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9화
쾅!
있으나 마나 한 방벽을 걷어차고 내성으로 진입하자 안에는 겁먹은 표정의 기사단원들이 무기를 빼 들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들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으며 검을 들고 있는 손은 공포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들 역시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었으며 바이킹이 얼마나 야만스럽고 공포스러운 존재인지는 능히 들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짝. 짝. 짝. 짝.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는 걸맞지 않은 박수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고 모두의 시선은 소리의 근원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모든 갑옷을 벗은 채 검 하나만 허리에 차고 있는 사내가 냉소 어린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느긋하게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우리를 축하해주었다.
“승리를 축하하네. 야만인들이여.”
그 모습이 사뭇 대범해 보이기도 했고 건방져 보였기에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우리를 야만인이라 칭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어차피 죽을 이의 이름을 알아서 무엇하겠나?”
“그래야 자네의 묘비에 이름이라도 새겨줄 것 아닌가?”
내 말에 사내는 실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푸하하하하. 그 말이 맞군. 내가 큰 실례를 했어.”
피가 여기저기 묻고 헤진 옷차림이었지만 그는 옷깃을 여민 뒤 당당한 모습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리보니아 기사단의 단장. 볼퀸 셴크 폰 빈테르슈타인이다. 날 죽일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단장이라. 생각보다 거물이었군. 어중이떠중이에게 죽은 게 아닌가 했는데 이렇게 살아있으니 다행이다.
“나는 니스의 정당한 지배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백작.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다.”
“아, 당신이 그 유명한 하이르 앗 딘 참살자인가? 과연. 대단한 인물이셨군. 그대라면 내 목을 가져갈 자격이 충분하지.”
“날 그렇게 높이 평가해주는 건 고맙지만 자네를 죽이는 건 내가 아닐세.”
나는 내 옆에 있는 하랄 블로탄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이야기했고 볼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마 듣보잡이라 생각해서 그러는 모양인데 나는 서둘러 그를 소개해주었다.
“덴마크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바이킹들의 왕. 하랄 블로탄이 그대를 영면에 들게 해줄 걸세.”
“하, 누군가 했더니 에릭 블러드엑스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자였군. 하지만 자네가 날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군. 내 목숨을 빼앗으려다 그대의 목숨이 찬탈당할지도 모르는데.”
볼퀸이 코웃음 치며 하랄 블로탄을 도발했고 주변에 있던 바이킹들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난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볼퀸. 그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지.”
“항복 제안이라면 거절하지. 이곳에서 내가 죽는다 한들 신께서 나를 심판하실지니 두려울 게 뭐가 있겠나.”
볼퀸은 칼을 뽑아 들어 거부 의사를 밝혔고 바이킹들 역시 도끼를 뽑아 들었다. 그렇게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 들어나 보게. 자네에게도 썩 나쁜 제안은 아닐 거야.”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볼퀸은 얘기해보라는 듯 칼을 내렸고 나는 느긋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자네와 하랄 블로탄이 결투를 벌이는 게 어떤가. 자네가 이긴다면 자네를 살려주는 것은 물론이요 자네의 수하들도 살려주도록 하지.”
“그쪽이 이긴다면?”
“뭐, 원래 하려던 것처럼 깔끔하게 죽는 거지. 딱히 고문하는 취미는 없으니 안심해도 좋네.”
“내게 너무 유리해 보이는 조건인데 혹시 내 귀가 잘못된 건가?”
“천만에. 그대의 용기와 고귀함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하게.”
“배려라… 때로는 이유 없는 배려만큼 두려운 게 없지만 지금의 내가 물불을 가릴 처지는 아니지.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결투가 성사되었고 그걸 옆에서 바라보던 하랄 블로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가 하는 일이니 이유가 있겠지만… 썩 내키진 않는군. 비록 적이라지만 저들을 편히 보내주는 게 명예로운 행동 아닌가?”
아무래도 하랄 블로탄 입장에선 저들을 조리돌림 하는 게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에겐 그래야 할 이유가 있네. 기사단장을 죽이고 이 전쟁을 끝낸 건 나도 아니고, 정의공도 아니며 오직 하랄 블로탄 자네가 되어야 하네.”
“으음, 그건 그렇지만… ….”
“이게 고작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선 판을 크게 벌여야 할 필요가 있어.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자네의 능력을 입증해야 하네. 해방에 도움을 줬다지만 원주민들에겐 자네 역시 저들과 다를 게 없지 않나.”
“…좋아. 자네 뜻대로 하지.”
“상의 없이 결정해서 미안하네.”
“다 날 위한 건데 기분 나쁠 게 뭐가 있나.”
“내 비록 자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반드시 승리해야 하네.”
“당연한 소리! 내 걱정은 접어두고 오딘께 고하게. 발할라에 이교도가 하나 올라갈 거라고.”
바이킹에게 전투는 일상이며 그들은 언제나 승리의 영광에 목말라 있다.
늙어 죽는 것을 수치로 여기며 발할라로 가기 위해 결투로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들에게 싸움에서 패배하거나 도망치는 것은 수치 그 이상의 모욕이었다.
그 때문에 하랄 블로탄은 의욕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운을 빌겠네.”
* * *
볼퀸은 남아있는 병력들에게 무장을 해제할 것을 명했고 나 역시 그들에게 털끝 하나 건들지 말 것을 명령했다.
괜히 이들이 성 내부 여기저기에 틀어박혀 게릴라 형식으로 우릴 괴롭히면 그걸 소탕하는 데만 사나흘은 걸릴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원주민들의 집에 숨어들 텐데 그걸 또 무장한 병력이 들쑤시고 다니면 여론만 안 좋아질 테니 차라리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좋다.
그렇게 교통정리를 끝내자 나는 병력들을 이끌고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까지 살육의 광기와 전투의 흥분에 취해서 몰려있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나는 개중에 말 위에 올라 이 광경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정의공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내 무례한 행동을 사과했다.
“정의공 각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고 일을 진행시켜 죄송합니다.”
“원래 전쟁은 수많은 변수가 일어나는 곳인데 죄송할 게 뭐가 있나. 거기에 이번 작전의 총책임자는 자네가 아닌가?”
마음대로 해보라는 정의공의 말에 나는 병사들을 향해 턱짓했고 이내 두 사람이 결투를 할 경기장이 만들어졌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나는 단상 위에 올라가 목을 가다듬고 소리쳤다.
“라트비안들이여. 나는 신성 로마 제국의 백작.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다.”
“이번에 볼퀸 셴크 폰 빈테르슈타인 기사단장과 덴마크의 왕인 하랄 블로탄 간의 결투에 대한 공증인으로서 이 자리에 섰다.”
“둘은 각자의 신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벌일 것이며 오직 한 명의 승자만이 결투에서 살아남아 모든 영광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뒤로 왜 이 둘이 결투를 하는지, 승리한 자와 패배한 자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바로 결투를 진행했다.
사실 말이 결투지 실상은 하랄 블로탄 띄워주기에 지나지 않기에 굳이 질질 끌어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볼퀸에 대한 여론이 썩 나쁜 건 아니었다. 초대 기사단장인 비노 폰 로어바흐 단장이 워낙 폭정을 펼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유롭게 통치를 한 볼퀸에 대해 우호 여론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초대단장을 향해 쉴드를 쳐 주자면 그는 정복자로서 원주민들의 분노를 억압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폭정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둘의 관계는 말하자면 태종과 세종의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세종의 시대에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태종이 모든 후환거리를 처분해뒀기 때문이 아니던가.
“신이시여. 당신의 종을 긍휼히 여기소서.”
“오딘이시여. 저를 승리의 영광으로 이끄소서.”
뭐, 이랬거나 저랬거나 볼퀸은 처리해야 할 장애물이었기에 나는 결투를 진행시켰고 둘은 각자가 믿는 신에게 기도한 뒤 무기를 뽑아 들고 대치했다.
검과 방패를 쓰는 볼퀸은 방패를 바짝 끌어당겨 검의 활동 반경을 넓힌 뒤 조심스럽게 탐색전을 펼쳤다.
평상시에는 저돌적인 하랄 블로탄 역시 그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았는지 거리를 둔 채 긴 리치를 가진 폴암으로 그를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이내 둘은 탐색전을 그만두고 살벌하게 서로의 무기를 휘두르며 짐승처럼 맞붙었다. 서로가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무기를 휘둘렀고 허공에서 강철과 강철이 맞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번뜩였다.
그렇게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공방을 벌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몸에 생채기가 생기는 건 볼퀸이었다.
그는 이미 늙었으며 며칠이나 계속된 수성을 지휘하느라 지쳐있었다. 그런 그가 하랄 블로탄과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던 건 정신력 하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한계에 달해있었고 결국 그는 뺨 위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왼손에 매고 있던 방패를 풀었다.
“하… 오늘은 죽기에 참 좋은 날이군.”
높이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미소 지은 볼퀸은 양손으로 검을 잡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의 기세가 뒤바뀌자 하랄 블로탄 역시 도끼를 바로 쥐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흐아아압!”
거대한 기합 소리와 함께 볼퀸은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내질렀고 하랄 블로탄 역시 피하지 않고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푸슉!!
단 한 차례의 공방이 끝난 순간 하랄 블로탄의 어깨에서 피가 치솟아 올랐지만, 바닥에 무릎 꿇은 건 볼퀸이었다.
심장을 노리고 찌른 볼퀸의 검은 빗겨나가 하랄 블로탄의 왼쪽 어깨를 찔렀고, 그는 실수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커헉!”
하랄 블로탄의 거대한 도끼가 볼퀸의 갈비뼈를 깨부쉈고 그는 내장과 피를 쏟으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내 패배를 인정하오. 부디, 내 수하들에게 자비를… 쿨럭.”
마지막 헛숨을 들이킨 그는 바닥에 누워 높이 떠 있는 태양을 향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신께서… 나를 부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고개를 떨궜고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결투는 끝이 났고 나는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하랄 블로탄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패배를 인정한다 했지만 내가 볼 때 볼퀸은 일부러 검 끝을 흔들었다. 만약 그가 검의 궤적을 바꾸지 않았다면 하랄 블로탄 역시 치명상을 입었겠지.
그리고 그건 직접 싸운 하랄 블로탄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이 결투 자체가 처음부터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자신들을 괴롭히던 이들의 수장이 죽었다는 사실에 환호했고 하랄 블로탄은 피가 묻은 폴암을 치켜들며 그들의 환호에 응답했다.
“위대한 왕에 걸맞은 위대한 승리로군. 축하하네.”
“위대한 승리라… 난 잘 모르겠군.”
“이랬거나 저랬거나 자네는 승리했네. 대중들이 봤을 땐 그게 전부지.”
“자네 말이 맞아. 지도자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결과로 이야기하는 법이니까.”
“아무튼, 정말 고생했네. 찔린 곳은 좀 괜찮나?”
“가벼운 생채기일 뿐이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비에게 진료를 받아보게. 상처라도 덧났다간 큰일이니까.”
하랄 블로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날 바라보며 큰 목소리로 물었다.
“라그나르! 나는 조만간 내가 잃어버렸던 것들을 전부 되찾을 생각이네. 그때도 지금처럼 날 도와주겠나?”
“물론이지. 나의 형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