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6화
짧지만 임팩트 있는 연설을 위해 나는 모든 열정을 불태웠고 그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싸울 수 있는 이들 모두가 우리에게 합류했다.
폴란드에서 가져온 물자를 나눠주고 그들을 하랄 블로탄 휘하의 바이킹들에게 배속시킨 뒤 훈련시켰다.
물론 행군을 하면서 이뤄진 약식훈련이었지만, 그들은 침략자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훈련에 임했다.
거기에 도시를 거칠 때마다 공성 경험까지 얻게 됨은 물론 그곳에서도 우리에게 합류하기를 원하는 전사들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가 유르말라를 점령했을 무렵에는 5천에 이르는 대군을 통솔함은 물론 병력들 대부분이 징집병에서 정예 창병, 정예 궁병까지 티어가 올라와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던 스웨덴 역시 간접적으로나마 우리를 돕겠다는 편지를 보내왔기에 이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사실 스웨덴은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협조를 요청해둔 거였는데 의외로 그쪽도 무서운 기세로 커져 나가는 에릭 블러드엑스를 보며 위협을 느낀 모양이었다.
“항상 느끼지만, 라그나르 당신 생각 외로 선동가 기질이 있군요.”
“선동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고 그게 저들의 마음을 울린 거지.”
내 말에 힐데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마음을 울린 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여자 여럿 울리고 다니는 건 봤습니다.”
“흠, 혹시 거기에 너도 포함되어 있나?”
“철딱서니 없는 당신 때문에 속이 터져서 눈물을 훔친 것도 포함되는 겁니까?”
만만치 않게 받아치는 힐데의 모습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랄 블로탄은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웃으며 이야기했다.
“하하, 사제님께선 라그나르 경을 굉장히 아끼시는 듯하오.”
“이게 아끼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애초에 싫으면 말도 안 섞을 것 아니오.”
우문현답이라 했던가. 그의 대답에 힐데는 입을 다물었고 하랄 블로탄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라그나르. 자네에겐 자네를 이렇게 챙겨주는 가족이 있으니 부럽구만.”
“가족이라면 자네도 있지 않나?”
내 말에 그는 여느 때보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생을 죽이려는 누나가 하나 있긴 하지.”
“원래 남매끼리는 죽고 못 사는 관계 아니던가.”
“푸하하핫, 자네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근심이 사라지는 것 같군.”
나는 어느새 그와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졌는데 사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나도 바이킹이고 그도 바이킹이며 둘 다 오딘을 섬긴다. 거기에 내 도움으로 싸웠다 하면 연전연승하고 있으니 당연히 나에 대한 호감도가 하늘을 찌르지 않겠는가.
“난 실제로 자네의 근심을 없애 줄 생각이네.”
“대체 자네가 어디까지 바라보고 있는지 모르겠군. 솔직히 난 리가에서 이길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네. 하지만 자네가 말하는 걸 보고 있자니 이미 리가에서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군.”
“공성전이 시작되는 날, 내가 왜 그렇게 자신하는지 알게 될 걸세.”
“뭐, 자네는 허언을 뱉은 적이 없었지.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겠네.”
그렇게 그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리가에 도착했고 그곳에는 이미 폴란드군이 도착해서 한창 공성 캠프를 만들고 있었다.
다행히 그렇게까지 늦은 건 아닌 모양이다. 폴란드가 훨씬 더 먼 곳에서 출발했는데 우리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면 별로 좋은 생각은 안 들겠지.
그렇게 천천히 캠프 안으로 들어가자 저 멀리서 정의공이 기병을 이끌고 우리에게 다가왔는데 그는 나와 함께 온 대군을 보자마자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라그나르. 혹시 그대는 예수의 환생이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오병이어의 기적도 아니고 어찌 사람이 더 늘었소?”
“례셰크에게 보고 받으셨겠지만, 원주민들을 조금 끌어들였습니다.”
그는 내 말에 뒤를 쓱 훑어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조금이라기에는 내가 끌고 온 병력보다 훨씬 많아 보이오만… 어쩐지 병장기들을 많이 달라고 하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군.”
“리보니아 기사단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찌 제가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뭐, 그것도 그렇지. 아무튼 그대 덕분에 손쉽게 리가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 같소. 그대가 끌고 온 병력까지 합치면 3천이 넘어가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물론 총 병력은 거진 7~8천에 육박하고 있지만 그들 모두가 전투 병력은 아니다. 그 때문에 실제로 싸울 수 있는 병력은 정의공의 말대로 3천 정도로 보는 게 적당했다.
물론 중세시대 동원력을 봤을 때 이것만 해도 엄청 무리한 거다. 실제로 우리가 가져온 식량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고 길어야 채 2주를 못 버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그 안에 성을 함락시켜야 함을 의미했지만 애초에 2주가 넘으면 덴마크의 병사들이 상륙해서 우리의 배후를 치고 있을 것이다.
“공성은 언제부터 시작하실 겁니까?”
“흠… 왕이시여. 그대는 어찌 생각합니까?”
정의공은 하랄 블로탄에게 물었지만 이는 사실상 그가 말하는 대로 하겠다는 얘기였다.
하랄 블로탄과 정의공은 동등한 동맹 관계였고 때문에 이런 행위는 정의공이 하랄 블로탄을 존중하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의 기를 살려주는 행동이었다.
“오늘은 하루 푹 쉬고 내일 새벽부터 공격하도록 하지요. 적들의 방어병력보다 이쪽의 수가 더 많으니 쉬지 않고 계속 몰아치면 적들은 스스로 무너질 겁니다.”
물론, 하랄 블로탄 역시 멍청이가 아니었기에 무난한 대답을 뱉었다.
“탁월한 선택이군요. 좋습니다. 거기에 더해 내부에 있는 원주민들을 뒤흔드는 것도 좋겠군요. 라그나르 백작이 이렇게 수천의 원주민들을 끌고 왔으니 절로 동요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정의공은 수많은 전투를 겪었기 때문인지 상대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요소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은 없었기에 당분간 공성 병기가 완성될 때까지는 지속적인 소모전을 진행하기로 했다.
원래 진정한 공성전은 공성 병기가 완성될 때 시작되는 법이다. 추가로 적들 입장에선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완성되어가는 공성 병기를 보며 피가 말라갈 테고.
* * *
“후우….”
노르웨이의 정당한 왕이자 덴마크의 왕위 찬탈자 에릭 블러드엑스는 넓게 펼쳐져 있는 발트해의 수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인생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게 잘 흘러갔다. 노르웨이의 왕 하랄 호르파게르의 아들로 태어나 모든 형제들 중 가장 큰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거기에 스스로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자신은 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바이킹들을 이끌고 4년이 넘게 원정을 가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고 엄청난 양의 전리품을 가져올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 원정 과정에서 자신의 아내이자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여왕이 된 군힐드를 만났다. 그녀는 피를 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여자였지만, 아름다웠고 현명했으며 자신에게만큼은 헌신적인 여자였다.
그녀의 도움으로 폭군이었던 하랄 블로탄을 쫓아내고 덴마크의 왕좌를 차지했으며, 아버지의 온정에 기대어 영지를 물려받은 무능한 형제들을 단죄했다.
그렇게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는 나날이 켜졌으며 불만 세력은 줄어들었고 곳곳에서는 자신의 선정을 찬양하는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머나먼 동쪽 땅에서 하랄 블로탄이 왕위를 되찾기 위해 칼을 갈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기에 그를 직접 마무리 짓고 동방에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출정을 강행했다.
하지만 항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스웨덴의 왕인 ‘승리왕 에이리크’가 병력을 끌고 와 출병하는 자신의 군대를 가로막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굳이 자신과 싸우려 들지는 않았지만,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자신의 군대를 쫓아왔기에 경계를 하면서 진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이 행동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는 사자를 보내봤지만, 그는 자위 차원에서 움직였다는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물론 에이리크가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추측이 가능했다.
아마 하랄 블로탄과 손을 잡았거나, 자신이 노르웨이와 덴마크까지 영향력을 넓히자 불안해졌거나, 그도 아니면 정말로 자위를 위해서 그랬거나. 이 셋 중에 하나겠지.
하지만 이랬거나 저랬거나 그의 행동 때문에 진군 속도가 느려진 건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원래 도착해야 할 시간보다 2주나 지체되어 있었다.
“국왕 전하. 이제 곧 리가만으로 진입할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 헌데 아무래도 우릴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나 보구만.”
실제로 적의 함대가 해협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에릭은 느슨해졌던 갑옷의 끈을 조이며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어차피 저들은 우리의 발을 붙잡는 게 목적일 테니 공격적으로 나오진 않을 것이다. 한 번의 돌격으로 저들의 포위망을 뚫고 리가만으로 진입한다.”
“전하. 만약 그렇게 되면 추후 되돌아갈 때 이곳에 봉쇄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건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얘기다. 적어도 밖에서 툭툭 때리다 아니다 싶으면 돌아갈 수 있었지만, 안에서는 되돌아갈 곳이 없었으니까.
“어차피 리가가 함락당하면 끝이다. 돌격기 올려.”
자신의 국왕이 두 번 이야기 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걸 알고 있는 부관은 에릭의 말대로 돌격기를 올렸다. 불안함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지만 그의 말대로 리가가 함락당하면 끝이었으니까.
* * *
공격을 시작한 지 나흘 정도 지나자 간단한 공성 병기가 완성됐다.
그전까지는 전초전에 불과했는데 말이 공성이지 전투력이 약한 병력들을 주축으로 가볍게 툭툭 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중간중간 기병도 투입하고 적의 대처가 늘어진다 싶으면 곧장 정예병을 투입해 적들을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병력의 숫자나 공세의 규모가 그렇게 크진 않았다.
허나 공성 병기가 완성된 지금부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에 나는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최정예병들이 최전선에 나섰고 그 최선두에는 나와 하랄 블로탄이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딘께서 그대를 버렸다고 했던가? 오늘 그대는 여전히 오딘께서 우리들을 이끄신다는 걸 알게 될 걸세.”
나는 그가 내게 대꾸하기도 전에 두 자루의 도끼를 들고 앞으로 나서며 오딘에게 기도했다.
“전능하신 오딘이시여. 영원한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거룩하신 지혜로 날 이끄시고 내 가는 길 어둠에 싸여 있어도 신성한 빛으로 내 영혼을 이끄소서.”
내 기도가 끝나는 순간 하늘에서 벼락을 형상화한 창이 내려꽂힘과 동시에 십여 줄의 로그가 휙휙 올라갔다.
― 오딘의 신창 궁그닐의 효과 ‘선전포고’가 발동됩니다.
― 아군의 사기와 투지, 활력이 대폭 상승하며 적군의 사기와 투지가 대폭 감소합니다.
― 바이킹들에게 추가로 베르세크르(Berserkr)의 힘이 부여됩니다. 그들은 먹지도, 쉬지도 않은 채 몇 날 며칠간 오직 승리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 발키리들이 전장에 참전합니다. 모든 전사들은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 승패가 정해지기 전까지 그 누구도 전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 오딘에게 영광을.
그와 함께 내 뒤에 서있던 바이킹들도 버프를 느꼈는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셨다!!!”
“발키리! 발키리들이 하늘을 떠돌고 있어!”
하랄 블로탄 역시 자신의 몸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피를 느꼈는지 격양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이게… 이 힘이 라그나르 그대가 이야기했던 자신감의 근원이었나?”
“그런 셈이지.”
“오딘께선 아직 날 버리지 않으셨군.”
“오딘께서 날 그대에게 보낸 거라고 계속 말하지 않았나. 상식적으로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 먼 곳까지 올 이유가 뭐가 있겠나?”
실상은 아니었지만, 대강 앞뒤는 맞아들어갔고 하랄 블로탄과 그 휘하의 바이킹들에게 오딘의 이름은 잃어버린 자존심과 자신감을 되찾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왕의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당연하지. 내가 그대의 왕위를 되찾는 것을 도와주겠네. 이는 오딘께서 바라시는 일일세.”
“오오… 오딘이시여. 오딘이시여.”
하랄 블로탄은 감격했는지 무릎 꿇은 채 오딘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고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얘기했다.
“오딘께서 그대를 이끄실지니 마침내 자네의 것을 되찾을 시간이 왔네. 이 전투로 자네 스스로를 증명하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하랄 블로탄은 도끼를 치켜든 채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나의 전사들이여! 오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