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0화
하랄 블로탄이 결투에서 승리한 뒤로 나는 그를 대신해서 임시로 리가를 통치했다. 뭐, 말이 통치지 실상은 뒤처리였다.
원래라면 하랄 블로탄이 직접 처리해야 할 일들이었지만, 부상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정의공을 비롯한 폴란드군에게 이곳은 자신들이 다스릴 영지가 아니니 끼어들기도 애매했다.
결국, 전장의 뒤처리는 내가 다 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를 치는 것보다 사고의 뒷수습을 하는 게 더 힘들다는 얘기처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하나하나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처리해 나갔다.
“백작 각하. 포로로 잡은 기사단원들의 처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 기쁜 날, 이 이상의 피는 무의미하다. 일단은 감옥… 아니, 적당한 곳에 감금해두도록. 그들은 추후 배에 태워서 추방할 것이다.”
“예. 그리고 죽은 볼퀸 기사단장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합니까?”
“시체는 교회의 사제를 불러서 기독교식으로 처리하게. 만약 기사단원들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겠다고 한다면 허가해주게. 단, 혹시 모를 일이니 감시 병력을 3배 이상 붙여야 하네.”
차라리 깔끔하게 기사단원들의 목을 베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그랬다간 원주민들은 물론이요 덴마크에서 기독교를 믿는 자들과도 척을 질 수도 있었다.
거기에 볼퀸이 저런 식으로 전사했는데 지금 와서 저들의 목을 베는 것도 뒷맛이 좋지 않았다.
어차피 리보니아 기사단의 세력은 와해됐고 살아남은 이들도 채 십여 명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복수를 하고자 한들 뭘 할 수 있겠는가.
“또한, 기독교도라도 별다른 차별을 가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지켜주겠다고 공표하게.”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힐데! 네가 직접 정화교단 정복 입고 이쪽 교회나 사원 뭐 그런데 가서 직접 얘기를 전해줘. 야만인들이 방문하는 것보단 같은 종교인인 네가 가는 게 더 낫겠지.”
“그러지요. 추가로 더 전할 말이라든가 있습니까?”
“아무런 해도 안 끼칠 테니 사람들 진정시키는 데 동참하라고 전해. 그리고 쓸만해 보이면 이쪽 행정업무 몇 개 떠넘겨주고.”
애초에 수도사나 신부 같은 사람들은 신학을 공부해야 했기에 글을 알았고 이 시기에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건 훌륭한 행정자원임을 뜻했다.
거기에 원래부터 교회는 종교와 관련된 것들이나 출생신고, 사망신고, 장례 등등의 행정업무를 전담해서 처리해왔으니 이제 와서 일을 맡긴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흐트러진 치안부터 잡아야 하니 순찰을 돌리는 병사들의 수를 3배 이상 늘리게.”
“병사들의 피로가 심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뭐든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네. 처음부터 확실하게 휘어잡고 칼같이 기준을 세워둬야 뒷말이 안 나오는 법이야.”
사실 정책이라는 건 뭘 어떻게 하든 불만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럴 때 확고한 원칙을 세워두면 불만은 생길지언정 납득은 하게 된다.
“그리고 여력이 있다면 주민들을 소집해서 성을 보수하게. 특히 성벽은 둘째 치더라도 부서진 성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복구해야 하네.”
“강제로 징집합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우리가 가져온 물자와 성안에 있던 재물들을 풀게. 일반적인 품삯보다 1.5배 정도 더 쳐주면 너도나도 지원하겠지.”
성벽이야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기에 어느 정도 공성에 버틸 수 있겠지만 성문은 박살을 내버렸기에 반드시 수리해야 했다.
“그리고 이비, 하랄 블로탄의 상태는 어때?”
“그리 깊게 찔리지는 않아서 며칠만 휴식을 취하면 이전처럼 활동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소식이네. 필요한 의료물품은 뭐든 써도 좋으니 그를 중점으로 돌보면서 여유가 있으면 다른 병력들도 봐줘.”
아직 모든 위협이 끝난 게 아니다. 보스를 잡았지만 DLC 보스인 에릭 블러드엑스가 남아있는 이상 최대한 전투력을 온존시켜야 한다.
“다른 것보다 사람이 많이 모인 만큼 전염병 안 돌게 위생관리 철저히 시켜. 특히 화장실은 성 외부에 만들고 시체를 묻을 공간이 부족하면 전부 다 태워버려.”
“허면 저희를 따라 이곳으로 온 원주민들도 돌려보냅니까?”
이비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이곳에 머무르는 인원을 줄이고 싶어서 제안했겠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당장은 안돼. 최소 사나흘… 적어도 에릭 블러드엑스가 오고 그를 막아낼 때까지는 잡아둬야 돼. 대신 다 끝나면 각 도시와 마을의 대표 2~3명만 남기고 돌려보낼 테니 그때까지만 고생해줘.”
“예. 주군.”
“또한, 성안에 있는 재물과 쌀을 풀고 소와 돼지를 잡아서 고생한 병사들을 위로하게. 필요하다면 술을 내려도 되지만 취하지 않을 정도로 조절하게. 만약 술에 취해서 행패를 부리는 게 내 눈에 띄거나 귀에 들린다면 군법으로 엄중히 다스리겠다고 전하게.”
포상이라는 말에 나를 보좌하던 바이킹들의 얼굴이 밝아졌지만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당연하겠지만 약탈은 철저하게 금하며 원주민들에게 적대하는 일이 없어야 할 걸세. 약탈은 걸리는 즉시 참수형이니 각자 자중하라 전하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하랄 블로탄 휘하의 바이킹들을 자신의 수족처럼 부려가며 일 처리를 하는 라그나르를 지켜보던 정의공은 감탄했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단하지 않더냐?”
“어떤 게 말씀이십니까?”
“라그나르 백작 말이다.”
“음… 확실히 용맹 하나는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가 혼자서 적군 수십 명을 상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적들을 학살했습니다.”
례셰크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흩뿌려진 혈흔과 부러진 병장기들을 살피며 얘기했고 정의공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를 보고 있자니 온몸이 용기와 담으로 이루어진 것만 같더구나. 더불어 판의 큰 흐름을 짤 줄 알며 적과 아군의 심리를 교묘하게 꿰뚫고 있으니 능히 이 시대의 영웅이라 칭할 법하구나.”
“라그나르 백작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 정도라는 말씀이십니까?”
“너도 직접 보지 않았더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너무 과장하시는 게 아닙니까?”
“과장? 오히려 과소평가일지도 모른다. 적들의 심리를 꿰뚫는 기만술, 원주민들의 마음을 훔치는 언변, 전장을 조율하는 능력, 뛰어난 행정력과 일신의 무력까지. 대체 저런 자가 영웅이 아니라면 누가 영웅이란 말이더냐.”
정의공에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례셰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이 전쟁의 판도를 짠 것도 라그나르였고 그 덕에 병력의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아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또한, 의도적으로 하랄 블로탄을 띄워주는 것은 물론이요. 결투를 통해 그의 명예를 드높여 주었다. 거기에 기독교도에 대한 자비와 관대함까지 보여주었지.”
“저희가 기독교도라 그런 겁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만 덴마크 내부에 있을 카톨릭 세력에 대한 어필이기도 하겠지. 기독교를 탄압하는 에릭 블러드엑스와 달리 최소한의 존중을 보여주지 않았느냐.”
“그들을 하랄 블로탄의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내부에 적을 두게 된 에릭은 난감해지겠군요.”
“그래. 더불어 결투라는 이름으로 볼퀸을 공개적으로 처형함으로써 원주민들의 분노도 가라앉혔지. 나는 라그나르가 대체 어디까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구나.”
정의공은 전쟁을 끝낸 뒤에도 바쁘게 뛰어다니는 라그나르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내 살아생전 새로운 바이킹 왕조가 열리는 걸 볼 수도 있겠군.”
* * *
그렇게 하루 종일 바쁘게 뛰어다니며 대강의 상황을 정리한 뒤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다급한 표정의 전령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내게 보고했다.
“백작 각하! 데, 덴마크의 대함대가 리가만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그 보고에 나는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릭이 뒤늦게 온 건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물러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으며 급조한 성문은 어느 정도 보수하긴 했지만,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적이 공성 병기로 두들긴다면 순식간에 박살 날 터였다.
또한 바이킹들은 버프의 여파로 긴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해야 했고 원주민들은 에릭이 이끄는 병력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정의공이 이끄는 병력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우리를 위해서 병력을 희생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이미 원정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하루라도 빨리 복귀하고 싶을 것이다. 아무리 정의공의 입김이 세더라도 공작들이 한꺼번에 요구한다면 거절하지 못하리라.
“젠장.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가 닭 쫓던 개 꼴이 되겠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제갈량이 사마의를 상대로 썼던 공성계(空城計)를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곧장 정의공을 찾아갔다.
“정의공 각하.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자네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얘기해 보게나.”
나는 내가 생각했던 계책을 얘기했고 고민하던 정의공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것보단 차라리 이곳에서 성문을 닫고 농성을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아니면 차라리 나가서 적들이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는 게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며칠간 계속된 공성으로 병력들이 많이 지쳐있습니다. 거기에 폴란드군도 불만이 새어 나오기 직전 아닙니까?”
이미 그들은 너무나 먼 거리를 북진해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공작들 중 하나가 더 이상 못 해 먹겠다며 돌아간다고 하면 폴란드 연합군은 순식간에 와해될 것이다.
“으음… 자네 말대로 대부분의 공작들이 비협조적으로 굴고 있다네. 우리의 요청으로 병력을 일으켰는데 정말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만 해주신다면 각하의 직속 병력만으로도 능히 적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정말 되겠는가?”
“됩니다. 에릭 블러드엑스가 저돌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전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굉장히 신중하게 탐색을 한다고 하니 제 꾀에 제가 넘어갈 겁니다.”
“알겠네. 자네 말대로 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 바로 기병을 이끌고 나가보겠네.”
“무리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공성계가 실패한다고 해도 별로 문제 될 건 없다. 그가 쓰마이처럼 물러나면 좋은 거고 아니라면 원래대로 수성을 하면 된다.
우리 쪽도 힘들겠지만, 등 뒤에 윙드 후사르를 달고 공성을 하는 것도 여간 성가신 게 아닐 것이다.
거기에 그들은 리보니아 기사단에게 물자를 지원받기로 했기에 직접 가져온 물자도 얼마 되지 않을 텐데 그마저도 스웨덴의 방해에 시일이 끌렸다.
배고픈 군대는 절대 싸우지 못한다는 걸 고려해봤을 때 그들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기껏해야 한 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퇴각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채 이주도 안 될 테고.
그러니 나는 에릭 블러드엑스를 도발해 일부러 이쪽에서 싸움을 유도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어디 뭐라고 도발을 해줘야 잘 도발했다는 소리가 나올까?”
나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펜을 들었다. 한국인은 몸속에 키보드 워리어의 혼이 내재되어 있다고 했던가?
이건 의외로 역사에서도 증명된 사실인데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보낸 편지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본받아 에릭을 도발해 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