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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78화 (78/205)

▣ 078화

황제를 만나기 위해 뉘른베르크까지 가는 길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정비가 꽤 잘되어 있군요. 순찰병들이 많아서 그런지 그 흔한 도적들도 안 보이고요.”

이비는 감탄한 듯 주변을 둘러보며 얘기했고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데… 죽고 싶은 게 아닌 이상 누가 우리 앞을 가로막겠어?”

현대에도 경찰들이 순찰을 하면서 돌아다니지만, 범죄가 안 일어나는 건 아니잖은가. 도적들은 물론이요, 길을 가다 마주친 이들이 기겁하며 길을 내주는 주된 이유는 기수가 휘날리는 카노사 가문의 깃발 때문이었다.

로드브로크 가문을 의미하는 까마귀 깃발은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지만, 검은 용이 포효하는 칼리나의 깃발은 이 근방에서 도적질을 하려면 제일 먼저 익혀야 할 문장이었다.

카노사 가문의 문장을 보고도 약탈을 하겠다고 달려든다? 장담컨대 그건 기독교에서 자살하지 말라고 하니 자신을 대신 죽여줄 이를 찾아다니는 자살 희망자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도적들도 귀족 가문의 깃발을 외우는 마당에 이름 좀 있다 싶은 귀족들은 필수로 문장을 외우고 다니기에 불똥이 튀지 않게 알아서 저자세로 나오는 것이다.

방금 전만 해도 4륜 마차의 마부석에 앉아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말을 몰던 마부는 내 뒤에서 휘날리는 깃발을 보자마자 황급히 마차를 세웠다.

잘 가던 마차가 서자 안에 있던 귀족은 짜증스런 얼굴로 밖에 나왔지만 카노사의 문장을 보자마자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허겁지겁 마차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끗발 죽이네.”

이래서 호가호위라는 말이 생겨난 모양이다. 이렇게 나는 사방에 진동하는 칼리나의 위상과 위명을 새삼스레 느끼며 뉘른베르크에 입성했다.

물론 나와 내 일행을 맞아준 건 이제는 얼굴이 익숙해진 라인팔츠의 지배자이자 제국 궁정백인 콘라드였다. 그는 꽤 많은 수의 인원을 데리고 직접 성문 앞까지 나와서 나를 환대해주었다.

“어서 오게. 라그나르 백작. 그간 별 탈 없이 잘 지냈나?”

물론 나는 그의 환대와는 다르게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글쎄요. 저는 별로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만, 궁정백께선 별일 없으셨습니까?”

“꽤 날이 서 있는 대답이군. 자네는 날 봐서 기쁘지 않은가?”

꽤 무례한 대답인데도 저러는 걸 보면 본인도 이게 정치적으로 무리수라는 건 알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황제가 나를 콜업했다는 건 날 어떻게든 폴란드에 보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거겠지.

정확히는 폴란드와 관계를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거겠지. 가령 사자공을 숙청할 동안 후방을 공격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뭐 그런 거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내가 신성제국의 귀족이라지만 나는 황제가 아닌 칼리나에게 충성하고 있으니까.

“설마 그걸 몰라서 물어보시는 건 아니겠지요?”

“뭐, 자네의 분노는 이해하네. 그게 정당한 것 역시 알고 있고.”

“궁정백 각하께서 알고 계시는 걸 황제 폐하가 모르시다니… 이해가 안 가는군요.”

“폐하께서 편지에 적으셨겠지만 어쩔 수 없었네. 정의공이 막무가내로 자네를 콕 찝어서 보고 싶다는데 어쩌겠나?”

내가 슬쩍 말을 꼬면서 황제를 조롱했지만 콘라드는 잘못을 정의공에게 떠넘기며 부드럽게 넘어갔다.

“하, 제가 보고 싶으면 본인이 직접 니스로 오면 되지 않습니까?”

“재밌는 농담이군.”

“글쎄요. 폐하는 정의공이 보고 싶어서 크라쿠프까지 진군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내가 지난번에 내 말을 듣지 않고 진군했던 걸 꼬집어서 비꼬자 콘라드의 눈가가 움찔거렸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아무튼, 자네가 무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이군.”

“원래는 무시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칼리나가 폐하께 꼭 한마디 전해달라고 해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칼리나 변경백 각하께서 명하시는데 제가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나는 은연중에 황제의 명령 따위는 언제든지 거부할 수 있지만, 칼리나의 명령은 절대적임을 어필했으나 콘라드에겐 그보다 칼리나가 보냈다는 전언이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변경백이?”

“예.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전해달라 하더군요.”

“뭐라던가?”

“용의 역린을 건드리지 말라 하더군요.”

물론 앞에 ‘죽기 싫으면’이라는 말이 붙어있지만 아무래도 그건 너무 나간 것 같아서 적당히 순화해서 들려주었다.

“역린이라, 그녀에게 역린은 자네인가 보군.”

“글쎄요. 저 같은 미천한 야만인이 그 안에 담긴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알겠네. 변경백의 전언은 내가 책임지고 폐하께 전해드릴 테니 직접 말씀드리는 건 좀 참아주게. 부탁 좀 하지.”

“원하신다면.”

“고맙네. 먼 거리를 오느라 피곤할 텐데 일단 좀 쉬고 있게. 저녁 시간에 폐하께서 자네를 부르실 걸세.”

“독대입니까?”

“물론이네. 폐하께선 자네를 신뢰하고 계시니까.”

“신뢰라… 신뢰만큼 덧없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군요. 몇 년 전에는 사자공 전하도 폐하의 신뢰를 받지 않았습니까?”

“…라그나르.”

이 이상은 선을 넘는 행위라 판단했는지 콘라드의 목소리가 가라앉았고 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그에게 대답했다.

“농담입니다. 혹여 기분 나쁘셨다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지요.”

“다시 보니 자네는 농담에 전혀 소질이 없는 것 같군. 폐하의 앞에서 농담을 할 생각은 집어치우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콘라드와 더 얘기를 해봤자 영양가도 없었기에 나는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 지은 뒤 이비와 힐데를 데리고 지난번에 묵었던 방으로 들어갔다.

긴 여행으로 꽤 피곤했기에 겉옷을 바닥에 내던지고 침대에 드러눕자 힐데가 한숨을 쉬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을 주워들었다.

“제가 15년이 넘게 옷은 좀 옷걸이에 걸어두라고 당부하지 않았습니까?”

“너도 15년이나 얘기했는데 내가 안 고치면 체념할 때도 되지 않았어?”

“…그렇게 얘기하니 할 말이 없군요.”

“옷은 아무 데나 놔둬. 어차피 땀을 많이 흘려서 세탁해달라고 해야 되니까.”

땀을 좀 흘려서 그대로 내버려 뒀다간 추후에 세탁을 해도 썩은 내가 진동할 것이다. 원래 찌든 때 같은 건 바로바로 빼야 하지 않던가.

실제로 힐데는 내 옷을 들어 올려 냄새를 맡더니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바로 세탁 바구니에 집어 던졌다.

“확실히 그래야 될 것 같군요.”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난 키득거리며 물었다.

“나쁘지 않지? 계속 맡다 보면 생각보다 향긋할걸?”

“제가 알고 있는 향긋과 당신이 알고 있는 향긋의 뜻이 서로 다른 것 같군요. 바이킹들은 ‘향긋’이라는 단어를 ‘악취’라는 의미로 사용합니까?”

“너무하네. 고대 로마에선 검투사들의 땀을 향수로 썼다는 얘기 못 들었어?”

“전부 당신 같은 이상성욕자들만 있던 모양이군요. 로마가 멸망한 이유를 아주 잘 알겠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애초에 사람 땀 냄새가 향긋할 리가 없지 않은가. 향긋하다기보단 꼬리꼬리하면서도 묘하게 중독되는 꼬카인 같은 그런 냄새지.

“그나저나 정말 폴란드에 갈 생각입니까?”

“안 갈 거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저쪽에서 좋게 볼 리가 없잖습니까.”

“자기들이 초대했는데 설마 죽이겠어?”

“또 모르지요. 황제가 폴란드를 이용해서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걸지도.”

장담하건대 내가 죽고 나면 칼리나는 황제에게 선전포고를 한 뒤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다 끌어모아서 북진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황제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수 중에 가장 최악의 수가 되겠지.

“차도살인지계라… 나쁘진 않은데 차라리 그렇게 해서 죽일 거면 칼리나를 죽였겠지. 거기에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도 아니잖아?”

“적진으로 들어가는 건데 자신감 넘치는군요.”

“나야 늘 자신감 넘쳤지. 그리고 이 자신감을 이용해서 두 분 레이디에게 데이트를 신청해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싶지만… 그래도 호랑이 굴에 들어왔으니 할 일은 해야겠지?”

내가 굳이 폴란드가 아닌, 이곳 뉘른베르크를 호랑이 굴이라 칭하자 힐데와 이비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녀들도 누가 적인지, 누가 아군인지 깨달았겠지.

“이비.”

“예. 주군.”

“사자공에게 하랄 블로탄을 수소문해달라는 편지를 하나 보내줘. 오토까지 내가 맡아주고 있으니 그 정도는 해줄 거야.”

“찾고 나면 답장은 어디로 보내라 할까요?”

이비의 말에 나는 잠시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황제에겐 내 행동 자체를 노출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곳보다는 니스로 보내라고 하는 게 낫겠지.

“니스로 보내라고 해. 그리고 편지 쓸 때 필리프와 은연중에 비교하면서 오토가 얼마나 쓸모 있고 니스에 필요한 존재인지 칭찬을 곁들여서 적어 보내.”

사자공은 오토를 꽤 아낀다고 했으니 자식이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기쁘겠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알겠습니다.”

“그리고… 힐데.”

힐데는 말하라는 듯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나는 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물었다.

“교단에 조금 기부를 하고 싶은데.”

“많이는 아니지만 2~3명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물론 뭘 시키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동문서답이겠지만 힐데의 대답은 내 질문의 요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사실 말이 기부금이지 실상은 의뢰금이다. 원래 기사단이나 교단의 도움을 받을 땐 이런 식으로 ‘기부’를 하면서 부탁을 하니까.

“이곳에 떠도는 소문들을 수집해줘.”

“정화교단이 그런 일을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차라리 뒷골목의 정보 길드를 이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쪽은 정보가 새서 안 돼. 정보의 질은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뭐든 좋으니 끌어모아 줘.”

“방향성이나 키워드는 어떻게 할까요?”

“음… 최근에 군수 물자나 병장기 뭐 이런 게 얼마나 움직였는지 확인해줘. 구체적으로는 전쟁에서 쓸 법한 물자 같은 거.”

원역사에서야 황제가 ‘법 밖에 선 자’라는 지랄 맞은 형벌로 사자공에게 주어지는 모든 법의 보호를 박탈했기에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황제가 바보도 아니고 그것만 믿고 손 놓고 있진 않을 것이다. 당연히 사자공이 반발할 경우를 대비해 무력으로 진압할 생각도 하고 있을 텐데 그와 제대로 맞붙기 위해선 적어도 만 단위의 병력을 동원해야 한다.

대강 상단 뒤져가면서 황제가 가지고 있을 비축품들을 계산해보면 언제쯤 결행을 할지 어림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업하면서 돈이 더 필요하면 얼마든지 가져다 써도 좋아.”

“알겠습니다.”

그 이외에도 나는 자잘자잘하게 구체적으로 지침을 내려주었고 기나긴 설명이 끝나자마자 타이밍 좋게 황제의 명을 받은 시종이 나를 데리러 왔다.

“쉬고 계시는데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

“무슨 일인가?”

“폐하께서 백작님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딱 맞춰 왔군. 안내하게.”

나는 얌전히 그의 뒤를 따랐고 시종은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거대한 홀로 나를 안내했다. 그는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고 그곳에는 세상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가 나를 맞아주었다.

“어서 오게. 라그나르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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