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7화
“소집? 날?”
“예. 자세한 건 전령을 만나봐야겠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합니다.”
“……이리로 데려오게.”
내 기분이 안 좋다는 걸 눈치챘는지 리슐리외는 눈치 빠르게 방을 나섰고 그의 뒤를 따라 안에 있던 보좌관들도 우르르 빠져나갔다.
필리프도 내 눈치를 보며 도망가려 했지만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자네는 앉아있게.”
“……예.”
전령이 올 동안 나는 일절 입을 열지 않았고,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5분쯤 지속될 무렵 노크 소리와 함께 황제의 전령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신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정당한… 필리프 전하?”
예상도 못 한 이가 동석하고 있다는 사실에 전령은 할 말을 잊었는지 멍한 얼굴로 나와 필리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헛기침을 하며 마저 말하려 했지만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나도 황제 폐하가 제국의 정당한 통치자인 건 알고 있네. 그러니 빨리 편지나 내놓게.”
“여깄습니다.”
분위기가 안 좋은 걸 느꼈는지 그는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재빠르게 편지를 내밀었다.
나는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전령의 손에서 편지를 가져온 뒤 봉인을 뜯으려다 옆에서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필리프에게 물었다.
“자네가 먼저 읽어볼 텐가?”
“제가 어찌 니스의 지배자이신 라그나르 백작 각하의 앞으로 온 편지를 먼저 읽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곳의 지배자인 걸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나는 자네도 그렇고 황제 폐하도 그렇고 깜빡 잊고 계신 것 같아서 말이야.”
내 말 속에 담긴 뼈를 느꼈는지 필리프는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고 나는 작게 코웃음 치며 봉인을 해제했다.
[오랜만이네. 라그나르 백작.
자네는 격식 차리는 걸 싫어하는 편이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이번에 아국에서 폴란드에 사절단을 보낼 생각인데 자네가 이 사절단에 참여해줬으면 하네.
물론 나 역시 필리프에게 보고받아서 자네가 누구보다 바쁘다는 건 알고 있고 이게 얼마나 무리한 부탁인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네.
하지만 폴란드의 카지미에슈 정의공이 그대를 보고 싶다 강력하게 요청했고 나로서는 그의 청을 거절하기가 힘들더군.
전조도 없이 이렇게 갑작스레 편지를 보내게 되어 당황스러울 테지만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음을 알아줬으면 하네.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이쯤에서 줄이도록 하겠네.
그대와 다시 만나기를 이곳에서 간절히 빌며.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후우… 필리프 경.”
내가 하대가 아닌 경을 붙이며 반 존대를 할 때는 굉장히 빡쳐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필리프는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 백작 각하.”
“이 미천한 야만인이 감히 황제 폐하께 불만을 표하려는 건 아니지만 말일세.”
“예….”
“지금 영지 상황이 상태가 안 좋지 않나? 속된말로 책임자인 내가 없으면 좆되기 일보 직전인데 폐하께서 나를 콕 찝어 부르셨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혹시 자네. 내가 일을 좀 많이 시키니까 좀 쉬고 싶어서 나를 수도로 소환해달라고 폐하께 편지라도 보냈나?”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습니까? 비록 이곳의 생활은 궁정에서의 생활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지만 제가 가진 능력을 펼칠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곳의 생활이 마음에 듭니다.”
“근데 왜 나를 부르시는 거지?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아니면 폐하께서 부르면 꼬리를 흔들면서 찾아가야 하는 개새끼인가?”
“아닙니다.”
“그도 아니면 내가 야만인이라 우습게 보이신다던가? 자네 정녕 내 뒤에 누가 있는지 몰라서 그러나?”
“절대 아닙니다.”
“각 잡고 뭐 좀 하려고 하니까 이러는군.”
새삼 빡친 나는 필리프를 좀 더 갈구기로 했다. 엉뚱한 데다 화를 푸는 거지만 화가 나는 걸 어쩌겠는가.
“이보게 필리프 경.”
“예. 백작 각하.”
“나는 폐하께서 내게 아무런 지원도 없이 하이르 앗 딘을 토벌하라고 하셨어도 군말 없이 해냈네. 칼리나의 지원을 끌어내고 근방의 영주들을 만나기 위해 발품을 판 것도 나고, 영주들 간의 사이를 중재한 것도 나고, 공성전을 이끈 것도 나고, 하이르 앗 딘의 목을 벤 것도 다름 아닌 나야!!!”
“물론입니다. 그 누가 라그나르 백작 각하의 위업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근데 내가 지난번에 이 이야기를 그대에게 하지 않았던가?”
“하, 하셨습니다.”
“혹시 접수가 안 됐나? 살짝 돌려서 부드럽게 얘기하면 모르는 건가?”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으니 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폐하께서는 이곳의 내정에 간섭을 하실 수가 없다 이 말이야!!!!”
“…….”
“수많은 내정간섭이 있었지만 나는 참았네. 내가 야만인이니까! 어쨌거나 제국의 황제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니까! 그리고 내가 화내봐야 칼리나의 명예와 이름에만 먹칠하는 꼴이니까!”
심호흡을 하며 가볍게 숨을 고른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라인팔츠의 궁정백이 왔을 때도 웃으면서 넘어갔네.
연통도 없이 자네가 이끌고 이곳에 왔을 때도 나는 참았네. 그저 이곳에 십자가마냥 모셔두는 게 아니라 자네를 믿었기에 제일 중요한 예산과 관련된 권한을 내려주었다 이 말이야!”
“백작님의 관대함과 배려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 것치고는 이 이야기도 한 번 했던 거 같은데….”
“후우…… 필리프.”
자신을 하대하는 모습에 어느 정도 화가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예. 하문하십시오.”
“잘하게. 내가 독수리가 아닌 사자의 편에 서지 않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자네가 미천한 야만인에게 타박받는 게 싫고 폐하의 차남으로서 이런 대우를 받는 게 굴욕적이라면 당장 짐 싸서 올라가도 좋네.”
“아닙니다. 폐하의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백작 각하를 모시면서 보좌하겠습니다.”
“흥, 말은 그럴듯하군.”
필리프의 집무실에서 나온 나는 곧장 고드프리를 내 집무실로 소환했다. 사실 이곳에서 제일 믿음직스러운 건 힐데나 이비였지만, 둘은 나를 따라다녀야 할 테니 날 대신할 이는 고드프리밖에 없었다.
연륜과 지혜, 카리스마와 부드러움까지 겸비한 건 현재로서는 그가 유일했다. 거기에 고작 도시 하나가 아닌, 왕국을 다스린 경험도 있으니 날 대신해서 니스를 잘 이끌어 나갈 것이다.
갑작스러운 나의 섭정 임명에 고드프리는 당황스러운 모양새였지만 황제의 편지를 보여주자 그는 탐탁잖은 얼굴을 하면서도 받아들였다.
“지금보다 더 바빠지겠지만 믿고 맡길 수 있는 게 고드프리 경밖에 없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이 늙은이를 그리 믿어주시는데 어찌 매몰차게 거절하겠습니까.”
“전권을 드릴 테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인수인계를 마친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긍정적으로 폴란드행을 받아들였다. 독단적인 황제의 행동거지가 짜증 나기는 하지만 지금 와서 안 간다고 뻗댈 수도 없지 않은가.
거기에 딱히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먼저 사자공과 황제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원역사에서도, 이 게임에서도 늘 황제는 하인리히 사자공을 숙청했다. 지금도 황제는 사자공을 쳐내기 위해 이를 갈고 있었고 내 감이 맞다면 1년 정도 후에 숙청당할 것이다.
황제의 승부수는 매번 결과가 달랐지만 열에 아홉은 성공했고, 사자공은 실각해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그만큼 황제가 내린 형벌은 무겁고도 잔인한 것이었다.
이번 폴란드행을 통해 북부의 상황을 면밀히 살핀다면 사자공을 구원할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덤으로 혀를 잘 놀리면 폴란드와 친교도 맺을 수 있을 테고.
짐작건대 카지미에슈 정의공이 날 보자고 한 건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동맹을 찾기 위함이기도 할 것이다.
수많은 공국들이 난립하는 폴란드에서 언제든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밀 수 있는 다른 공작들이나 그들을 충동질할 수 있는 프리드리히는 위험요소니까.
내가 그의 든든한 동맹으로서 황제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것 자체가 정의공에게는 기꺼운 일이다.
물론 실질적으로 내가 직접 황제에게 칼을 들이밀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황제 입장에서도 수도를 텅텅 비운 채 출진하는 건 부담스러울 것이다. 정의공 입장에선 내가 그 정도 역할만 해줘도 만족할 테고.
마지막으로 지금의 니스는 뭘 하려고 해도 기초가 안 잡혀있는 상태였다.
소고기든, 돼지고기든, 양고기든, 일단 구워 먹으려면 불을 피워야 하지 않겠는가? 헌데 지금의 니스는 고기는 둘째 치고 불을 피울 화덕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폴란드에 갔다 오고 나면 자금도 어느 정도 마련될 테고 기초도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기초가 제일 중요했지만, 고드프리라면 섭정으로서 날 대신해 니스를 잘 다스려 줄 것이다.
“좋아, 니스 일은 이거면 충분하고… 가기 전에 칼리나나 보고 가야겠네.”
바로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장 힐데와 이비를 불러 떠날 채비를 했고,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칼리나가 머무는 밀라노를 향해 말을 채찍질했다.
* * *
칼리나는 야밤인데도 불구하고 달려 나와 나를 맞아주었다.
“어서 와. 라그나르.”
“자고 있던 것 같은데 미안해. 깨우지 말라 했는데 깨운 모양이네.”
“당신이 오면 어떤 때건 내게 와서 보고하라 했거든.”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날 위해 꽤 많은 부분을 희생하며 헌신해주었다.
물론 그녀의 호의는 내가 아닌 빙의 이전의 라그나르를 향하는 거였지만 지금은 내가 라그나르였기에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밤공기가 차니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내 말에 그녀는 직접 내 손을 붙잡은 채 응접실로 이끌었다. 물론 힐데와 이비는 적당한 방으로 안내되었고 힐데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둘만 남게 되자 그녀는 내게 따뜻하게 데운 포도주를 건네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 야밤에 찾아온 거야?”
“사실 밤에 올 의도는 없었어. 니스에서 출발해서 오다 보니 밤이 된 거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단호한 그녀의 말에 나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 긴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포도주 한 병이 다 비기 전에 이야기를 끝낼 수 있었고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황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따위로 말을 내뱉지는 못할 텐데… 가기 싫으면 안 가도 좋아. 그 누구도 당신을 강제할 수 없으니까.”
“글쎄, 가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는 봐야지.”
“뭐, 당신이 가겠다면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조심해.”
“그래. 올 때 선물 사 올게.”
“흠… 난 지금 선물을 주고 가도 상관없는데….”
그녀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얘기했고 나는 애써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런 내 모습에 키득거리며 웃던 그녀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핑거 스냅을 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그리고 기왕 가는 거 황제에게 한마디만 전해줘.”
“뭐라고 전할까?”
내 물음에 그녀는 지금까지 짓던 미소가 거짓말인 것처럼 살벌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죽기 싫으면 용의 역린을 건드리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