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7화
그의 외침과 함께 공성이 시작됐고 나는 즉각 말 위에 올랐다. 사실 말을 타고 성벽을 올라갈 순 없는 노릇이니 공성전에서 기병의 역할은 그렇게 크진 않다.
그런데도 말을 탄 건 전장 이곳저곳을 쏘다니면서 버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원래 버프라는 게 그렇다.
플레이어 같은 경우 전장 어디에 있든 병사와 동료들에게 버프가 적용되지만, 대부분의 버프는 시전자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러니 힐데처럼 전투력이 되는 동료가 아니라 이비처럼 비전투형 동료가 버프 써준다고 전쟁터에서 깝죽거리며 돌아다니는 순간 잘못 걸리면 바로 끔살이다.
그러니 동료가 많아지는 후반에는 병력을 이끌거나 직접 싸우기보단 동료들을 데리고 전장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버프를 주는 한편 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게 플레이어의 역할이었다.
말하자면 움직이는 토템인 셈이다.
“이비. 이리와.”
내 부름에 늘 입던 천 옷 대신 어설프게 갑옷을 입고 뒤뚱거리는 이비가 다가왔고 나는 그녀를 내 앞에 태웠다.
순식간에 사람 두 명분의 무게를 감당하게 된 말이 거칠게 투레질을 했지만, 전투를 할 것도 아니고 산책하듯 돌아다닐 테니 크게 무리가 가진 않을 것이다.
“전투는 저쪽에 다 맡기실 생각입니까?”
어느새 사제복 대신 중갑을 걸쳐 입은 힐데가 말 위에 올라 내게 다가왔는데 그녀의 뒤에서 후광이 번쩍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전쟁의 여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정의공이야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잘할 테니 하랄 블로탄을 도와줘야지. 그나저나 그 모습도 꽤 잘 어울리는데?”
“애초에 당신이 골라준 것 아닙니까.”
“내가?”
“예. 제가 교단을 벗어나 당신에게 합류한다고 하니까 맞춰줬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음….”
“제 몸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들어맞는 걸 보고 조금 소름 돋기는 했습니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착용감은 나쁘지 않더군요. 처음으로 당신의 센스에 감탄했습니다.”
아무래도 상황을 보아하니 라그나르가 모종의 이유로 힐데를 교단에 맡겼고 몇 년 지나서 성인이 된 힐데가 라그나르의 용병단에 합류하겠다고 떼를 쓰자 어쩔 수 없이 맞춰준 모양이다.
“그야 난 언제나 널 보고 있거든.”
“자기 입으로 당당히 스토킹을 했다고 자백하는 겁니까?”
“내 애정을 그렇게 왜곡하면 곤란한데.”
“일그러진 애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기에 나중에 울어도 절대 봐주지 않고 끝까지 괴롭혀줄 거라 다짐하며 말을 돌렸다.
“뭐,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은 따라와. 전장에서 한가롭게 만담이나 하고 있을 건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다행히 말 위에 오르는 걸 보니 직접 성벽을 기어오르지는 않을 생각인가 보군요. 탁월한 선택입니다.”
“이번 전투의 주축은 내가 아니라 하랄 블로탄이 되어야 하거든.”
이번 전쟁에서 각자의 목표는 서로 다르다. 우선 폴란드는 자신들의 위쪽에서 걸리적거리는 리보니아 기사단을 처단함과 동시에 영토를 넓히고 싶어 한다.
리보니아 기사단은 자신들의 것을 지키고 싶어 하며 에릭 블러드엑스는 하랄 블로탄을 제거하고 싶어 한다.
하랄 블로탄은 이곳을 발판삼아 자신의 왕위를 되찾길 바라며 나는 하랄 블로탄이 이끄는 덴마크 왕국의 지지와 정의공이 이끄는 폴란드의 지지가 필요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여러모로 평가가 엇갈리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권력은 진짜였고 그런 그의 독주를 막기 위해선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가 사자공을 숙청하기 위해 이미 칼을 뽑아 든 이상 칼리나의 이름을 팔아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그는 칼을 뽑기 전까진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만, 이미 한번 칼을 뽑아 든 이상 그 누가 뭐라고 한들 그 칼에 피를 묻힐 테니까.
그러니 그를 막기 위해선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압도적인 분노조절기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동북부의 폴란드와 북서부의 덴마크, 그리고 남부의 칼리나와 서부의 사자공이 동시에 압박한다면 황제도 원역사처럼 그를 숙청하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하랄 블로탄은 이곳에서 업적과 명성을 얻어야 했다. 의도치 않은 바이킹 키우기를 하게 됐지만 하랄 블로탄 정도면 키워줄 만하다.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그처럼 믿음직한 바이킹은 없을 테니까.
“저기로 가자.”
나는 아군이 밀린다 싶은 곳에 가서 버프를 몰아주었고 그때마다 병력들은 오딘의 이름을 외치며 열정적으로 공성에 임했다.
다만 나는 최대한 병력 손실을 줄이기 위해 사다리를 타거나 성벽을 넘는 행위는 자제시켰으며 폴란드에서 공수해 온 방패와 갑주로 무장시켜 적의 화살로부터 은엄폐를 철저히 했다.
또한, 성벽 위로 몸을 내미는 적들만 골라 투창으로 저격했으며 공성 병기로 성문을 박살 내는 데 집중시켰다.
물론 적들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바위나 불붙은 나무를 던지고 펄펄 끓는 기름을 쏟는 등 발악을 하고 있었지만, 온갖 버프로 떡칠 된 바이킹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거기에 혹여 부상자가 생기면 바로 뒤로 이송시키는 등 나는 병력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하랄 블로탄이 이끄는 병력은 바이킹 계열 최고위 티어인 후스카를이었고 이걸 징집병부터 다시 육성하려면 한세월이었다.
“근데 라그나르. 정예병을 투입한 것치고는 공성의 진행이 너무 지지부진한 것 아닙니까?”
“이 정도면 충분한데 왜?”
“아니요. 당신에게서 엄청난 양의 신성력이 일렁이는 건 바보라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 엄청난 힘을 계속 감당할 수 있습니까?”
물론 힐데의 말대로 약간의 희생을 감수하고 몸으로 들이받는다면 사흘 안에 함락시킬 수 있을 테지만, 그래서야 우리가 입을 피해도 만만찮을 것이다.
우리 쪽이 정예병들을 공성에 투입한 것처럼 적들 역시 중무장한 기사들이 태반이었고, 우리보단 아니지만 나름 피지컬이 되는 이곳의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제압했을 만큼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보스를 사냥할 때 가지고 있는 물약을 1페이즈에 전부 쏟아부을 순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는 짐승을 사냥하듯 천천히 적의 상처와 피로를 누적시키기로 했다.
물론 이 방법은 시간에 쫓기는 우리로서도 모험이나 매한가지였지만, 스웨덴이 적을 붙잡고 있고 아군 함대가 리가만으로 들어오는 입구만 제대로 사수해준다면 잠깐의 여유 정도는 부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둠이 깔리자 과감하게 뿔나팔를 불어 공성을 진행하던 병력들을 퇴각시켰다. 내 퇴각 신호에 하랄 블로탄과 정의공은 그 어떤 의심도 없이 곧장 병력을 물렸다.
오딘의 가호 때문인지 여전히 바이킹들에게선 끊임없이 전투에 대한 열망이 흘려내렸지만, 하랄 블로탄은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솔직히 통제가 될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그의 통솔력이 좋은 모양이다. 이는 나로서도 다행인 일이었는데 기본적으로 버프는 만능이 아니다.
이번 전투 한 번 끝내고 그들을 전부 땅에 묻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휴식을 취하게 해줘야 한다. 애초에 로그에 나온 문구들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며칠 동안 싸울 수 있다고 정말 그렇게 몰아붙인다면 버프가 풀리는 순간 그 반동으로 폐인이 돼버릴 테니까. 거기에 나 역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버프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고생했네. 어디 다친 곳은 없지? 있으면 이비에게 진찰 받고.”
“본격적으로 공성을 한 것도 아닌데 다칠 리가 있겠나? 나보다야 전체적인 흐름을 보며 공성을 조율한 자네가 더 힘들었겠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그래서 병력들의 상태는 어떤가?”
“사망자는커녕 중상자도 없으니 안심하게. 오히려 병사들 태반이 불만을 품고 있을 걸세.”
그야 그렇겠지. 오딘의 가호가 함께하며 명분도 앞서고 전황도 자신들이 훨씬 더 유리한 상황이다. 굳이 더 몰아붙이지 않고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공성을 하는 게 불만스럽겠지.
“다들 이 전투 끝나고 발할라 가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자중시키게.”
“오딘께서 그를 바라신다면 얼마든지.”
뭐, 내가 굳이 더 얘기하지 않아도 바이킹들은 하랄 블로탄이 잘 달래줄 것이다. 추가로 그들을 위로하고 사기를 진작시킬 겸 적당한 양의 술과 고기를 베풀었다.
그들은 내일의 공성전을 위해 먹고 마시며 즐겼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밤에는 밤대로 할 일이 있었는데 원주민들을 이용해서 야간 공성을 진행했다.
사실, 밤에 공격을 하는 행위는 굉장히 숙련된 병사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말이 좋아 야습이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곳에서 어떻게 공격을 감행한단 말인가.
어정쩡하게 공격을 감행하다 아군한테 짓밟혀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거기에 버프를 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무리해봤자 사기만 뚝 떨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직접적으로 성문과 성벽을 타격하는 대신 적들의 멘탈을 부수는 방식을 사용하기로 했다. 싸움이라는 게 직접 칼과 창을 맞대고 싸우는 것만 싸움으로 치는 건 아니잖은가.
원주민들의 숫자가 충분했던 만큼 나는 병력들을 적의 화살이 아슬아슬하게 닿는 범위까지 진군시켜 그들을 도발하며 피로를 누적시켰다.
도발의 요지는 딱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밤새도록 북을 치고 시끄럽게 굴며 잠을 못 자게 만들고 지금 항복하면 살려주지만 성문이 열리는 순간 다 죽을 거라는 등의 협박성 발언을 내뱉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성 내부에 있는 원주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는데 내부에서 성문을 열면 이쪽에서 바로 밀고 들어가 호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불을 환하게 켠 채 기존의 공성 병기보다 훨씬 더 정교하며 효율이 좋은 투석기나 공성탑을 만드는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이런 전술들의 효과는 생각보다 탁월했는데 안 그래도 적은 숫자의 병력으로 적의 공격까지 막아내면서 내부의 불만 세력까지 통제한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평시라면 시민들을 통제하는 게 쉬울 테지만 현실적인 위협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 저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가 있겠는가?
혹여나 불온한 움직임을 보고 강경 진압 한다면 그동안 누르고 눌러온 불만이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적들은 순찰병력의 숫자를 늘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육체적으로 피로를 누적시키는 한편 심리적으로 적들을 압박하며 위축시켰고 그렇게 사흘이 지난 시점에서 나는 최종 공격을 준비했다.
적들이 심리적으로 가장 몰려있는 시점에 총공격을 감행한다면 별다른 저항 없이 성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대규모 전쟁에서 심리적인 요인은 사기와 직결되는 요소였고 전투 의지가 결여된 병력들의 전투력은 형편없었으니까.
거기에 밥도 적당히 뜸을 들여야 한다. 너무 시간을 끌면 에릭 블러드엑스가 도착할지 모른다. 이쪽에서 해안가를 점령하고 있는 만큼 당장 현실적인 위협은 되지 않을지라도 적들에게 희망이라는 불씨를 건네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정의공 각하. 슬슬 수확의 시기가 다가왔으니 총공격을 감행할 생각입니다. 저를 대신해 총지휘를 맡아주십시오.”
“알겠네. 자네도 직접 전장에 나설 생각인가?”
“물론입니다. 솔직히 그동안 여간 좀이 쑤신 게 아니었거든요.”
“하하하, 자네라면 그럴 것 같았네. 오히려 지금까지 참은 게 용하군.”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후방은 내게 맡기고 있는 대로 날뛰고 오게.”
나는 갑옷을 걸쳐 입은 뒤 방패와 도끼를 들고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하랄 블로탄을 향해 걸어갔다. 그 역시 오늘이 마지막 공성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라그나르. 오딘께서 뭐라 하시던가?”
“뭐라 하시긴. 우리의 앞길에는 언제나 승리뿐이라고 하시지.”
말을 마친 나는 다시 한번 기도문을 외웠고 몸속에 끓어오르는 힘을 느끼며 도끼를 움켜쥐었다. 이제, 이 길었던 전쟁을 끝낼 시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