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2화
“발트해는 생각보다 잔잔해서 좋군.”
지금이야 메인 퀘스트를 깨기 위해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지만 이 게임의 자유도는 상상을 초월했고 전투가 컨텐츠의 일부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전투만 하는 게 질리면 상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도 했고, 농민 반란군 지도자의 삶을 살기도 했으며, 도적이 되어 영주와 왕의 영지를 털어먹기도 했다. 물론, 잡히면 교수형이었지만.
이런 색다른 플레이를 할 때 기억에 남는 게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탐험가였다.
나만의 선단을 꾸려서 세계 일주를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바다를 누비다가 선상 반란이 일어나 무인도에 버려지거나 꽁꽁 묶여서 바다에 가라앉은 적도 있었다.
반면 내가 반란을 일으켜 선장을 참수하고 해적이 되어 해군과 상선을 털어먹은 적도 있었다.
아무튼, 탐험가로 플레이할 때 신성 제국의 명을 받아 북극 루트를 뚫은 적이 있었는데 농담이 아니라 정신 나가는 줄 알았다.
물론 이 시대의 기술로 북극항로 탐험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게임이지 않던가. 하지만 항로 자체는 게임인 걸 감안하고서라도 최악이었다.
특히나 베링해협을 뚫을 때는 와 이렇게 죽는구나 싶기도 했는데 그때에 비하면 발트해는 평화와 평온 그 자체였다.
물론, 이비에게는 바다 자체가 힘든 모양인지 그녀는 오늘도 난간을 부여잡은 채 구슬프게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배멀미도 심한 친구가 떠돌이 생활은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
“대부분은 잔잔한 편입니다. 혹시 발트해의 물은 짜지 않다는 것 알고 계십니까?”
그런 내 감상에 대꾸한 건 정의공이 붙여준 례셰크였다. 황제도 그렇고 정의공도 그렇고 왜 이리 자기 아들들을 내게 붙이려는 건지 모르겠다.
뭐, 자기 딴에는 배신할 의도가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보여주는 처사라고 생각하는 모양인 것 같은데….
솔직히 내 입장에선 례셰크를 상처 하나 없이 고이 돌려보내 줘야 하기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물론 나는 고인물답게 그런 속내를 숨긴 채 대답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바닷물이 짜지 않다고? 자네 농담이 심하군.”
“하하하, 처음 제 반응과 똑같으시군요. 한번 드셔보시겠습니까?”
례셰크는 난간에 기대서 물을 뜬 뒤 내게 건넸고 나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물을 들이켰다.
물론 그 표정과는 별도로 나는 발트해 북부의 물이 짜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이 게임을 하면서 내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단 한 곳도 없었으니까.
원리는 간단했는데 이곳 발트해는 전체적으로 바다의 깊이가 얕은 데다 주변 육지에서 꽤 많은 양의 담수가 흘러들어 오기 때문이었다.
원래 강 하류 부분과 바다의 초입 부분도 이와 비슷하지 않던가. 그게 발트해에서는 영역이 좀 더 넓어졌다고 보면 된다.
단적으로 얘기해서 발트해의 북동부는 생리식염수보다 염도가 더 낮을 정도니 정 마실 물이 없을 때는 바닷물을 퍼마셔도 된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직접 발트해의 물을 떠 마시는 건 처음이었고 이미 알고 있더라도 례셰크가 일부러 내게 얘기해줬는데 굳이 초 칠 일은 없지 않은가.
해서 나는 기대 반, 흥분 반으로 그가 건넨 물을 들이켰고 예상대로 물은 짜지 않았다. 식수로 쓰기에는 조금 묘한 맛이 났지만 말이다.
“허어, 정말 짜지 않군. 호숫물이라고 해도 믿겠어.”
“뭐, 그렇다고 해도 바닷물이니 계속 마시는 건 좋지 않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그나저나 례셰크 자네는 날 따라와도 상관없나?”
“물론입니다. 실은 제가 아버지께 라그나르 백작님을 따라가고 싶다고 청을 드렸습니다.”
“굳이 나 같은 야만인을 따라다니겠다니 자네도 참 희한하군.”
“전 라그나르 경에게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지금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위험한 곳에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거네. 가다가 재수 없으면 하랄 블로탄이라는 야만인과 싸우게 될지도 모르고, 배가 좌초해서 리보니아 기사단과 싸우게 될지도 모르고, 매서운 추위에 동상이 걸릴지도 모르지.”
“그렇게 해서 죽는다면, 저는 딱 거기까지인 거겠죠.”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례셰크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긴, 저런 성격이니까 젊은 나이에 대공에 오를 수 있던 거겠지. 그런 만큼 조심성도 없었기에 암살을 당한 것일 테고.
뭐 나로서는 나쁘지 않다. 례셰크의 합류로 인해 정의공이 거대한 배 두 척과 호위병을 50명이나 붙여줬으니까.
“자네가 그게 편하다면 좋을 대로 하게. 대신 자네의 몸은 자네 스스로 지켜야 하네.”
“물론입니다.”
례셰크와의 대화를 끝마친 나는 이비를 간호하고 있는 힐데에게 다가갔다. 이비는 한 번 뱃속을 게워내고 나더니 안색이 한결 나아져 있었는데 그래도 모양새를 보니 한동안은 계속 누워있어야 할 것 같다.
나는 바람이나 쐬자면서 힐데를 밖으로 이끌었고 그녀는 얌전히 나를 따라왔다. 마시던 와인을 건네자 그녀는 군말 않고 들이켰고 나는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물었다.
“고생했어. 이제 도착할 때까지는 내가 이비를 돌볼게.”
“괜찮습니다. 사람 간호하는 건 맨날 용병일 하러 나갔다가 다쳐서 돌아오는 당신 때문에 질리도록 해봤으니까요.”
“칭찬이야?”
“이게 칭찬으로 들리십니까?”
“칭찬일 수도 있지. 그나저나 내가 다치면 힐데 네가 보살펴 주는 거야? 그건 좀 끌리는데?”
내가 팔짱을 낀 채 나쁘지 않다는 듯 이야기하자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미친 거 아닙니까?”
“농담이야. 나라고 다치는 게 좋을 리가 없잖아.”
“별로 재미있는 농담은 아니군요. 그보다 황제의 허락도 없이 정의공을 도와줘도 괜찮겠습니까? 성격상 분명 찡찡거릴 것 같은데요.”
“어차피 황제도 알면서 날 보냈을걸? 상식적으로 정의공이 내 얼굴만 보자고 부를 리가 없잖아. 황제라고 그걸 몰랐을 리도 없고.”
“딴에는 또 그렇군요.”
“거기에 이건 내가 정의공의 부탁을 개인적으로 들어준 셈이니 황제가 뭐라 할 것도 아니지.”
그 순간 갑자기 파도가 심하게 치며 배가 흔들렸고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갑판을 덮쳤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앞에 있는 힐데를 끌어안으며 물을 막아주었는데 덕분에 나는 쫄딱 젖은 생쥐 꼴이 되어야 했다.
“아… 이런 젠장.”
아까 발트해는 잔잔해서 좋다고 했었는데 그게 문제였나? 굳이 이런 식으로 복선 회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는 서둘러 옷을 벗어서 한 번 털어낸 뒤 다시 입으려다 눈앞의 힐데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꽤 젖어있었고 그 사실이 불쾌한지 얼굴이 반쯤 일그러져 있었다.
거기에 바람까지 세차게 불자 힐데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고 나는 벗었던 외투를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물론 그녀에게선 감사의 인사 대신 신랄한 매도가 돌아왔다.
“뭡니까 이건? 이런 시대착오적인 행동으로 여자를 꼬시는 겁니까?”
“뭐?”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솔직히 좋은 점수는 못 줄 것 같군요. 당신의 체취가 잔뜩 새겨진 외투를 건네받고 기뻐할 여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음….”
“아시겠습니까? 라그나르. 이런 건 당신과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저나 이해해줄 법한 행동입니다. 장담하건대 다른 여자들이었다면 기겁하며 도망쳤을 겁니다.”
“그래? 만약 칼리나나 이비가 나한테 외투 벗어줬으면 바로 코 박았을 것 같은데.”
내가 유들유들하게 대꾸하자 그녀는 부들부들 떨더니 빽 하고 소리 질렀다.
“이… 이…… 미치셨습니까!?”
“으흐흐, 오랜만에 매도 받으니까 기분이 색다른데?”
내가 힐데를 화나게 만들었다! 나는 힐데의 감정을 조종할 수 있다! 와!
“최근에 조금 바뀌었다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그런 변태 같은 모습은 변하지 않는군요.”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가 없잖아.”
나 같은 경우는 아예 다른 사람이기는 하지만 묘하게 라그나르와 나는 잘 맞는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거진 라그나르에 동화됐든가.
“아무튼, 들어가자. 너나 나나 젖었기도 하고 바닷바람은 오래 쐐서 좋을 것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선실로 들어가며 힐데에게 건네줬던 외투를 다시 돌려받으려는데 그녀는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힐데?”
“나중에 빨아서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얘기한 그녀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내 냄새가 그렇게 심한가?”
나름대로 홀아비 냄새 안 나게 자주 씻고 관리도 철저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괜히 우울해지네.
* * *
그렇게 북쪽으로 항해한 지 약 2주 정도 지나자 목표했던 도시인 탈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래는 1주일이면 갈 거리였지만 야간에는 항해를 멈추고 정박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밤에 길을 찾는 건 힘든 일이었고 자칫 잘못해서 리보니아 기사단의 세력권으로 가서 나포당하기라도 하면 진짜 좆되는 거니까.
중간 기항지인 고틀란드에서 식수와 음식들을 보충하고 탈린에 도착하니 항구에는 하랄 블로탄을 위시한 바이킹들이 서 있었다.
나는 그중에 가장 선두에 서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는 사내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무장도 풀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내 모습에 그의 주변에 있는 이들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하랄 블로탄은 그들을 제지하며 나와 똑같이 걸어 나왔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마주 보게 되자 나는 오른손을 내밀며 그에게 먼저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소. 덴마크의 왕이여.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요.”
지나치게 굽힐 필요는 없다. 나 역시 신성 제국의 백작이며 칼리나의 심복이자 정의공의 부탁을 받은 특사다. 무례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적당히 예의만 차리면 된다는 거다.
“나 역시 위명이 자자한 그대를 만나게 되어 반갑소. 하랄 블로탄이오.”
난 그와 가볍게 악수를 하며 통성명을 했고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와 함께 온 이들을 둘러보며 이야기했다.
“오늘, 귀하신 분들이 온다고 하여 부족하지만, 식사 자리를 마련했소. 부디 다들 참석해주어 그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라겠소.”
나쁘지 않은, 아니 오히려 아주 좋은 선택이다. 원래 어색한 첫 만남에서는 먹고 마시며 친해지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괜히 대학에서 MT 가거나 기업에서 OT 가면 팀 게임을 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얘기 나누게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공감대를 쌓아가며 그 안에서 공통의 관심사를 쌓고 친해져 가는 것이다.
그리고 중세시대에 사람끼리 친해지는 데는 술만 한 게 없다. 물론, 적당히 마신다는 전제하에서 통하는 얘기지만 말이다.
“배려에 감사드리오.”
하랄 블로탄의 말에 반색을 표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긴 시간 동안 항해를 하느라 지쳐있었고 배 위에서는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제한되기에 그의 제안은 빛과 소금 그 자체였다.
그렇게 각자의 급에 맞게 회식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나는 특별하게 하랄 블로탄의 초대를 받아서 독대를 하게 되었다.
그는 정의공의 아들인 례셰크가 아니라 오직 나만을 초대했는데 이는 그가 나를 총책임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내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어서 오시오. 라그나르 백작. 내 그대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초대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