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84화 (84/205)

▣ 084화

뼛속까지 시린 차가운 바닷물이 허리춤까지 오고 질척거리는 모래가 나를 붙잡았지만 나는 아무런 방해물도 없는 것처럼 적들을 향해 뛰어갔다.

그런 내 모습에 힐데는 눈살을 찌푸리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날 따라 배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렇게 나와 힐데가 적진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하랄 블로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도끼를 뽑아 들고 주변에 있는 병력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자랑스러운 나의 전사들이여! 영광스러운 첫 전투를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

나를 따르라!! 적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불을 질러 저들에게 바이킹의 공포를 새겨줄 것이다!!!”

“오딘을 위하여!!”

말을 마친 하랄 블로탄 역시 바다로 뛰어들었고 그런 그의 뒤를 쫓아 수백 명의 바이킹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 * *

“후… 죽겠네 진짜.”

나는 한숨과 함께 도끼를 수납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나무 그루터기에 몸을 기댔다.

바닥에는 내가 만들어 놓은 피 웅덩이들이 자욱했지만, 오랜만에 에인헤랴르의 힘을 써서 그런지 손 하나 까딱하는 게 힘들 정도로 몸이 노곤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라그나르.”

힐데가 내게 물주머니를 건넸고 나는 때마침 갈증이 났기에 바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전투 후에 끓어오르는 몸을 식혀주는 차가운 물 한 모금. 이게 야스지.”

“……뭐라고요?”

내 말에 힐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지만 난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뭐가?”

“……아닙니다. 그보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보다시피. 너는 어때?”

“당신이 그렇게 미친개처럼 앞에서 발작하는데 다칠 리가 있겠습니까. 아까 이븐 시나에게 갔다 왔는데 당신 덕에 사망자는 물론이고 중상자도 없다는군요.”

힐데의 말에 나는 키득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다친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이는 압도적으로 우리가 승리했음을 의미했다.

“잘됐네. 앞에서 용감하게 싸운 보람이 있어.”

“무모와 용맹의 차이도 잊어버릴 정도로 머리를 심하게 다친 겁니까?”

“그래도 넌 내 뒤를 따라와 줬잖아.”

“얘기했잖습니까. 당신을 구하지 못할지언정 절대 당신을 혼자 죽게 두지 않겠다고.”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힐데의 말에 나는 콧망울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내가 받은 감동을 그녀에게 알려주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은 뒤 번쩍 들어 올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힐데에에에!!!!!”

“뭐, 뭐, 뭐 하는 겁니까!?”

그녀가 당황해서 버둥거렸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를 들어 올린 채 무도회라도 온 것마냥 빙글빙글 돌았다.

“미쳤습니까!?”

그녀가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지만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순 없었다.

결국, 그녀는 포기한 얼굴을 한 채 내 손에 자신의 몸을 맡겼고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그녀를 안은 채 비행기를 태운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죽여버릴 겁니다.”

“내가 받은 감동을 표현해주고 싶었어.”

“당신은 감동을 받으면 늘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까?”

“그만큼 내가 감동받았다는 거지. 그리고 예전에도 종종 이렇게 내가 안아주지 않았던가?”

“대체 몇 살 때 얘기를 하는 겁니까!?”

“에이, 그래도 싫지는 않았잖아.”

“시끄럽습니다. 얼굴에 묻은 피나 좀 닦으십시오.”

그녀는 화를 내며 내게 수건을 집어 던졌다. 하지만 수건의 틈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붉어진 귀가 보였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그렇게 힐데와 장난을 치고 있자니 나처럼 피를 흠뻑 뒤집어쓴 하랄 블로탄이 다가와 얘기했다.

“대승을 축하하오. 완벽하고, 충격적이며, 아름다운 승리였소.”

하랄 블로탄의 말대로 우리는 승리했다. 물론 이곳을 지키던 수비병력의 숫자가 채 백 명이 안 됐던 만큼 승리는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우린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물론 이런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건 하랄 블로탄 휘하의 병력에 광전사나 허스칼과 같은 고티어 병종이 다수 분포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적들이 나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보면 작전도, 대책도 없는 돌격에 불과했지만, 그만큼 단순했고 효과는 탁월했다.

적들은 해안가에 다다른 배들을 보고 혹여 동맹이라는 덴마크의 병력이라 생각했었는지 아군 병력들이 해안가에 상륙할 때까지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들이 우리가 적임을 인지했을 땐 이미 늦었고 적들은 제대로 된 방어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분노한 바이킹 군단을 맞이해야 했다.

그렇게 나를 비롯한 병력들이 성안으로 진입한 순간 게임은 끝났다. 수성전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개싸움을 벌이게 되면 기병들이 와도 답이 없다.

그만큼 바이킹의 피지컬은 압도적이었고 그들의 전투력은 공포 그 자체였다.

“나 역시 그대의 승리를 축하하오. 뭐니 뭐니 해도 이번 승리는 ‘우리’가 이룬 쾌거 아니겠소.”

하지만 내 말에 하랄 블로탄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우리라… 과연 몇 명이나 그 말에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려.”

“나는 그저 최선두에서 서서 싸웠을 뿐이요. 그대뿐만 아니라 그대의 휘하에 있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걸 할 배짱과 용기가 있느냐는 다른 문제요. 아무튼, 그대 덕분에 이런 대승을 거둘 수 있었소.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하랄 블로탄은 내게 고개 숙이며 감사를 표했고 나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그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일단 다른 건 모르겠지만 행동하는 걸 보니 나중에 통수 맞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물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고 하지만 명예와 명분을 중시하는 바이킹의 특성상 대놓고 뒤통수를 치기는 힘들 것이다.

애초에 왕위를 찬탈당한 하랄 블로탄이 이렇게 많은 수의 병력들을 끌고 덴마크를 탈출할 수 있던 것도 군힐드와 에릭 블러드엑스에 대한 반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정당한 명분 없이 왕위를 찬탈했기에 군힐드와 에릭에 대한 현지 여론은 최악이었고 그들이 내부를 안정시키자마자 대규모 원정을 감행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승리했지만 계속 승리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구려.”

“이 기세를 탄다면 리가까지 가는 건 문제없을 거요.”

리가가 함락당하면 끝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리보니아 기사단의 단장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전 병력을 리가로 불러모을 것이다.

이는 단 한 번의 결전으로 승패가 갈림을 의미했고 그 때문에 하랄 블로탄이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수성과 공성 중 누가 유리한지는 물어볼 것도 없이 명확했기에.

“리가까지 가는 건 문제없겠지만, 덴마크의 병력이 상륙하기 전에 리가를 함락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요. 우리의 병력은 전투를 겪으며 계속 상할 테고 긴 거리를 행군하며 전투력이 감소하지 않겠소?”

“그대의 의견에 공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격해야 하오. 에릭 블러드엑스가 이곳에 상륙하게 되면 그때는 답도 없이 전쟁이 늘어질 거요.”

맞는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는 임진왜란 때의 일본과 비슷한 형편이었다. 리가 공략에 시간이 잡아먹혀 에릭 블러드엑스와 그 휘하의 바이킹들이 상륙하게 되면 지루한 국지전이 이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다시 돌아가야 할 테고 폴란드 역시 발을 뺄 것이다. 그리고 하랄 블로탄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건 그렇소만….”

“어려울 게 뭐 있소? 우리는 그저 앞으로 나아가면 그만이오.”

장고 끝에 악수 나온다고 했다. 우리의 목표는 리가 공략 단 하나뿐이었고 그를 위해 다른 것들은 포기해야 했다.

“그대의 말이 맞소.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 모양이오.”

“이해하오. 그대는 나 같은 전사 이전에 모두를 이끄는 왕이니까 생각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오.”

“이해해 줘서 고맙소. 그나저나 하나 물어봐도 되겠소?”

“얼마든지.”

“이번 전투 말이오. 우리를 덴마크군으로 속여서 기습을 할 수도 있지 않았소? 이렇게… 음… 다소 위험한 작전을 쓰지 않아도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 해서 하는 말이오.”

내가 대답을 하려 하자 그는 손을 내저으며 빠르게 한마디 덧붙였다.

“아, 혹여 그대의 용맹과 용기를 믿지 못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시오. 그저 이런 작전을 택한 견해를 듣고 싶을 뿐이니까.”

“하하,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내가 생각보다 배포가 크니 그런 걱정은 접어둬도 좋소. 그나저나 이유라… 확실히 그대의 말대로 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야 적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지 못하오.”

“공포… 공포라.”

“그렇소.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찍어누른 뒤 여기에 대한 살이 붙어서 소문이 퍼진다면 적들이 지레 겁을 집어먹지 않겠소?”

특히, 이런 소문은 병력의 사기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데 적에 대한 공포와 사기의 저하로 군대가 무너진 사례는 생각보다 많았다.

임진왜란 당시에 벌어졌던 용인 전투나 여진과 요나라 사이에 벌어졌던 출하점 전투가 사기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실체 없는 소문은 인간의 나약함을 파고들고 허상은 공포를 부추기지. 그러다 결국, 자신의 상상력에 집어삼켜지는 것이오.”

“그대에게 이 전투는 그저 지나가는 단계에 불과했던 모양이군. 그대는 싸우기 전부터 이 전투를 이길 거라 확신했소?”

“물론이오. 이전에 얘기했듯 내게는 오딘이 함께하시니까.”

어차피 전투라고 해봤자 수천 명이 모여서 싸우는 것도 아니다. 에인헤랴르의 힘이 함께하는 한 오합지졸 백 명 따위는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도륙할 수 있다.

“하긴, 그대가 싸우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그래 보이더군. 그나저나 저기 항복한 이들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오?”

“재산을 몰수한 뒤 전부 참수해서 우리에게 반항한 자의 말로를 보여줘야 하오.”

“진심이오? 저들은 우리에게 항복했소.”

하랄 블로탄은 내가 전원 처형이라는 초강수를 두자 꽤 놀란 얼굴로 물었지만 나는 냉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싸울 거 다 싸우고 성문으로 병력이 들어오니 그제서야 항복하는데 이것도 항복으로 쳐야 하오? 우리의 도끼에 피가 묻은 순간, 저들에게 항복이란 선택지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요.”

“으음….”

아무래도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기에 나는 그 이유를 얘기하며 그를 설득하기로 했다. 아직 그는 내 부하가 아니었고 우리는 동등한 동맹이었으니까.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는 리가로 진군할수록 병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소.”

당연히 점령한 곳에는 일부라도 병력을 남겨둬야 한다. 그래야 혹시 모를 후방 차단과 적들의 차단할 수 있으니까.

“거기에 추가로 에릭 블러드엑스가 리가만으로 진입하는 걸 막아야 하니 이곳에 꽤 많은 수의 병력을 주둔시켜야 하지 않겠소?”

“그건 그렇지만, 그건 감내해야 할 부분 아니겠소.”

“맞소. 하지만 그래서는 리가의 공방전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소. 그러니 우리의 승리를 위해서 위해 필요한 건 새로운 동맹이오.”

“새로운 동맹?”

“라트비아의 원주민들. 그들은 우리의 새로운 창과 방패가 되어줄 것이오.”

몽골인들은 잡은 놈들을 고기방패로 썼다지? 여기에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자유와 해방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울 병력들이 넘쳐났다.

“혹시 그를 위해 리보니아 기사단의 일원들을 참수하자고 한 것이오?”

“그렇소. 그들에게 우리의 의지와 각오를 보여줘야 하니까.”

아예 리보니아 기사단 놈들과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줘야 저들도 따를 것이다. 저들 입장에서 우리가 간만 보고 빠졌다간 피의 복수를 당할 테니까.

“그럼 그들에게 뭘 대가로 제시할 생각이오?”

“자유와 땅.”

내 말에 하랄 블로탄은 입을 다물었고 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한마디 덧붙였다.

“내 장담컨대 저들을 받아들여야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후일, 왕위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중세는 머릿수가 곧 국력인 세계다. 아무리 하랄 블로탄 휘하의 바이킹들이 정예병이라지만 그들만으로 에릭 블러드엑스를 몰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으면 왕위를 찬탈당할 일도 없었겠지.

“좋소.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리다.”

하랄 블로탄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거절하면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이다.

“탁월한 선택이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