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9화
작위적인 황제의 미소에 나 역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그의 반대편에 마주 앉았다.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허허, 나야말로 하이르 앗 딘을 참살한 영웅과 마주 앉게 되어 영광이네. 내 자네를 처음 봤을 때부터 큰일을 할 거라 생각했다네.”
“그게 다 폐하의 성은이지요. 폐하께서 절 믿어주시지 않았다면 칼리나 변경백과 다른 영주들을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빈말이라도 그렇게 얘기해주니 기쁘구만.”
말을 마친 황제는 내 잔에 와인을 따라준 뒤 한참 동안이나 병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의도가 다분해 보였지만, 나는 못 이기는 척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사실 내 말은 안 했지만 자네에겐 미안한 마음뿐이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힘든 시기에 내 억지로 폴란드까지 가야 하지 않는가.”
그래도 억지인 건 알고 있군. 감성팔이를 하는 게 역겨웠지만 어쨌건 아직까진 저쪽이 갑이니 적당히 그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기로 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일들 때문에 머리도 아팠는데 휴식도 취할 겸 가볍게 여행이나 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내 대답에 황제는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잔에 놓인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사실, 지난번 전쟁에서 자네의 말을 들었다면 폴란드는 지금 한창 내전을 치르고 있었겠지. 제국은 그 내전을 통해 이득을 취할 수 있었을 테고.”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과거에 그랬을 거라면~ 이라는 가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더군다나 폐하께선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신 게 아닙니까?”
“그 결과가 좋지 않으니 하는 말일세.”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입니다.”
“자네 말이 맞네. 오늘 자리는 내가 자네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는데 어떻게 된 게 도리어 내가 그대에게 위로를 받는구만.”
지랄. 애초에 본인이 이런 식으로 판을 깔아놓은 게 아니던가.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황제에게 엿을 날리면서 좆 까라고 얘기할 수도 없는 거고.
“과찬이십니다. 그건 그렇고 아드님이 아주 영특하더군요.”
“필리프 말인가?”
“예. 현재 예산 집행에 관한 부분을 맡겼는데 아주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는 게 역시나 황제 폐하의 혈육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심각하고 서로 불편한 얘기를 한 뒤에는 가벼운 이야기로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줘야 한다. 사람이 어떻게 숨 막히는 이야기만 하면서 살겠는가.
효과는 생각보다 뛰어났는데 황제는 아들의 이야기에 지금까지 가식적으로 짓던 미소와는 다르게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부족한 아들이지만 그대의 칭찬을 들으니 절로 기분이 좋군. 자식 칭찬에 헤픈 나를 팔불출이라고 욕하지는 말게나.”
“저는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필리프 경을 비롯해 다른 아드님들도 매우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이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홍복이로군요.”
“하하, 그게 어찌 우리 가문만의 홍복이겠나. 제국의 홍복이지.”
미친놈이 아예 다음 황제도 자기 아들에게 물려줄 거라고 광고를 해대는군. 이게 조선시대도 아니고 참… 근데 뭐 프리드리히는 원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긴 했다.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그게 프리드리히가 꿈꾸던 제국이었다. 원역사에서는 아이러니하게 그런 그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제국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어쨌건 이미 할 얘기는 다 했기에 나는 그 뒤로 적당히 덕담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끝마쳤다. 어차피 이번 만남은 그냥 형식적으로 하하호호 웃으면서 덕담이나 주고받는 게 목표였으니까.
불만은 얘기하기는커녕 황제를 빨아주며 입만 털고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이미 황제의 수족이라고 할 수 있는 궁정백에게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내 입장을 확실하게 전했다.
이미 한 번 얘기한 걸 굳이 황제의 앞에서까지 떽떽거리면서 불만을 표출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애초에 황제도 내게 이런저런 소리 듣기 싫으니 총알받이로 궁정백을 내보낸 거겠지만.
아무튼, 이번 대화로 대충 견적이 나왔다. 100%에 가까울 정도로 확신하고 있기는 했지만, 황제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사자공을 처분할 생각이었다.
칼리나의 세력이 두렵지 않냐고? 빠르게 사자공을 제압하고 나면 남부의 세력 따윈 알 바가 아니라는 거겠지. 위나라는 촉과 오가 연합하는 걸 두려워했지 각자를 두려워한 건 아니니까.
아무튼, 이번 폴란드행을 마치고 다시 니스로 내려가면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 될 것 같다.
니스에서 내정딸을 칠 수 있게 앞으로 몇 년 정도는 조용했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우리 붉은 수염 황제께서는 한시라도 빨리 눈에 거슬리는 사자공을 치워버리고 싶은 모양이니까.
* * *
그렇게 황제와의 독대를 끝마친 나는 뉘른베르크에 머무는 동안 할 수 있는 것들을 전부 처리한 뒤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폴란드로 향했다.
칼리나의 깃발에 그녀가 붙여준 용기사단도 모자라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문장과 제국의 깃발, 그리고 황제 직속 기사단인 신성 기사단까지 달라붙자 그 누구도 우리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그렇게 사람 수만 백 명이 넘어가는 사절이 이동하자 각 거점의 영주들이 허겁지겁 달려 나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물론 영주들은 각자의 영지 내에선 왕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그 누구도 이런 사소한 것들로 인해 황제와 칼리나에게 찍히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폴란드까지 가는 길은 롤스로이스를 탄 것처럼 평탄했고 그건 폴란드의 영토에 들어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우리가 오는 걸 인지하고 있던 폴란드는 수많은 호위병을 이끌고 국경지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저 어마어마한 숫자의 병력은 우리가 딴짓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역할도 했지만 순수하게 호위를 위해서기도 했다.
폴란드의 요청으로 내가 왔는데 이동 중에 죽는다? 폴란드와 프리드리히는 내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며 안일함의 대가로 칼리나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반사적으로 이익을 보는 건 하인리히 사자공이었다. 그러니 사자공의 수작을 방지하기 위해 황제나 정의공이나 이렇게 내 호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신이나 사절이 죽어서 좆된 사례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저고여 피살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던가.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6년 뒤 몽골과 고려는 여몽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처럼 내가 폴란드 땅에 들어간 순간 호위에 대한 책임의 주체는 폴란드가 되기에 정의공은 또 하나의 안전장치로 자신의 아들인 례셰크를 내게 붙였다.
“오랜만입니다. 라그나르 경. 아니, 이젠 백작이시군요.”
“오랜만이네. 례셰크 경. 그간 잘 지냈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번 뵙고 싶었는데 마침내 제 소원이 이루어졌군요.”
“나 역시 매한가지네. 자네처럼 용맹하고 기백 넘치는 젊은이를 만나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니까.”
서로를 죽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싸웠던 이들끼리 이게 뭔 지랄인가 싶기도 할 테지만 중세는 원래 그렇다. 이들의 가치관을 현대인의 감성으로, 특히 동양적 사고관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한 예로 A와 B가 싸웠는데 A가 B를 죽였다. 그 뒤 시간이 지나 B의 아내와 아들들이 C와 싸우게 됐는데 밀리게 되자 A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A는 그 지원요청을 받아들였으며 B의 아내와 아들들까지 보호해주었다.
유교 사상이 널리 퍼진 조선이라면 어찌 아비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에게 도움을 요청하냐며 입에 게거품을 물고 지랄할 테지만, 중세가 원래 그런 걸 어쩌겠는가.
처음에는 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냥 중세감수성이라며 넘어가기로 했다. 애초에 게임이 그런데 따져서 뭘 어쩌겠는가.
그리고 내가 예시로 든 A가 내 눈앞에 있는 례셰크. 후일 폴란드의 대공이 되어 례셰크 백공이라고 불리는 인물의 이야기였다. B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 루스 공국의 공작 중 한 명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
사실 이 게임을 하면 대부분 서부나 중부 유럽에서 놀지 동부 유럽에서 노는 경우는 많이 없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탓도 있을 것이다.
어쨌건 카지미에슈 정의공의 뒤를 이어 대공이 될 례셰크와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것도 없고 정의공을 보기 전에 이런저런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갑의 입장에 있는 정의공이 황제에게 다른 것도 아니고 나를 요청한 건 단순히 자신의 아들을 패퇴시킨 자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는 호기심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례셰크 경.”
“말씀하십시오. 라그나르 백작님.”
“정의공 각하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뭔가? 단순히 얼굴이나 보자고 부르신 건 아닐 텐데.”
“음… 어차피 아버님께서 얘기하실 테니 숨길 것도 없겠지요.”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지도를 꺼내며 대답했다.
“백작 각하께선 이 근방의 땅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계십니까?”
“글쎄. 사실 북부는 잘 모른다네. 헝가리가 있고 그 위에 폴란드가 있고 그 옆에 루스 공국들이 있다는 것 정도?”
“생각보다 많이 알고 계시는군요. 여기 지도를 한번 보시겠습니까?”
나는 그에게서 지도를 받았고 빠르게 폴란드의 주변 상황을 살폈다. 물론 나는 고인물인 만큼 이 시기 폴란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주변국의 정세가 어떤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난이도는 랜덤 변수 때문에 매 게임마다 판도와 대륙의 정세가 달라지기에 이런 상세한 부분은 일일이 확인해 봐야 했다.
“대체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한데 여기 북동쪽은 비어있군.”
“그곳에는 야만… 크흠, 바이킹의 후예들이 살고 있습니다.”
“발트해를 건너서 그곳에 정착했나 보군. 바이킹들의 항해기술은 뛰어나니 발트해를 건너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테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방금 지도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희가 영토를 넓히기 위해 뻗어 나갈 길은 북동쪽뿐이었습니다. 신성 제국이나 키예프 루스와 싸울 순 없었으니까요.”
아마, 지금의 리투아니아 지역을 노리고 있었겠지. 그보다 더 북쪽은 너무 춥기도 하고 폴란드의 국력으로 거기를 먹어봤자 다스리기도 벅찰 테니까.
“볼레스와프 대왕… 그러니까 정의공 각하의 아버지인 동시에 저의 할아버지께선 바이킹들을 견제하기 위해 신성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때는 사이가 꽤 괜찮았나 보지?”
“괜찮았다기보단 교단에 지원을 요청했던 겁니다. 다행히 교단은 볼레스와프 전하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북방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기사단을 보내줬습니다.”
“혹시 그게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인가?”
내 말에 례셰크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력이 좋으시군요. 그렇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저희의 요청대로 바이킹들과 싸우면서 차근차근 땅을 정복해갔습니다.”
“폴란드에서도 물자와 병력을 지원해주면서 부추겼겠지?”
“그렇습니다. 그렇게 정복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나 했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지요.”
“그놈들의 행실이야 잘 알고 있으니 다 듣지 않아도 대강 짐작이 가는군.”
원역사에서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의 행태는 한마디로 압축 가능했다.
‘인간 쓰레기’
정복한 지역의 주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잔인하게 통치하는 것은 기본이요 같은 기독교도들에게까지 행패를 부리며, 십자군이라는 기치가 무색하게 교황의 명조차 거부했다.
“그들은 저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북부 에스토니아로 진격할 때 덴마크를 끌어들였고 아국과의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허, 그대들은 그걸 그대로 보고만 있었나?”
손에 움켜쥔 돈이 빠져나가는 걸 두 눈 뜨고 바라만 보고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 보면 당연한 내 물음에 례셰크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으음… 볼레스와프 전하께서 돌아가신 뒤로 폴란드는 수많은 공국들로 쪼개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아버지께서 대공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혼란이 지속되었던 터라….”
뭐, 지금도 혼란스러운 상황이긴 하지. 이건 공작들 잘못이 아니라 왕이었던 볼레스와프의 잘못이다.
확실하게 후계자를 정하게 그에게 모든 걸 몰아줬어야 하는데 이놈 저놈한테 영지를 떼어주며 공작 자리를 주면 당연히 자기가 잘났다며 싸우지 않겠는가.
물론 그로서는 아들들이 서로 협력하며 나라를 이끌어가길 원했겠지만, 피를 나눈 자식과도 나누지 못하는 게 권력이다.
“그렇군. 헌데 덴마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과 협력했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데….”
폴란드에서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던 건 그럴듯한 이유가 있으니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리보니아 기사단이 덴마크와 손을 잡는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야만인들을 사냥하기 위해 조직된 놈들이 야만인들과 손을 잡아? 이게 말인가 막걸리인가.
“둘의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리보니아 기사단은 저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덴마크는 에스토니아로 도망친 하랄 블로탄을 잡고 싶어 했으니까요.”
“…누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