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5화
하랄 블로탄이 승낙하자 나는 벤츠필스의 내부에 있는 광장으로 가서 모여있는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리보니아 기사단의 일원들을 처형했기 때문인지 광장에 모여있는 군중들은 흥분해 있었다. 연설 전에 처형을 진행한 이유는 간단했는데 먼저 그들에게 우리의 스탠스를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폭력과 피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며 정신을 고양시키기에 사람들을 폭주시키기엔 제격이었다. 다만 연설을 위해 그들을 어느 정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나는 단상 위로 올라가 발을 굴렀다.
쿵!!
가벼운 발구르기였지만 효과는 탁월했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그제야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세미갈리안.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자 지배자들이여.”
“그대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뭘 위해서 이곳에 왔는지 많은 것들이 궁금할 것이다.”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답하기 전에 한 가지 선언하겠다. 우리는 오직 악마와도 같은 리보니아 기사단을 단죄하는 것이 목적이다.”
실제로 저들 입장에서는 리보니아 기사단의 지배를 받다가 갑자기 야만인처럼 생긴 놈들이 우르르 내려오더니 다 조져버린 상황이었다.
그러니 저들이 혼란스러워하기 전에 우리의 주적이 누구인지, 누구에게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지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이미 내 말의 신빙성은 리보니아 기사단과 전투를 함은 물론 포로로 잡은 이들까지 전부 참수시키며 증명됐을 것이다.
“세미갈리안들이여. 신의 사도이자 기사라고 자칭하는 그 악마들은 제멋대로 십자군의 기치를 내세우며 수많은 이들을 학살하고, 잔혹하게 통치했으며, 인간 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그런 자들이 정녕 신을 섬기는 사도란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신의 이름을 파는 그들에게 우리는 보여줄 것이다. 신께서 누구의 편을 들고 계시는지! 누가 신의 의지를 받들고 있는지! 우리는 승리로서 만천하에 보여줄 것이다.”
“허나, 그러기 위해선 그대들의 힘이 필요하다. 적들을, 그대들의 원수를 징벌하는 데 힘을 보태다오. 그대들이 도와준다면, 우리는 그대들을 혈맹의 예우로 대우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결코 그대들에게만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전장에서 언제나 선두에 서 있는 건 내가 될 것이며, 그대들은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나의 뒷모습밖에 보지 못할 것이다!”
“전장에서 처음으로 아군의 피가 흐른다면, 그건 단언컨대 나의 피가 될 것이며, 발할라에 가는 이가 있다면, 내가 최초가 될 것이다.”
나는 여기까지 이야기한 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앞에 나열한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비록 그들은 입고 있는 옷도 빈곤했으며 몸 역시 보잘것없었지만, 눈빛만큼은 살아있었다.
“자랑스러운 세미갈리안들이여. 그대들의 안에 흐르는 용맹함과 분노를 일깨워라. 스스로 자신의 목에 매인 쇠사슬을 끊기 위해 나는 그대들이 그대들의 조상 못지않은 용기를 보여줄 것이라 믿는다!”
“만일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내게 돌을 던져라! 허나 내 말이 옳다고 생각된다면 그대들의 의지를 내게 보여주어라.”
내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질렀고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미 분위기는 충분히 과열됐고 저들은 내 설득에 넘어온 거나 다름없었다.
“또한, 우리는 저 잔악무도한 압제자들과 다르게 그대들에게 자유는 물론이요. 살아갈 땅과 자치권을 보장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진정한 왕인 하랄 블로탄과 폴란드의 대공 카지미에슈 정의공,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백작이자 오딘의 의지를 이은 바이킹인 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이름으로 맹세하겠다.”
나는 이쯤에서 나와 내 옆에 있는 하랄 블로탄의 정체를 밝혔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 폴란드의 대공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백작. 이 타이틀에 고무되지 않을 이가 대체 누가 있을까?
군중들의 열기와 함성은 하늘을 찌를듯했고 나는 목이 터져라 격정적으로 소리쳤다.
“세미갈리안들이여. 자유를 원하는가? 누군가에게 종속된 제한된 자유가 아닌, 완전하고도, 완벽한 자유를 원하는가!?”
“그대들의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강철같은 의지와 의기가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세미갈리안들이여. 일어나서 무기를 들어라. 그리고 맞서 싸워라!”
“과거 기사단의 불합리한 통치에 항거했던 선조들의 의기와 의지를 이어라. 그대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폴란드가! 덴마크가!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이 그대들과 함께할 것이다.”
“그대들은 패배자가 아니다. 그대들이 주저앉아 있던 건 앞으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하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 주저앉은 다리를 스스로 채찍질해 일어서라. 그대들의 분노를, 울분을 저들에게 보여주어라.”
“그리하여 아직도 저들의 압제 속에서 공포에 떨며 신음하고 있는 그대들의 동포들을 구원하라. 구원이란 타인에게서 받는 것이 아닌, 그대들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연설은 안에 담겨있는 내용은 다를지언정 본질은 똑같다. 같은 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청중들을 설득하고 고양시키며 최종적으로 사람을 세뇌하는 것. 그게 연설의 본질이다.
“세미갈리안들이여. 그동안 얼마나 많은 박해와 압제 속에 피눈물을 흘렸던가.”
“오늘, 해방의 날이 도래했다.”
“일어서라! 그리고 무기를 들고 앞으로 진군하라. 우리의 앞에는 오직 승리뿐이다!”
* * *
<라트비아. 옐가바. 폴란드군 주둔지>
그다인스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클라이페타에 상륙해 사흘 만에 그곳을 점령한 폴란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플룽게, 텔샤이, 마제이 카이아이, 시아 울리아이, 그리고 옐가바까지. 이미 그들이 점령하거나 무력화시킨 거점만 해도 대여섯 곳에 달했다.
이는 폴란드군이 수많은 내전과 전쟁을 거치며 병력들이 정예화된 영향도 있었지만, 총사령관이자 폴란드의 대공인 카지미에슈 정의공이 선봉에 서서 미친 듯이 병력을 몰아쳤기 때문이었다.
또한, 정의공과 함께 연합에 참여한 공작들 역시 이번 원정에 긍정적이었다. 물론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정의공의 영향력과 힘이 커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영토가 넓어진다는데 마다할 이가 어디 있겠는가.
거기에 이미 정의공의 정치력과 영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반 정도 독립된 상태였던 포메라니아를 복속시킨 것도 정의공이었고 신성 제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도 정의공이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공작들은 굳이 그와 대적하고 싶지 않았고 그건 정의공의 라이벌인 미에즈코 공작 역시 매한가지였다.
이러한 이유들이 맞물려 폴란드군은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진격에 진격을 거듭한 결과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에 옐가바까지 함락시킬 수 있었다.
“후우, 지치는군.”
앞장서서 병력들을 통솔함은 물론 전투가 끝난 뒤에도 직접 점령지를 안정시키기 위해 뛰어다니다 보니 정의공의 피로는 한계에 달해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버님.”
“고생이랄 게 무에 있느냐. 그나저나 네 형이 따로 보내온 소식은 없더냐?”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라그나르 백작이 투쿰스 공략을 끝냈다고 편지가 도달했습니다.”
콘라드의 말에 정의공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투쿰스라고? 거기가 어디지?”
“리가에서 서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도시입니다.”
대강 리가 근방의 지도를 떠올린 정의공은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얘기했다.
“지금쯤이면 유르말라에 도착해 있을 줄 알았는데?”
자신들은 거진 400km가 넘는 거리를 행군해서 리가의 코앞까지 왔다. 헌데 그 절반밖에 안 되는 거리인 벤츠필스에 상륙한 라그나르가 아직도 유르말라까지 오지 못했다는 건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이는 라그나르가 진군함에 있어 그만큼 많은 저항에 부딫혔고 약속했던 시간에 리가에서 합류하지 못한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아니면 자신이 그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것이었거나.
“추가로 병력들을 뽑아서 그들과 함께 행군하고 있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된 모양입니다.”
“병력을 뽑았다고? 설마 점령지에서 병력을 징발했다는 얘긴가?”
“원주민들을 뽑아서 진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필테네, 쿨디가, 탈시 등 여러 도시에서 수천에 이르는 병력을 뽑았다고 합니다.”
“수천? 농담이겠지?”
“형님께서 이런 일로 농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버지가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거기에 지원자들이 넘쳐나서 1만이 넘을 뻔한 걸 추리고 추려서 수천의 규모라고 합니다.”
그 말에 정의공은 헛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라그나르가 지나칠 정도로 많은 병장기와 물자들을 요구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당연히 예비로 남겨두거나 본인이 꿀꺽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애초부터 그들을 끌어들일 생각이었겠지.
“형님이 보낸 편지의 말미에 적혀있기를 이 편지가 도착할 때쯤이면 유르말라를 점령했을 테니 약속된 시간에 만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합니다.”
“대단한 친구군. 우리도 뒤처지지 않게 서두르도록 하지.”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겁니다.”
말의 앞뒤가 다른 콘라드의 대답에 정의공은 눈살을 찌푸리며 꾸짖듯 이야기했다.
“이번 작전은 각개격파가 목적이고 그를 위해서 제일 중요한 건 시간 아니더냐. 설마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라그나르 백작이 대책을 세워놓았습니다. 여기 스웨덴의 통치자. 승리왕 에이리크가 보낸 편지의 사본입니다.”
콘라드는 공손하게 종이를 건넸고 안의 내용을 확인한 정의공은 헛웃음을 지었다.
“라그나르 그자는 도대체 어디까지 앞을 내다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이걸 외교력이 탁월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간질과 협잡질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어찌 됐건, 아군일 때는 그만큼 든든한 이가 또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은 바꿔 말하면 적으로 돌렸을 때 그만큼 무서운 자가 또 없다는 얘기 아니던가.
* * *
<라트비아. 리가. 리보니아 기사단의 주둔지>
“단장님. 급하게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성경을 읽고 있던 리보니아 기사단의 단장 볼퀸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부른 수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적들이 리가로 진군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디까지 왔지?”
“정의공이 이끄는 폴란드군은 옐가바, 하랄 블로탄이 이끄는 바이킹들은 유르말라까지 왔다고 합니다.”
적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소식에 볼퀸은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후우… 생각보다 빠르군. 덴마크의 지원군은 아직인가?”
“예. 아직까지 소식이 없습니다. 아직 여기에 당도하지 못했거나 벤츠필스와 사아레마섬에서 적들에게 진입을 저지당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미치겠군.”
볼퀸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적들이 자신들의 목을 조여오는 걸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같잖은 야만인들이 자신을 치기 위해 움직인다는 얘기를 듣고 콧방귀를 뀌며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병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정벌했던 원주민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군이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타고난 전사였고 그들에게 합류한 라트비아의 원주민들 역시 질 좋은 무기와 방어구로 무장해 아군을 위협하고 있었다.
거기에 폴란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 근방의 패자였으며 특히 정의공이 이끄는 병사들은 폴란드의 최정예병들이었다.
결국, 위풍당당하게 나갔던 병력들이 참패를 당해서 도망치듯 돌아오는 걸 본 볼퀸은 야전을 벌일 생각을 접고 수성전에 전념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리가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영향력을 상실해야 했으며 수하들의 불안은 가증되었고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으며 내부에서도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사기 한 번 올려보겠다고 지금 와서 야전을 벌이는 건 미친 짓이었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지 않던가?
이곳 리가에서 수성을 하며 덴마크의 원군이 오는 것만 기다리면 저들을 패퇴시키고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불온한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차단하고 병력들이 흔들리지 않게 단속하게.”
“알겠습니다.”
수하가 방문을 나서자 다시 홀로 남은 볼퀸은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예수의 형상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신이시여. 우리를 이 고난에서 구원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