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0화
“아, 이 친구에 대해선 잘 모르시겠군요. 하랄 블로탄은 덴마크의 왕이었는데….”
례셰크가 뭐라 뭐라 얘기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젠장. 왜 죽자고 찾아도 못 찾나 했더니 변방 중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에 기어들어 와 있었으니 당연히 못 찾을 수밖에 없지.
“대강 자네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알았네. 그래서 결론이 뭔가?”
“저희 폴란드는 다시 북방으로 뻗어 나갈 준비가 끝났습니다.”
“겸사겸사 은혜를 원수로 갚는 미개한 기사단 놈들도 징벌하고?”
“정확합니다.”
“말하는 걸 보니 내가 함께해줬으면 하는 눈치군.”
내 말에 례셰크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만 이와 관련돼서 자세한 얘기는 아버지께 직접 들으시면 됩니다. 제가 대공의 아들이라지만 각하께 약속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러지.”
어차피 례셰크와 대화를 한 건 수박 겉핥기로라도 대략적인 정세를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데다 하랄 블로탄의 행적도 찾았으니 이곳에 온 목표치를 초과 달성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정의공의 제안은 생각해볼 만한 일이었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폴란드 대공의 호의를 사둘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었으니까.
* * *
“라그나르 백작. 날 도와주시겠소?”
처음 마주한 정의공은 탐색전 따위는 하지 않는 화끈한 사내였다. 실제로 그는 매우 남자답게 생겼는데 성격 역시 얼굴 못지않게 시원시원했다.
“갑자기 그리 말하니 당황스럽군요.”
“당황스러울 게 무에 있소. 이곳에 오는 동안 례셰크에게 설명을 듣지 못했소?”
“듣기는 했지만 자세한 얘기는 대공 전하께 들으라고 하더군요.”
“흠… 뭐가 듣고 싶소?”
제시를 했더니 역제시를 하는 정의공의 태도에 나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대범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의공 각하. 정확히 제가 뭘 해주길 바라십니까?”
“하랄 블로탄을 설득해주시오.”
“하랄 블로탄이라….”
내가 말꼬리를 늘리자 정의공은 내가 하랄 블로탄에 대해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인적사항을 읊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소. 그대는 잘 모르겠지만 하랄 블로탄은 원래 덴마크의 왕이었소. 다만 그 왕위를 자신의 누이인 군힐드 코눙가모디르와 그녀의 남편이자 노르웨이의 왕인 에릭 블러드액스에게 찬탈당했지.”
“노르웨이 왕의 통치를 덴마크에서 받아들였습니까? 야를(Jarl)들이 빙다리 핫바지도 아니고 그걸 보고만 있을 리가 없을 텐데요.”
“군힐드가 뒷공작을 했다더군. 하랄 블로탄 입장에선 통수를 맞은 거지.”
내가 아는 역사랑은 좀 다르긴 한데 여기서는 이런 설정인가 보군. 하긴, 군힐드는 원래 역사에서도 잔인함의 대명사이자 희대의 쌍년으로 나오긴 했지.
“근데 말씀하시는 걸 보니 용케 살아남았나 보군요. 실각된 뒤 자신의 추종자를 데리고 이곳으로 도망친 겁니까?”
“그렇소. 정확히는 탈린에 자리 잡았지.”
탈린이라… 애초에 북유럽 자체가 추운 곳인데 개중에서도 에스토니아는 핀란드 바로 아래에 있을 정도로 최북단에 위치했기에 지리적으로 썩 좋은 곳은 아니었다.
사람이 살기 좋냐 아니냐는 그곳에 상주하는 인구수로 판단할 수 있는데 에스토니아는 현대 기준으로 남한의 반 정도 되는 크기지만, 인구수는 130만밖에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도망쳤군요.”
에스토니아는 기본적으로 삼림이 울창해서 도시를 이루기에도 좋지 않고 교통은 쓰레기에 한여름에도 15도 안팎의 추운 날씨를 기록할 정도다.
현대는 온갖 방한용품과 난방장치라도 있지 중세시대는 방한구의 질도 좋지 않고 난방장치라고 해봐야 난로가 전부였기에 에스토니아는 사람이 살아가기에 가혹한 땅이었다.
“군힐드와 에릭은 하랄 블로탄을 추적하려 했지만, 왕위 찬탈로 덴마크 내부가 어수선한 데다 원정대를 꾸릴만한 여력은 없었기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소.”
“그곳이 워낙 척박해서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겠군요.”
“정확하오.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지.”
“덴마크가 안정됐으니 후환이 될 수 있는 하랄 블로탄을 죽이려는 겁니까? 하긴, 둘의 입장에서 하랄 블로탄은 앓던 이처럼 거슬렸겠군요.”
“그렇소. 그런 의미에서 덴마크에게 리보니아 기사단은 매력적인 동맹 상대지.”
뭐, 그야 그렇겠지. 일단 덴마크는 그들에게 물자 지원을 받을 수 있고 항구와 같은 기반 시설들을 빌릴 수 있다.
반대로 리보니아 기사단은 더 넓은 땅을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요. 노르웨이, 덴마크와 손을 잡아 북부를 점령하면 폴란드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처럼 그림으로 그린 듯한 윈―윈 관계가 또 어디 있을까. 물론 당사자인 폴란드는 배알이 꼴릴 테고 하랄 블로탄은 피가 거꾸로 솟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둘의 연합이 폴란드에 좋아 보이진 않는군요.”
“그래서 그대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것이오. 사실 폴란드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귀하의 황제 폐하께서 날 너무 보고 싶어 하셔서 말이오.”
뼈가 담긴 말이었지만 난 오히려 웃으면서 농담으로 받아쳤다. 어차피 내가 황제파도 아니고 그가 욕을 먹든 말든 무슨 상관이던가.
“저희 폐하께서 집착이 심하긴 하시지요. 정의공 각하의 얼굴을 보자고 이 먼 크라쿠프까지 오려고 하셨으니.”
“푸하하하, 그건 꽤 재밌는 농담이구려.”
키득거리며 웃던 정의공은 그의 화끈한 성격을 대변하듯 눈앞에 놓인 보드카를 단숨에 들이켠 뒤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뭐, 병신같은 황제 얘기는 이쯤하고… 라그나르 백작.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이오? 날 도와주시겠소?”
“그 전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동맹이라는 중대한 일을 타국의 귀족인 제게 맡기는 건 이 동맹 자체가 각하에게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까?”
내 물음에 정의공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내가 그대에게 이를 부탁하는 건 그대가 하랄 블로탄과 같은 바이킹이라서기도 하지만 기독교도인 내가 이교도인 바이킹들과 직접 동맹을 맺게 되면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오.”
“헌데 하랄 블로탄 입장에선 폴란드 역시 리보니아 기사단을 끌어들인 원흉이 아닙니까? 협력하려 하겠습니까?”
“글쎄… 지금 당장은 하랄 블로탄이 리보니아 기사단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은 것도 없지 않소? 설사 피해를 받았다고 해도 하랄 블로탄이 도망쳐 오기 전일 테고.”
뭐, 그건 그렇지. 리보니아의 거점은 라트비아의 리가 지역이며 하랄 블로탄은 에스토니아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적의 적은 친구라 하지 않소? 그래도 한 나라의 왕까지 했던 자이니 그 정도 사리 분별은 할 거라 믿소.”
“좋습니다. 허면 그들에게 동맹의 대가로 무엇을 건네줄 생각이십니까?”
내 물음에 정의공은 지도를 펼치며 손으로 선을 쭉 그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리투아니아 지역이오. 에스토니아와 리가를 비롯한 리트비아 지역은 하랄 블로탄에게 양도할 용의가 있소.”
“꽤 통 크게 양보하시는군요.”
“그 정도는 돼야 그들을 움직일 수 있지 않겠소? 애초에 그쪽 땅을 얻는다고 해도 우리의 행정력이 닿을지도 의문이고.”
확실히 그 정도 조건이라면 하랄 블로탄을 설득할 자신이 있다. 그 역시 에스토니아에 계속 처박혀 있어봤자 서서히 말라 죽어 간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덴마크와 리보니아 기사단이 손을 잡은 걸 안 이상 하랄 블로탄 역시 동맹이 필요했고 폴란드는 나쁘지 않은 동맹이었다.
다만 문제는 나였다. 내가 하랄 블로탄을 돕게 돼서 얻게 될 이득이 뭘까?
원래 내가 그를 내 수하로 받아들이려 했던 건 그의 도움을 받아 덴마크에 바이킹 왕국을 세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변했으니 그건 불가능했다. 적법한 덴마크의 왕이 눈앞에 있는데 정통성도, 명분도 없는 내가 덴마크의 왕이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 상황은 북부에서 바이킹 왕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내게 별로 끌리는 전개는 아니었지만, 역으로 뒤집어서 생각해볼 가치는 있었다.
차라리 하랄 블로탄이 왕위를 되찾는 걸 도와주고 추후 그의 지원을 바탕으로 노르웨이로 진군하거나 원역사대로 영국을 침공하는 게 어떨까?
“제가 각하를 도와드린다면 받게 될 대가는 뭡니까?”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화끈하게 백지수표를 제시하는 정의공의 말에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추후 북부로 올라오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폴란드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스웨덴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알 수 없는데 나름 강대국인 폴란드와 적대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거기에 최근 포메라니아 지역까지 먹은 만큼 폴란드가 발트해에서 끼치는 영향을 무시할 순 없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눈앞의 사내에게 백지수표에 대한 확답을 받기로 했다.
“좋습니다. 정의공 각하께서 이토록 절 믿고 부탁하시는데 응당 들어드려야지요.”
“화끈하시군. 그대라면 그렇게 얘기할 거라 믿고 있었소.”
“다만 이에 대한 대가로 저와 동맹을 맺어 주십시오.”
폴란드와의 동맹은 내게 여러모로 이득이다. 일단 북부에서 무역을 할 때 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추후 북방 원정을 할 때 군사적인 도움까지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폴란드의 지원만 있다면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병력을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물론 지형상 기병들이 활약하기는 힘들겠지만 폴란드의 저력은 기병에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후방에서 폴란드가 군사를 일으켜 무력시위만 해도 프리드리히 입장에선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닐 것이다.
“제국도 아니고 칼리나 변경백도 아니고 그대 개인과 동맹이라… 혹여 그대는 그대의 황제에게 칼이라도 들이밀 생각이오?”
“황제가 절 죽이려 한다면 그러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도발하듯 얘기했다.
“추후에는 할 거라는 얘기처럼 들리는구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처음에 구상했던 계획과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차라리 폴란드의 도움을 받아 하랄 블로탄과 함께 북부를 통일한 뒤 그의 지원을 바탕으로 영국을 침공하는 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
명분? 어차피 영국 자체가 개판인데 무슨 명분이 필요할까? 앵글로 색슨이 켈트족을 쫓아냈으며, 그들 역시 정복왕 윌리엄에 의해 정복당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바이킹인 내가 영국을 침공한들 누가 뭐라 할까? 오히려 프랑스는 자신들의 영토가 아니라 영국으로 가줘서 고맙다고 절을 할 것이다.
물론 현재 잉글랜드의 왕으로 있는 사자심왕 리처드가 무섭긴 하지만,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결지왕 존은 희대의 암군이니 신경 쓸 것도 없다.
무엇보다 내게 주어진 시간 역시 충분했다. 힐데에게 보고받았던 문서를 확인해봤을 때 사자공이 숙청되려면 적어도 1년은 필요해 보였다. 반년 정도라면 도와줘도 충분하겠지.
“…그대는 그 칼끝을 폴란드로 돌리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소?”
“천공신 오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이를 어긴다면 제 영혼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며 발할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거침없는 대답에 잠시 내 눈을 바라보던 정의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좋소. 내 아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풀어줬던 그대의 명예를 믿겠소.”
“현명한 선택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