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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88화 (88/205)

▣ 088화

“하랄. 오늘 이 성스러운 전쟁이 끝날 텐데 가볍게 연설이나 한 번 하는 게 어떤가?”

“연설? 흠… 자네가 하던 것처럼 말인가?”

“맞아. 이 전쟁을 주도하는 게 자네라는 걸, 휘하의 병력뿐만 아니라 저기서 자네를 지켜보고 있는 정의공과 원주민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켜야 하네.”

내 말에 하랄 블로탄은 주변을 훑어보았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이 백번 옳아. 역시 지혜의 신인 오딘께서 그대를 굽어살피시는 이유가 있었군.”

병사들이야 그저 전쟁에서 이기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그들을 이끄는 군주라면 그 이상을 봐야 한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원주민들은 하랄 블로탄의 휘하로 들어가 그의 통치를 받게 될 텐데 이곳에서 그의 가치를 증명해 제대로 된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

내 의견을 따르긴 했지만, 어쨌건 그의 입으로 원주민들에게 자유를 약속한 만큼 그들이 떠난다고 해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구수가 곧 국력인 시대에, 특히나 이 척박한 북부에서 사람들이 흩어진다는 건 생산력의 감소를 의미했고 이는 하랄 블로탄이 자신의 왕위를 되찾을 기회가 줄어듦을 의미했다.

유비가 중원으로 나아가기 위해 촉에 기반을 다잡고 원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하랄 블로탄 역시 덴마크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이곳을 차지해야 했다.

그를 위해 그는 말 위에 올라 자신을 바라보는 수백, 수천 쌍의 눈동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일어선 라트비아인들이여.”

“본디 이 땅은 그대들의 것이었다. 정확히는 그대의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왔지.”

“허나 지금 이 신성한 곳은 침략자와 약탈자들에게 빼앗겼고 그대들은 침략자들의 밑에서 구차한 삶을 유지해오고 있지.”

“누군가는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삶도 나쁘지 않다고, 그리고 그들의 날카로운 창과 칼 앞에선 어쩔 수 없다고, 반항했던 이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기나 하냐고.”

“허나 라트비안들이여. 그대들의 지금의 삶에 진정으로 만족하는가?”

“침략자들은 그대들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지 않았으며 정당한 재판조차 거치지 않고 그대들을 단죄했다.”

“침략자들은 그대들의 의지를 통제했으며 무리 짓는 걸 금지시켰으며 강철로 무장한 병력들로 그대들을 억압했다.”

“침략자들은 그대들의 동의 없이 막대한 세금을 부여했으며 그대들이 가진 권리를 박탈했다.”

“침략자들은 그대들을 지켜주지 않았으며 인간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여기까지 얘기한 하랄 블로탄은 천천히 원주민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으며 하랄 블로탄은 길잡이처럼 그들의 분노가 향할 방향을 인도해주었다.

“그대들은 이런 게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정녕 이게 사람다운 삶이 맞는가? 그대들의 모든 권리와 권익이 묶인 채 양손과 양발을 잘라버려도 숨만 쉬고 있으니 살아있는 거라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대들은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저들의 탄압을 견뎌왔다. 하지만 그래서 바뀐 게 하나라도 있는가? 오히려 그대들의 삶은 더 피폐해져 갔으며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저들은 신께서도 약속하신 인간의 존엄을 폭력으로 짓이겼으며 군홧발로 짓밟았다.”

“라트비안들이여. 그대들은 참을 만큼 참았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나라. 일어나 싸워라!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해! 그대들이 아닌 그대들의 자식들을 위해 무기를 들어라!”

“그대들의 조상들이 그대들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 타협하지 않고 싸웠던 것처럼 이제는 그대들이 후손들을 위해 그런 용기를 보여줄 차례다!”

“그렇게 피 흘려 얻은 자유는 그 무엇보다 값진 것이며 그대들이 누릴 수 있는 최초이자 최고의 권리가 될 것이다.”

하랄 블로탄의 진심이 담긴 호소에 원주민들은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쩌렁쩌렁 울리던 그의 연설은 성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도 확실하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 고요한 성을 바라보았는데 그 모습이 꼭 폭풍전야와도 같았다. 지금은 평온해 보이는 저 성도 오늘이 지나기 전에 우리의 손에 떨어지겠지.

그사이 물을 마시며 잠깐 숨을 돌린 하랄 블로탄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모습에 가볍게 미소 지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랑스러운 바이킹들이여. 내가 나의 누이에게 배신당하고, 에릭 블러드엑스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우리는 오랜 기간 방랑했다.”

“그 기나긴 방랑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고, 우리의 문화와 유산, 전통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랜 기간 정체됐으며 우리의 생존은 시험받고 있었다.”

“기나긴 암흑의 시간이었다.”

“허나 오딘께선 여전히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고 우리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다.”

“여기 이렇게 오딘의 대전사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지 않던가!? 그가 우리와 함께하고 난 뒤로 우리가 한 번이라도 패배한 적이 있었던가!?”

그가 들고 있던 도끼의 자루로 바닥을 내려치자 수많은 까마귀 떼가 하늘을 날았고 하랄 블로탄은 격정에 가득 찬 목소리로 울부짖듯 소리쳤다.

“보았는가? 오딘께서 우리의 부름과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최근 며칠 동안 계속된 전투로 이쪽이든 저쪽이든 사상자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시체를 노리고 까마귀 떼가 떠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리하게 저 까마귀 떼가 오딘의 전령. 즉, 후긴과 무닌이라 포장했고 이는 꽤 영특한 행위였다.

촉의 제갈량도 단순한 자연현상을 자신이 하늘에 기도함으로써 동남풍을 불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한편 오나라를 설득해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하랄 블로탄도 왕의 자질이 있는 사내였다. 물론 말년에 손권처럼 똥볼을 차긴 했지만, 그거야 내가 보좌해주면 될 일 아니던가.

어쨌든 그의 연설은 이제 절정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과거 바이킹의 명성과 영광이 이곳에서 다시 한번 재현되리니 저들에게 우리의 힘과 분노를 보여주어라.”

“오딘께서 승리와 적들의 피를 원하시나니, 자랑스러운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나를 따르라!”

그 말이 끝나자 바이킹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각자의 무기를 치켜들고 나와 하랄 블로탄, 그리고 오딘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그리고 그 기세가 사그라들기 전에 하랄 블로탄은 최선두에서 까마귀가 새겨진 깃발을 높이 치켜든 채 뿔나팔을 불었다.

부우우우우우우웅!

가슴을 웅장하게 만드는 거대한 뿔나팔 소리가 전장을 뒤흔들자 나는 곧장 병력들을 이끌고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성벽을 올라라! 발할라의 영광이 우릴 기다리나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수천 명의 병력이 공성에 투입되고 사다리와 같은 일반적인 도구부터 공성탑까지 동원되는 걸 보자 적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성안의 건물들까지 부숴서 가져왔는지 조각난 목재와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쏟으며 저항했지만, 바이킹들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광전사가 되어 성벽을 오르고 또 올랐다.

죽기 살기로 성벽을 오르는 바이킹들을 보며 적들도 기를 쓰며 발악했지만 애초에 독기가 잔뜩 올라있는 바이킹들을 막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거기에 최근 며칠 동안 계속된 전투로 워낙 사기가 떨어져 있었기에 첫 수성 때 만큼의 예기는 없었다.

오히려 장대로 사다리를 밀어내고 위에서 창질을 하던 적의 병사가 붙잡혀 낙사하고, 아군 궁병의 지원 사격에 화살 피어싱을 당해 바닥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던 중, 환희와 열기가 가득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나 하랄 블로탄이 성벽 위에 올랐다!”

딱히 로그로 남는 건 아니지만, 이 게임에서 아군의 대장이나 그에 준하는 자가 선두에 서서 아군을 이끄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엄청나게 오른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최초로 성벽 위에 올랐으니 병력들의 사기는 하늘을 뚫을 기세였고 마침내 수많은 병력들이 성벽 위를 점거했다.

물론 성벽 위에 오른다고 끝은 아니었다. 성벽은 어디까지나 작은 틈에 불과하다. 나는 그 틈을 넓히기 위해 도끼를 들고 적들이 잔뜩 몰려있는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쾅!!!

8m를 넘어가는 높이에서 뛰어내리자 엄청난 소음과 함께 먼지가 일었고 나는 적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들고 있던 도끼를 휘두르며 포효했다.

“오딘이시여!!!!! 저를 승리로 이끄소서!”

몸속에 끓어오르는 피가 이성을 마비시켰고 나는 무아지경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가로막는 게 있다면 베어 넘기고, 걸리적거리는 게 있어도 베어 넘겼다.

그렇게 미켈란젤로에 빙의해 손에 닿는 모든 걸 조각내버리고 있을 때 천지가 뒤집어지는 소리와 함께 적을 막아주던 마지막 등불이었던 거대한 성문이 반으로 갈라졌다.

적들은 울타리나 장애물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 노력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빛조차 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폴란드가 자랑하는 윙드 후사르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며 적들을 도륙했다.

활짝 열린 성문과 허물어진 성벽은 더 이상 벽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승리가 가까워졌음을 의미했다.

물론 아직 전투가 끝난 건 아니었다. 통상 성벽이라고 불리는 외성과는 별개로 내성을 공략해야 하니까.

하지만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성 내부를 바라보았고 그곳에선 도망치는 병사들은 농기구와 식칼 따위를 나무 막대기에 이어붙인 이들에게 학살당하고 있었다.

“끝났군.”

내부의 원주민들이 우리에게 호응해주는 이상 더 볼 것도 없었다.

이미 내성에선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으며 우리가 개선군처럼 위풍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수많은 인파가 두 팔 벌려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그간 내부의 원주민들에게 호응할 것을 끊임없이 호소했고 투석기가 완성되자 오늘 공격할 테니 그때에 맞춰서 봉기하라는 편지를 수백 장이나 써서 성 내부로 날린 게 유효하게 작용했다.

물론, 적들도 이 편지를 볼 테지만 애초에 우리의 공격 시기를 알았다고 한들 어떻게 할 방법이 있겠는가? 원래 최고의 작전은 적이 알면서도 걸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적들은 이 정보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성벽을 지키던 병력을 빼서 원주민들을 감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성벽의 방어가 허술해졌고 병력을 나눈 게 악수가 됐는지 시민들의 봉기도 막지 못했다.

안과 밖이 전부 뚫렸으니 성이 함락되는 건 식은 죽 먹기며 우리의 승리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적들이 최후의 항전을 위해 킵(아성)에 틀어박힐 가능성이 있었기에 나는 병력들을 이끌고 곧바로 내성으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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