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3화
나를 환대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졌다. 원역사에 의하면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는 꽤 많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게 약골 이바르와 뱀눈 시구르드다.
이 시구르드의 아들이 덴마크의 전설적인 군주 크누트 1세이며 그 아들이 덴마크의 초대군주인 고름 가믈리다. 그리고 고름의 아들 중 하나가 여기 있는 하랄 블로탄이다.
즉, 족보를 정리해보면 내가 하랄 블로탄의 고조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게 또 게임의 매력 아니겠는가.
그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적당히 그의 말에 대꾸해주었다.
“개의치 마시오. 나 역시 덴마크의 위대한 왕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으니까.”
물론 하랄 블로탄이 왕위를 찬탈당한 지금, 내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시비가 될 수 있었지만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시원시원한 게 마음에 드는구려. 그러고 보니 그대 역시 바이킹이라지요?”
“뭐, 이런저런 이유로 남부까지 내려가기는 했지만, 본인은 바이킹이 맞소. 나는 여전히 오딘을 섬기며 오딘께서도 나를 보우하시지.”
자부심이 섞인 나의 말에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비어있는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나도 한때는 그대처럼 오딘께서 나를 보우한다 생각한 적이 있었소. 그분의 은총과 영광이 함께한다고 믿었지.”
“지금은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오만?”
“종종 오딘께선 날 버리신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오. 누구라도 내 꼴을 보면 그리 생각하지 않겠소?”
뭐, 하랄 블로탄 입장에서는 그럴 법도 하겠지. 왕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이 되었다.
헌데 왕이 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누이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도망치고 또 도망쳐서 이렇게 척박하고 외진 곳으로 오게 되었으니까.
“내 장담하건대 오딘께선 그대를 버리지 않으셨소.”
“어떻게 그리 확신하시오?”
“오딘께서 보우하시는 내가, 지금 이렇게 그대를 만나지 않았소?”
가슴을 탕탕 치며 얘기하는 내 모습에 하랄 블로탄은 멍하니 날 쳐다보더니 이내 방이 떠나가라 폭소했다.
“푸하하하하. 자신감 넘치는구려.”
“이게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는 걸 그대에게 승리로 증명하겠소. 입으로 주절주절 떠드는 것보다 한 번의 결과가 모든 걸 증명해줄 테니.”
내 호언장담에 그는 호기심과 호승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과연, 하이르 앗 딘을 잡았다더니 배짱도 두둑하구려. 그 패기와 자신감을 봐서라도 그대와 동맹을 맺어야겠군.”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일단 정의공 각하께서 그대들에게 내건 조건은 다음과 같소.”
나는 품속에서 정의공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꺼내서 하랄 블로탄에게 내밀었다. 혹시 그도 까막눈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왕을 해먹을 정도라서 그런지 그는 무리 없이 편지를 읽어나갔다.
“다 읽고 난 뒤에 의문이 가거나 궁금한 점은… 아니지, 신뢰를 위해서 내가 직접 하나씩 설명해드리겠소. 그래야 서로 간에 조항을 해석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을 테니.”
일반적으로 서로 하는 말이야 개떡같이 말해도 당사자가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그만이지만 외교문서는 아니다. 개떡같이 적으면 진짜 개떡같은 거고 찰떡같이 적으면 진짜 찰떡같은 거다.
그가 안의 내용을 읽는 동안 나 역시 동일한 조약서를 하나 꺼내 읽으며 안의 내용을 다시 한번 정독했다.
1. 이 조약은 폴란드의 대공 카지미에슈 정의공과 덴마크의 왕 하랄 블로탄 간에 맺어지는 조약이며 폴란드는 신성로마제국의 백작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에게 협약에 관한 전권을 위임한다.
2. 폴란드와 덴마크는 상호 협조하여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과 덴마크의 반란군을 격퇴해야 한다. 여기서 격퇴라 함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지역에서 이들을 온전히 몰아냄을 의미한다.
3. 폴란드는 이를 위하여 덴마크의 왕 하랄 블로탄에게 물자를 추가로 공급해야 하며 공급 시기와 양은 상호 간에 합의해서 정하기로 한다.
4. 덴마크의 반란군과 검의 형제 기사단을 몰아낸 뒤 그들이 통치하던 땅 중 리투아니아 지역은 폴란드가, 리가를 포함한 라트비아 지역과 에스토니아 지역은 덴마크가 다스린다. 정확한 국경은 추후에 합의하기로 한다.
5. 이 조약을 한쪽이 파기하고자 할 때는 파기 6개월 전에 미리 알려야 하며 파기 전에 적대적인 행위는 할 수 없다. 또한, 어쩔 수 없이 협약을 파기한 후에 벌어지는 분쟁은 최대한 외교와 대화를 통해 해결한다.
대강 조약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는데 추가적으로 자잘자잘한 외교적 문구들이 들어가 있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꽤 간단한 조약서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정의공이나 하랄 블로탄이나 이 조약이 일회성임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서로 간에 장기적으로 협력을 도모하려는 게 아니라 일단 급한 불인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과 에릭 블러드엑스가 이끄는 덴마크군을 격퇴하는 게 우선이니까.
그 이후는… 뭐 그때 가서 새로 협약을 하든 전쟁을 하든 본인들이 알아서 할 문제겠지. 정의공 역시 본인이 직접 온 것도 아니고 내가 대리로 왔는데 그 이상의 권한을 주고 싶진 않을 테고.
“내용에 특별히 의문이 가는 점은 없소. 여기에 언급된 추가적인 사항들은 추후에 논의해야겠지만 큰 골자에 대해서는 만족하오.”
그의 대답에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천천히 조약에 대해 하나씩 짚어주었다. 다 아는 얘기라지만 이렇게 말을 해둬야 후환이 없는 것이다.
“1번 조항은 뭐 보이는 그대로요. 이 조약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랄 블로탄 그대와 폴란드의 대공 카지미에슈 정의공간에 맺어지는 계약이오. 그리고 나는 정의공을 대신해서 전권을 가지고 그대와 조약을 맺는 것이고.”
“2번 역시 이 조약을 맺게 된 이유니 따로 더 설명할 건 없고… 3번 조항은 아무래도 이곳 에스토니아가 척박한 땅이고 전쟁을 벌이게 되면 물자가 부족할 테니 폴란드에서 군량과 필요한 물품들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요.”
“구체적인 양은 얼마 정도요? 그래야 나도 휘하의 부족들을 설득할 수 있소.”
“대강 지금 가져온 물자의 2~3배에 달하는 양이 추가로 올 것이오. 이건 가져온 물품의 카탈로그고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따로 청구하시오.”
나는 품에서 서류를 꺼내 그에게 건넸고 그는 꼼꼼히 읽어보더니 턱에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내게 물었다.
“지원도 좋지만, 추가로 우리와 교역을 할 생각은 없소? 질 좋은 모피가 잔뜩 쌓여있는데.”
“그 부분은 내가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소. 편지를 써서 정의공에게 보내면 무슨 대답이 있지 않겠소?”
그 역시 이게 내 권한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4번 조항은 영토 분할인데 대략적인 국경은 다음과 같소.”
나는 지도에 깃펜으로 간단하게 선을 그었고 하랄 블로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의 그에게 더 넓은 영토를 줘봤자 다스리지도 못할 것이다.
아마 미루어 짐작건대 바다를 통해 이동이 가능한 리가만(灣) 근방의 영토가 그가 소화할 수 있는 최대치겠지.
“마지막으로 5번 조항 역시 보는 대로요. 한쪽의 요청에 의해서 파기할 순 있지만 미리 알려야 하며 파기 후에도 최대한 말로써 해결한다는 게 골자지. 단, 리보니아 기사단과 덴마크의 반란군을 이곳에서 완벽히 몰아내기 전까지는 파기할 수 없소.”
“친절한 설명 고맙소.”
“이게 내 일이니 고마워할 건 없소. 그럼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그대도 알겠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소.”
물론 그건 하랄 블로탄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첫날부터 이렇게 날 독대하고 식사 자리에서 일 얘기를 꺼내도 얌전히 듣는 거겠지.
“각개격파를 하자는 얘기군.”
역시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군.
“맞소. 그대도 알겠지만 얼마 전 에릭 블러드엑스가 그의 형제인 올라프와 시구르드를 토벌하고 돌아왔소. 후방도 정리했으니 마지막 남은 후환거리인 그대를 토벌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하겠지.”
“음….”
“어차피 싸울 거라면 각개격파하는 게 낫지 않겠소? 거기에 덴마크에서 이곳까지 오기에는 거리가 꽤 될 테니 많은 양의 식량과 물자를 가지고 오는 건 불가능할 것이오. 당연히 리보니아 기사단에게서 물자를 지원받으려 할 텐데 우리가 먼저 리보니아 기사단을 박살 낸다면 그들의 전투력이 급감하겠지.”
하랄 블로탄은 장고에 빠졌다. 그도 당연히 내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겠지만 혹시 이용만 당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막말로 폴란드가 리보니아 검의 기사단만 조지고 쓱 빠져버리면 그땐 닭 쫓던 개 꼴이 되는 것이다.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지만 모든 건 그대의 의지에 달려있소. 그대 역시 알고 있지 않소? 덴마크가 합류하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며, 그대가 살아생전 왕위를 다시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왕위라는 말이 그를 자극했는지 하랄 블로탄은 술을 들이켜더니 거칠게 내려놓으며 결의에 찬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좋소. 그대의 말대로 해 보리다.”
* * *
하랄 블로탄과 협정을 맺은 뒤로 상황은 빠르게 흘러갔다. 하랄 블로탄은 전군에 동원령을 내렸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바이킹 전사들이 왕의 부름에 호응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수많은 전사들이 탈린으로 모여들었고 그들은 폴란드에서 가져온 질 좋은 방어구와 무기들로 무장했다.
그렇게 공격할 준비를 하는 사이 폴란드가 클라이페타 지역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를 듣자마자 하랄 블로탄은 전군을 동원해 출진했다.
우리의 목표는 명확했는데 리보니아의 시선이 폴란드에 쏠려있는 동안 라트비아의 벤츠필스를 점령해서 리가만으로 진입하는 입구를 틀어막는 것이었다.
이미 사아레마섬은 하랄 블로탄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에 벤츠필스만 점령하면 리가만으로 진입하는 것도, 나오는 것도 차단할 수 있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작전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하랄 블로탄이 북부에서 내려오고 폴란드가 남부에서 올라와서 입구를 막아서 고립시키는 게 이번 작전의 요지였다,
그렇기에 이 작전에는 신속성이 요구되었고 나와 하랄 블로탄은 출정한 지 채 사흘도 안 돼서 벤츠필스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렇게 벤츠필스가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자 하랄 블로탄은 긴장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라그나르 백작. 그대가 지난번에 얘기했던 것 말이오. 그거 아직도 유효하오?”
“어떤 걸 말하는 거요?”
농담이 아니라 근 며칠간은 작전을 세운다고 자는 시간 빼고 하랄 블로탄과 붙어 다녔다. 그러니 저렇게 얘기한들 내가 알아들을 리가 있나.
“그 왜, 오딘께서 그대를 보우하신다는 얘기 말이오.”
“아! 물론이오. 그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증거를 보여줄 수 있소.”
“증거? 뭐, 오딘의 은총을 받아 혼자서 저기를 다 쓸어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오?”
그는 그저 가벼운 농담으로 얘기했겠지만 나는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벤츠필스가 중요한 거점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큰 도시도 아니고 방어병력도 기껏해야 백 명 안팎일 테니 그 정도는 충분히 혼자서 정리할 자신이 있다.
물론 홀로 백 명을 상대한다는 건 남들이 볼 때 미친 짓이겠지만, 전쟁에서 첫 승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나 현대처럼 체계적으로 전투가 이뤄지는 게 아닌 이상 전쟁은 결국 기세 싸움이었다. 그 때문에 규모가 크든 작든 첫 전투의 승패 여부는 병사들의 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리보니아 기사단은 강압적으로 통치하며 원주민들을 억압하고 있으니 이쪽에서 압도적인 격차를 보여준다면 라트비아인들도 우리에 호응해서 들고 일어날 것이다.
거기에 하랄 블로탄 휘하의 병력 구성원 태반이 바이킹이었던 만큼 나는 이들의 눈앞에서 오딘의 기적을 직접 보여줄 생각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종교라는 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통찰력이 대단하시구려. 어떻게 내가 하려는 걸 딱 맞추셨소?”
“… 진심이오?”
“나는 언제나 진심이었소. 힐데!”
내 말에 그녀는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내게 수많은 버프를 걸어주었고 나 역시 기도문을 외우며 에인헤랴르의 힘을 끌어올렸다.
“내 도끼날은 빛나고 자루를 쥔 손은 적에게 심판을 내린다.”
“기꺼이 적에게 복수하고 피에는 피로써 되갚으니.”
“오딘이시여. 나를 승리의 영광으로 이끄소서.”
― 오딘이 이 영광스러운 전투를 주시합니다.
― 에인헤랴르의 힘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 당신에게서 넘쳐흐르는 힘은 당신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는 바이킹들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 이교도들에게 바이킹의 힘을 보여주십시오.
오랜만에 느껴지는 활력과 고양감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도끼와 방패를 꺼내 들었다. 이 묵직하고도 서늘한 감각. 대체 얼마 만이던가.
“오딘을 위하여!!!!”
그 말과 함께 나는 괴성을 내지르며 바다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