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1화
“후….”
에릭 블러드엑스는 리가성 높은 곳에 올라와서 휘날리는 하랄 블로탄의 깃발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들이 스웨덴의 견제로 조금 늦게 오긴 했지만 설마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리가는 견고하며 커다란 성이다. 혹독한 추위와 수비의 이점을 이용해 버티기만 했어도 능히 일 년을 버티는 게 가능한 그런 철옹성이었는데 저렇게 말아먹은 걸 보면 기사단이라는 놈들도 어지간히 못난 놈들이었다.
“병신같은 놈들.”
그놈들이 죽은 건 알 바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로 인해서 자신의 처지가 난감해졌다.
그 병신들 덕분에 함대를 이끌고 이곳까지 왔는데 아무런 수익도 거두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게 생겼다.
아니, 애초에 그냥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고 설사 아무런 손해 없이 복귀한다고 해도 손해가 막심했다.
자신은 덴마크에서 형제들을 토벌하자마자 쉬지도 않고 곧장 물자를 쥐어짜 이곳까지 원정을 왔다.
당연히 내부에서는 계속된 원정과 높은 세금으로 불만이 쌓여있을 텐데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교도나 하랄 블로탄의 추종자와 같은 자들이 자신을 물어뜯을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거기에 실제로 싸우지는 않았어도 자신이 퇴각하게 되면 세간에선 이를 하랄 블로탄의 승리로 여길 테고 지금과는 다르게 하랄 블로탄의 입지가 커질 것이다.
“중간에 껴서 오도 가도 못하게 생겼군.”
그렇게 에릭이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부관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보고했다.
“전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라그나르? 하이르 앗 딘을 참살했다는 바이킹 말인가?”
“예. 신성 로마 제국의 백작이며 하랄 블로탄을 도와 리가를 함락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부관의 보고에 눈살을 찌푸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에릭은 마침내 편지를 받아들었다. 편지를 본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고 대체 뭐라고 적어 보냈을지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세상에 다시 없을 위대한 왕위 찬탈자에게.
안녕하시오. 덴마크의 왕위 찬탈자여.
본인은 위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백작이자 하이르 앗 딘 참살자이며 오딘의 대전사인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고 하오.
문명화되지 못한 야만인들의 땅이나 다름없는 그곳에도 본 백작의 위명은 널리 알려져 있을 거라 생각하기에 굳이 더 설명하지는 않겠소.
본 백작이 그대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 건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요.
이쯤 하고 물러나는 게 어떻소?
그대는 아군이 취약한 시점을 정확히 노려 우리를 몰아붙이는 날카로움을 보여줬으며 그대가 전쟁에 참전한다는 사실만으로 수많은 병사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소.
그대가 단순히 병력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모두에게 위협이 됐기에 스웨덴은 그대를 두려워해 군대를 일으켰으며 원주민들 역시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합류하였고 폴란드 역시 군말 없이 북진을 한 것이오.
그대의 위엄에 압도되어 살기 위해 기약 없는 발버둥을 치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긴다면 부디 이대로 철군해주시오.
본 백작이 생각건대 그대의 카리스마는 천공신 오딘의 멀었던 눈을 뜨게 만들 정도며 그대의 신묘한 책략은 헬헤임의 여왕 헬라마저 벌떡 일어나게 만들 정도요.
이처럼 단 한 번의 출정으로 그대의 위명을 드높였으니 이에 만족하고 회군하는 게 어떻겠소?
그대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위 찬탈자로 이름을 널리 알리기를 바라며.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콰직!
에릭은 끝까지 인내하며 편지를 읽어보려 했지만, 그 안에 적혀있는 글이 너무나도 오만방자하고 시건방졌기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중간에 편지를 구겨버렸다.
“이런 건방진 자식!”
마음 같아선 앞뒤 생각하지 않고 병력을 투입해서 리가를 함락시키고 싶었지만, 에릭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우선, 왜 라그나르가 이 편지를 보냈는지부터 차분히 생각해보았다. 제정신이라면 이 편지를 받고 당연히 화를 내지 않겠는가.
즉, 라그나르는 자신이 화내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었고 더 나아가 이성을 상실하고 성을 공격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어째서? 이곳에서 얻은 첩보들을 종합해 봤을 때 적 연합군의 상태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쪽도 섣불리 칼을 뽑아 들기 힘들지만 그건 저쪽 역시 매한가지 아니던가. 만일 적 연합군의 상태가 괜찮았다면 편지고 나발이고 양쪽에서 자신들을 포위해서 섬멸시켰을 것이다.
물론 폴란드의 병력들이 가장 크게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은 넓은 평야이긴 하지만….
“저, 전하!”
“무슨 일이길래 그리 호들갑인가? 내가 늘 침착함을 유지하라 하지 않았더냐.”
“저, 저, 저기….”
에릭의 질책에도 부관은 입을 멍하니 벌린 채로 한 곳을 바라보며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고개를 돌린 에릭은 이내 부관과 비슷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철옹성처럼 굳게 닫혀있던 성문이 열리더니 뿔나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소수의 무리가 비상하는 까마귀의 깃발을 휘날리며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만약 저 깃발을 들고 있는 당사자가 라그나르가 맞다면 그는 지금 제대로 된 호위병이나 갑옷도 없이 자신들에게 달려오고 있다는 얘기였다.
라그나르로 추정되는 미친놈은 화살의 사정거리가 닿는 해안선까지 달려오더니 호탕한 목소리로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에릭 블러드엑스! 북부에서 이름난 그대가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돌려보내기에는 내 마음이 편치 않소. 이곳에 와서 나와 함께 술이라도 한잔하고 가는 게 어떻겠소?”
“…미친놈인가?”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저 정신 나간 행동은 허세를 무기로 한 블러핑인가? 아니면 정말 미쳐서 저러는 것인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관의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던 에릭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상륙용 배를 띄워라.”
“알겠습니다. 호위병력도 함께 준비하겠습니다.”
“호위병은 필요 없다. 자네만 무장해서 따라오게.”
“예? 허나….”
“두 번 말하게 하지마라. 저쪽은 갑옷도 무기도 없지 않나.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데 겁쟁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싶은가?”
“알겠습니다.”
부관으로서 그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에릭의 의지가 확고했기에 부관은 최대한 무장을 두텁게 챙겼다.
그렇게 작은 상륙용 배가 해안가에 도착하는 동안 라그나르는 열심히 테이블을 설치하고 그 위에 온갖 산해진미들과 고급스러운 와인을 늘어놓았다.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에릭은 인사도 잊고 바로 라그나르를 향해 쏘아붙였다.
“대체 이게 무슨 꿍꿍이지?”
“하하, 꿍꿍이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것보다 첫 만남인데 통성명부터 하는 게 어떤가?”
라그나르는 에릭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양옆에 있는 청년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들을 에릭에게 소개했다.
“먼저 본인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고 하네. 그리고 여기는 정의공의 아들인 례셰크이고 이쪽은 하랄 블로탄의 아들인 스벤이지. 스벤. 그대에게는 여기 에릭 블러드엑스가 고모부가 되겠군.”
라그나르의 소개에 스벤은 원수나 다름없는 에릭을 노려보았지만, 에릭은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목적이 뭐지? 이따위 어린애 장난 같은 짓거리는 왜 하는 거고?”
“다 얘기해 줄 테니 일단 술부터 한잔하는 게 어떤가? 그대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차리긴 했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다면 성안에 들어가서 마셔도 좋네.”
라그나르는 환한 미소와 함께 훤히 열려있는 성문을 가리키며 얘기했지만, 에릭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한 듯했다.
쾅!!!
“지금 내가 장난치는 것 같나!?”
안 그래도 살벌하던 분위기가 방금의 행동으로 인해 완전히 경직됐지만 라그나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 목적은 진작에 얘기하지 않았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얼굴도 한번 보고 술이라도 한잔해야 돌아가서 뭐라도 할 말이 있지 않겠나?”
“…….”
“덴마크로 돌아가서 그냥 함대 끌고 산책갔다 왔다고 하면 별로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 같아 내 나름대로 그대를 배려해준 건데 마음에 안 들었나 보군.”
말을 마친 라그나르는 말린 생선을 북 찢어서 입에 집어넣더니 에릭에게도 건넸다. 얼떨결에 어포를 받은 에릭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내가 이대로 퇴각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물론.”
“어째서?”
“그야, 내가 편지에 적었듯이 그대에게 퇴각해달라 애걸복걸했기 때문이지. 설마 위대한 왕위찬탈자께서 이 불쌍한 소시민의 소원 하나 들어주지 않으려는 건가?”
라그나르의 말에 에릭은 생각에 잠겼다. 척후병들이 보고하기를 기병 수백 기가 일시에 성을 빠져나갔다고 했었다.
그들이 돌아왔다는 보고는 따로 받지 않았으니 여전히 외부에 나가 있겠지. 그리고 그들은 시시때때로 공성 캠프를 급습해서 자신들을 괴롭게 할 것이다.
거기에 남아있는 식량이 얼마 되지 않았다. 애초에 리보니아 기사단에게 모든 물자를 지원받기로 했는데 당사자가 죽어버리고 리가는 이미 적들의 손에 떨어졌다.
원주민들은 저들에게 협조적이며 리가만을 통과할 때 뒤에 적을 남겨두고 강행돌파 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이곳에 고립될 위험이 있었다.
만약 적들이 나가는 입구를 틀어막고 후방에서 공격해온다면 자신들은 바다에서 말라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스웨덴을 꼬드겼나?”
“글쎄… 얘기했듯 그대가 두려워 자위 차원에서 병력을 일으킨 거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곳에 있는 놈이 저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고 있겠는가. 이리도 준비성이 철저한 놈이니 이렇게 배짱장사를 하고 있는 거겠지.
“그 낯짝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군.”
“오, 위대하신 왕위 찬탈자께서 내 얼굴을 기억해준다니… 영광이군.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그대가 죽고 나면 하랄 블로탄과 함께 꾸준히 성묘는 가드리지.”
끝까지 능글맞게 웃는 라그나르를 바라보며 에릭은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을 쭉 들이키더니 바닥에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잘 마셨네.”
“잘 가시오. 따로 배웅은 하지 않겠소.”
휘적휘적 손을 흔들고 있는 라그나르를 보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하랄 블로탄 역시 이 큰 땅덩이를 집어삼키려면 만만치 않게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할 바에야 자신도 돌아가서 지지기반을 확고히 한 뒤 싸우는 게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하랄 블로탄과 라그나르의 두개골은 특별히 도금해서 술잔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 정도는 해야 자신이 받은 굴욕과 분노가 풀릴 테니까.
* * *
에릭이 배 위에 오르고 함대를 물리는 걸 바라본 라그나르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훔쳤다.
“생각보다 잘 먹혀서 다행이군.”
“이게 다 라그나르 백작님의 달변과 통찰력 덕분입니다.”
“그렇게 얘기해주니 고맙군. 그래도 우릴 속이는 기만책일지 모르니 한동안은 경계를 유지해야 하네. 례셰크 자네는 곧장 부친께 가서 이 소식을 전하게.”
“알겠습니다.”
“스벤 자네도 자네의 부친께 이곳에서 보고 들은 걸 그대로 전하고.”
“물론입니다.”
내가 에릭과 단독으로 만나는 건 이상한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랄 블로탄의 아들인 스벤을 데려온 거지만 굳이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원역사에서 하랄 블로탄은 자신의 아들인 스벤이 일으킨 반란에 왕위를 찬탈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나는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둘의 사이를 원만하게 조율할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일이 잘 풀려서 정말 다행이군.”
나는 허공에 떠 있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입술을 씹었다.
― 초기 신성 중독 증세를 보입니다.
― ‘꺾을 수 없는 의지’가 발동합니다. 신성 중독 증세를 막아냅니다.
― 하지만 언젠가는 힘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 당신의 정신력과 의지를 보이십시오.
“빌어먹을. 그나마 억제가 되는 게 다행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