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2화
가장 큰 고민거리이자 날 옭아매던 족쇄인 에릭 블러드엑스가 리가만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나는 서둘러 폴란드군과 함께 철군할 준비를 서둘렀다.
이미 이곳에서 4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폴란드의 공작들도 몸을 뒤틀며 철군하자고 징징거리는 데다 나 역시 슬슬 돌아가 봐야 한다.
내 영지에 있던 시간보다 외부에 있던 시간이 더 긴 건 웃긴 일이지만, 이 정도로 영지가 개판 나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갈 생각인가?”
내가 방에서 짐을 싸고 있자니 하랄 블로탄이 술을 건네며 물었다. 어제도 돌아간다고 연회를 하며 진탕 술을 먹여놓고는 그다음 날 바로 술이라니… 감탄밖에 안 나온다.
물론, 주는 술을 거절할 내가 아니다. 원래의 내가 이런 독한 술을 마시면 하루 종일 숙취에 시달릴 테지만, 라그나르는 아니었으니까.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야 그렇지만 안타깝군. 자네가 내 곁에 함께한다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을 텐데.”
“하하하, 자네도 제법 입에 발린 말을 할 줄 알게 됐군.”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술을 한 모금 들이킨 뒤 그에게 건네며 진심 어린 마음으로 조언했다.
“기회가 올 때까진 이곳에서 힘을 기르고 있게. 자네의 최종 목표가 덴마크라지만 절대 이곳을 소홀히 해선 안 되네.”
“알고 있네. 자네가 써준 조언은 백 번도 넘게 읽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하랄의 말대로 나는 내가 철수하기 전에 그에게 조언을 비롯해 앞으로의 행동방침을 십여 개 정도 적어주었다.
후계자를 확고히 하며 절대 원주민들을 탄압하지 말고 당분간은 내정에 힘쓰고 각 도시에 새로운 지도자가 등극했음을 알릴 것 등등 더할 나위 없이 상세하게 적어두었다.
물론 그도 왕의 자질을 지닌 만큼 알아서 잘하겠지만 이 세상의 모든 왕들이 명군으로 불린 건 아니잖은가. 그의 최후가 썩 좋은 것도 아니었고.
“다시 볼 수 있겠지?”
“이별이 있어야 또 만남이 있지 않겠나. 우린 꼭 다시 보게 될 걸세. 그리고 그때가 곧 자네가 덴마크의 왕이 되는 바로 그 순간이 될 거야.”
말을 마친 나는 짐을 한가득 담은 배낭을 둘러메며 그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넸다.
“잘 있게. 하랄. 오딘께서 그대를 굽어살피시길.”
“잘 가게. 라그나르. 오딘께서 그대와 함께하시길.”
나는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하랄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 씨는 다 뿌려놨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들인 노력 이상의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황제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정말 궁금하군.
* * *
하랄과 이별한 뒤 나는 정의공 및 그가 이끄는 폴란드군과 함께 포메라니아로 귀환했다. 이대로 황제가 머무는 뉘른베르크로 향하려 했지만 정의공이 나를 붙잡았다.
그는 바쁘지 않다면 크라쿠프에 며칠간 머물며 자신에게 지혜를 빌려달라 부탁했다.
솔직히 바쁘긴 했지만, 폴란드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대공이 저렇게까지 얘기하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뭐 돌아간다고 해도 500km 정도 돌아가는 수준에다 도로가 잘 닦여 있으니 그렇게 긴 시간을 잡아먹진 않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은 더할 나위 없이 순조로웠다. 도적들도 없었고 잘 닦인 가도는 군대의 행군 속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다만 특이점이 하나 있었는데 보급과 물자 덕분에 공작의 병력들은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지만 당사자인 공작들은 폴란드의 수도인 크라쿠프까지 함께했다.
그들은 크라쿠프에 도착하자마자 여독을 풀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회의를 가졌다.
물론 나는 그 시간이 이번 전쟁에 참여한 공작들끼리 이익과 지분을 나누는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따로 끼어들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방에서 먹고 자고 산책과 관광을 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 현실은 게임이 기반이고 내가 이런저런 모드들을 깔아놓았기에 시간을 죽이는 건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현대에서도 하지 못했던 해외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힐데, 이비와 함께 크라쿠프 인근을 돌아다녔다.
“오, 저게 맛있어 보이네. 먹고 가자.”
“아까 밥을 먹었는데 더 들어갈 공간이나 있습니까?”
“원래 군것질이 그런 거지 뭐.”
나는 툴툴거리는 힐데를 끌고 가판대로 가서 그대로 꼬치구이를 흡입했다. 현대에서 먹었던 갖은 양념들이 그립기는 했지만, 석쇠에 가볍게 구운 것만으로도 고기의 맛은 일품이었다.
“야… 이거 술이랑 먹으면 딱인데. 지금 굽고 있는 것 전부 다 포장해주게. 양이 꽤 될 테니 성으로 배달해주고.”
“예. 나으리. 헌데 어떤 분의 성함을 대면 되겠습니까.”
“라그나르의 이름을 대면 될 걸세.”
“귀하신 분이셨군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인은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서둘러 남은 꼬치들을 굽기 시작했고 힐데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삐딱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최근 돈을 많이 벌었다지만 너무 돈을 낭비하는 것 아닙니까?”
“원래 버는 만큼 써줘야 경제가 돌아가는 거야.”
“하,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경제가 아니라 약탈경제겠지요.”
힐데의 말에 나는 괜히 심통이 나서 그녀가 먹고 있던 꼬치를 빼앗아 전부 집어삼켰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못 했고 나는 히죽 웃으며 그녀에게 빈 꼬치를 돌려주며 빈정거렸다.
“이게 약탈경제인가? 오늘 새롭게 또 하나 배워가네.”
“이… 이이…… 미쳤습니까!?”
힐데는 텅 비어있는 꼬치를 보며 분한 듯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지만 난 어깨를 으쓱였다. 바이킹답게 약탈을 한 건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하하하, 너무 화내지 마. 나중에 술 마실 때 또 먹으면 되잖아.”
나는 주인에게 돈을 건넨 뒤 씩씩거리는 힐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심통이 났는지 차갑게 내 손을 쳐냈지만 나는 억지로 그녀와 어깨동무를 하며 옷가게로 이끌었다.
“여기는 또 왜 왔습니까?”
“옷 좀 사려고. 너도 그렇고 이비도 그렇고 제대로 된 옷이 없잖아.”
“저, 저는 괜찮습니다. 주군.”
“보는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이비의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가 역병의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모습 그 자체였다. 원래 그게 모티브이긴 하지만 저렇게 두꺼운 망토와 가죽옷만 입고 다니는 걸 보니 보는 내가 갑갑하다.
“힐데. 너도 평상복은 별로 없지 않아?”
“글쎄요. 용병단장인 당신을 따라다니는데 평상복을 입을 일이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밖에서 전투를 할 때는 갑옷을, 그게 아닐 때는 늘 정화교단의 정복을 입고 다녔다. 정복 차림새도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그걸 입고 밖에 돌아다니는 건 조금 그렇지 않은가.
“뭐 당분간은 전쟁터에 갈 일이 없을 테니까 이참에 옷이나 좀 사자.”
“주군.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애초에 제가 다른 옷을 입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비에게 새겨진 낙인은 비단 얼굴에만 있는 게 아니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몸을 꽁꽁 둘러매고 다녀야 했다.
“나랑 같이 입을 때 입으면 되지.”
솔직히 이비는 몸에 새겨진 흉터나 낙인이 흉측해서 그렇지 스타일이 좋아서 어지간한 옷은 전부 다 소화할 수 있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고 싶기도 하고.
“…주군께서 바라신다면.”
“그럼 들어가자.”
같이 안에 들어오긴 했지만 난 일단 둘이 옷 고르는 걸 지켜보기로 했다. 사람 취향은 다양하니 너무 이상하지만 않다면 적당한 선에서 둘의 맘에 드는 걸 사줄 생각이었다.
다만 이비는 곧장 망토니 후드가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직행했기에 나는 그녀를 끌고 적당한 옷을 골라주었다.
처음부터 노출이 심한 옷은 거부감이 심할 테니 적당히 종아리 부분과 팔뚝 정도만 드러나는 옷을 골라주었다.
“저기… 이거 살이 드러나는 부분이 너무 많은 거 아닐까요?”
“괜찮으니까 빨리 입고 와.”
내 말에 이비는 어기적어기적 탈의실로 향했고 그사이 힐데는 자기가 고른 옷을 가지고 와서 내게 보여줬다.
“어떻습니까. 라그나르. 깔끔하면서도 활동하기에 편해 보이는 옷 아닙니까?”
물론 나는 그녀가 들고 온 옷을 보고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옷을 사라고 했더니 무슨 야영하면서 입을 법한 옷을 들고 왔다.
“진짜 그거 사려고?”
“예. 중간중간 안감을 덧대고 양모도 일부 함유되어 있어서 보온성도 좋습니다. 가격도 적당하니 입고 다니기에 딱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저 잘난듯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는 뭔가 얘기를 꺼내려다가 그냥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후, 됐다. 내가 골라줄게.”
내가 값비싼 옷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으로 향하자 힐데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옷 정말 괜찮은데….”
물론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와 케이프, 그리고 적당한 굽이 있는 구두를 골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이걸로 입고 와봐.”
그러자 이번에는 힐데가 똥 씹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라그나르 당신 설마 제게 이런 옷을 입히고 싶은 겁니까? 이런 옷인지 천 쪼가리인지 모를 옷을 입혀놓고 관음하는 취미가 있는 겁니까?”
“그도 아니면 사제인 제게 이런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히면서 배덕감을 느끼고 싶으신 겁니까?”
“어째 갑자기 옷을 사준다고 하더니 당신의 음습한 욕구를 채우고 싶었던 거군요. 하긴, 남자가 옷을 사주는 건 그 옷을 벗기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애초에 제 사이즈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믿기지가 않는군요.”
이런 매도를 듣는 것도 오랜만이네. 으음…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아. 다만 그녀가 하나 착각하는 게 내가 지금 골라준 옷이 현시대 기준으로 유행하는 옷이다.
애초에 내가 이 게임을 하면서 게임 속 NPC들이 입은 옷을 얼마나 봐왔다고 생각하는가.
“그래그래. 알았으니까 빨리 입고 와봐.”
내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적당히 대꾸하자 힐데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타이밍 좋게 이비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모습은 내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역시 옷걸이가 좋으니 옷이 잘 받는다.
“오. 후드 뒤집어쓰고 다닐 때보다 훨씬 낫네.”
“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괜찮다니까. 자신감을 가져. 사실 네가 직접 봐도 나쁘지 않지?”
나는 팔과 다리를 드러낸 이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얘기했고 그녀는 작은 소동물처럼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네… 네. 그렇습니다. 주군.”
“봤지? 내가 나름대로 패션 센스가 있어요.”
“그런 것치고는 당신이 입는 옷도 이상한 건 아십니까?”
“나는 얼굴이 돼서 누더기를 걸쳐 입어도 잘 어울리거든.”
뭐, 원래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하지 않던가. 실제로 라그나르는 상남자 그 자체였고 턱선이 굵어서 굉장히 남자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후… 더 말해봤자 제 입만 아프겠군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힐데는 툴툴거리면서도 얌전히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향했다.
뭐, 말이야 저렇게 하지만 게임에서도 이런 식으로 동료 캐릭터들에게 선물을 하면 호감도도 오르고 충성도도 올랐으니 악영향을 끼치진 않을 것이다.
그 뒤로도 나는 일주일이 넘게 크라쿠프를 돌며 관광을 즐겼다. 양손에 미인을 둘이나 끼고 한가하게 관광을 하고 있다니… 세상에 이런 천국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늘 그렇듯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끝나기 마련이었다.
“라그나르 백작 각하. 정의공 각하께서 점심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오늘로 휴가는 끝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