타고난 전사들입니다. 원교근공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공작이나 호시탐탐 폴란드를 침공할 기회를 노리는 신성 제국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러운 동맹 상대가 될 겁니다.”
“…확실히 나도 그 부분은 생각하고 있었네. 허나 내가 하랄 블로탄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자네가 얻게 되는 이득은 뭔가?”
“하랄 블로탄은 저와 혈맹관계입니다. 그리고 례셰크가 그곳의 경험과 기반을 바탕으로 크게 된다면 그 자체만으로 이득 아니겠습니까? 원교근공이라는 게 꼭 각하께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니까요.”
“…바르바로사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하긴, 그의 야심은 유명하지. 이번에 우릴 위해 종군해준 자네에게 무슨 보상을 줘야 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알 것 같구만.”
정의공의 말에 나는 제갈량과 주유의 일화를 차용해서 그에게 제안했다.
“그럼 서로 생각하는 바를 손에 써보시겠습니까?”
“오, 그거 재밌겠군.”
정의공은 즉시 펜을 내게 건네주었고 우리는 서로 뒤돌아 손바닥에 각자가 생각하는 바를 적어서 보여주었다. 물론 각자의 손에는 ‘혈맹’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역시 그대가 생각하는 바가 나와 같군.”
“이것 말고는 다른 게 떠오르지 않더군요. 정의공 각하와의 동맹만큼 값진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나 역시 라그나르 그대와 같은 일세의 영웅과 동맹을 맺게 되어 기쁘다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얘기하며 이 동맹의 주체가 신성 제국이나 폴란드가 아닌, 개인 간의 동맹임을 확실히 했다.
그 뒤로 우리는 협정서를 작성했는데 정확히는 정의공이 초안을 작성해서 내게 건네주고 내가 수정하는 형식이었다.
뭐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었지만 요점만 얘기하자면 서로 어려울 때 돕자는 내용이었다. 일단 나 같은 경우는 폴란드의 안보에 위협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정의공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
반면 나는 그를 위해 하랄 블로탄과의 관계를 주선해주며 추후 신성 로마 제국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중립을 지켜주는 정도?
사실 이번 전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건 나였는데 힐데, 이비와 함께 몸뚱어리만 덜렁 와서 수많은 것을 얻어갔다.
정의공이라는 믿음직스러운 동맹과 하랄 블로탄과의 인연. 그리고….
“상태창.”
이름 :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소속 : 니스의 정당한 지배자, 신성 로마 제국의 백작, 레이븐 용병단의 용병단장
상태 : 활력, 신성 중독
기벽 : 겨드랑이 애호
체력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스탯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특성>
현명한 야만인 : 당신은 글을 완전히 깨우쳤으며 문명인들보다 더 문명화되었습니다. 자칭 문명인들에게 좋은 첫인상을 줍니다.
바이킹식 외교 : 바이킹의 외교는 지극히 합리적입니다. 네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 – 약탈과 관련된 행동 시 전리품 30% 추가 획득합니다.
꺾을 수 없는 의지 : 당신의 의지는 강철과도 같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냅니다.
냉철한 사냥꾼 :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한 판단력을 내릴 수 있습니다.
약자멸시 : 당신은 약자에게 지독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자만 보면 투지가 끓어오르며 약자를 상대로 전투력이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양민학살 : 당신은 약자를 괴롭히는데 도가 텄습니다. 약자들과 전투를 할 시 사기가 일정한 수치 이상 떨어지지 않으며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도망칠 확률을 올려줍니다.
요사스러운 혀 : 당신의 뱀과 같은 교활하고 달콤한 언변으로 남을 설득할 확률이 늘어납니다.
도끼 살인마 : 도끼를 다루는 실력이 늘어나며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확률이 늘어납니다.
아싸씨노! : 귀족을 암살하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기습 시 크리티컬 확률 증가.
비선 실세 : 어둠 속에서 판을 쥐고 흔드는 음모와 계략의 대가입니다. 적을 상대로 계략을 펼칠 시 성공확률이 소폭 증가하며 음모를 꾸밀 시 중립세력의 동조율이 소폭 증가합니다.
도살자(new!) : 당신은 인간을 다진 고기로 만드는데 도가 텄습니다. 당신을 마주치는 적군은 전의를 상실하며 겁을 집어먹습니다.
전쟁광(new!) : 당신이 가는 길에는 늘 까마귀 떼가 떠돌고 있습니다. 적과 전투 시 아군 병력의 사기 및 전투력이 상승하며 적군에게 공포를 심어줍니다.
교묘한 외교관(new!) : 당신은 타국의 지도자를 세 치 혀로 교묘히 꼬드겨 전쟁에 참전시켰습니다. 외교 능력 소폭 증가. 단, ‘공정’ 특성을 지닌 지도자와 외교를 할 때는 페널티를 받습니다.
라트비안 해방자(new!) : 당신은 라트비아인들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으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라트비아인으로 구성된 병력은 당신의 지휘를 받을 시 전투력이 상승하며 사기가 상승합니다.
술고래(new!) : 당신은 하루 종일이라도 술을 마실 수 있습니다. 숙취 대폭 감소 및 주량 증가.
신성 중독(new!) : 당신은 신성력에 중독됐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지금 당장은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인간의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성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단기간에 수많은 특성을 딴 건 처음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신성 중독이라는 달갑지 않은 증상도 있긴 했지만, 이는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이었다.
아직 초기 증세라서 크게 문제 되진 않을 것이다. 더 심해지기 전에 신성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늘리면 될 문제다.
“후우… 이제,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만날 시간이 됐군.”
* * *
원칙대로라면 이대로 남하해서 밀라노로 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굳이 황제가 기거하는 뉘른베르크로 향했다.
황제가 내게 얼굴이나 보자고 연통을 보내기도 했고 나도 황제가 어디까지 준비를 마쳐놨는지 확인해봐야 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와서 그런지 문지기는 내 얼굴과 휘날리는 까마귀 문장을 보자마자 군례를 올리며 나를 통과시켜주었다. 이게 권력의 맛인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미리 연락이 된 건지 궁정백인 콘라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활짝 웃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아줬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선 가당찮을 뿐이다.
“어서 오게. 라그나르 백작. 폐하께서 자네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리고 계시네.”
“그렇습니까? 이 미천한 야만인을 억지로 북부에 보내신 폐하께서 절 보고 싶어 하셨다니 의외로군요.”
“으음… 자네가 화나 있는 건 알고 있지만, 폐하께서 그대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실걸세.”
보상이라… 뭐 주든 안 주든 상관없다. 어차피 지금까지 황제가 하자는 대로 했던 것도 사자공을 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니까.
황제가 내게 엿을 먹였으면 자기도 엿을 한 번 먹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 참 기대되는군요.”
나와 더 얘기해봤자 비웃음과 조롱을 받을 거라 생각했는지 콘라드는 입을 다문 채 나를 황제의 집무실로 안내해주었다.
황제가 초대한 건 오직 나뿐이었기에 나는 콘라드를 따라가기 전에 힐데와 이비에게 귓속말로 임무를 하달했다.
“수고스럽겠지만 둘이 같이 교단에 가서 그동안 얻은 정보들을 가지고 와줘.”
북부로 가기 전에 정화교단에 요청해 정보를 모아 달라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꽤 많은 양의 정보가 쌓였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분명 사람 붙일 테니까 미행 조심하고.”
말을 마친 나는 콘라드를 뒤따랐고 늘 황제를 봐왔던 곳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이전에 봤을 때보다 더 활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어서 오게. 라그나르 백작. 자네가 어찌나 크게 활약을 했는지 그대의 위명이 여기까지 진동하더군.”
“이게 다 폐하의 선구안 덕분입니다. 폐하께서 저를 적절한 곳에 보내셨기에 제가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래서 그곳은 어떻던가?”
황제가 뭘 물어보는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한 번쯤은 비꼬아서 조롱해주기로 했다.
“저 같은 야만인에게 참 어울리는 곳이었습니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폐하의 안목이 참으로 탁월한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구만.”
대놓고 좆같았다며 비아냥거리자 황제도 당황했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감돌 때 황제는 뜬금없이 비탄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자네도 이 사람에게 참 서운할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은 결코 단 한 번도 그런 참담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 사람이 못 할 짓을 한 건 사실이니 굳이 그렇게 위로할 필요 없네. 국익을 위해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네를 희생시키지 않았나.”
국익은 지랄. 폴란드라는 짐승한테 북부라는 먹이를 던져줘서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던 것뿐이면서 포장은 잘도 해 대는군.
“말씀하신 대로 국익을 위해서 그런 결단을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더군다나 근본도 없는 야만인에게 백작의 자리를 내려주시고 보호해주신 황제 폐하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갑자기 포커스를 돌리는 황제의 행태가 심히 역겨웠지만 일단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당분간은 황제가 하자는 대로 하기로 했는데 굳이 심기를 더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
“정말 고맙네. 자네라면 내 진심을 이해해줄 거라 믿고 있었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쨌건 갑은 저쪽이었기에 나는 이 일을 이쯤에서 정리하고 적당히 황제와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저녁때가 되자 황제가 날 위해 연회를 열겠다고 했지만 나는 칼리나를 핑계로 거절했다. 지금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니 반년 안에 군사를 일으킬 모양인데 한시라도 빨리 내려가서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폐하. 몸 보중하십시오.”
“그래. 다음에 또 보세. 지금은 일이 너무 바빠서 그대를 이리 보낼 수밖에 없지만 지금 처리하고 있는 업무가 정리되면 정식으로 자네를 이곳으로 불러 공을 치하해주겠네. 그때,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보게나.”
글쎄… 다음에 볼 때 황제가 날 죽이려 들지 않으면 다행일 거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나는 바르바로사의 반대편에 서서 그에게 칼을 겨눌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