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6화
라파엘로의 말에 나는 누웠던 몸을 반쯤 일으킨 뒤 되물었다.
“보고?”
“예. 며칠 전에 저희에게 도시를 발전시킬만한 계획을 자율적으로 세워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래. 그랬었지.”
르네상스 3대 거장들은 뛰어난 창의성과 상상력을 지닌 이들이다. 굳이 내가 신경 쓸 것 없이 방치하다 보면 알아서 좋은 계획을 가지고 내게 달려올 것이다.
실제로 어제도 미켈란젤로가 나를 찾아와 밀과 보리의 품종 개량에 대해서 얘기했었다.
자신이 여기저기 떠돌며 온갖 음식을 먹어봤는데 똑같은 재료로 만든 음식이어도 각 지역마다 맛이 조금씩 달랐다고 한다.
여기에서 착안해 미켈란젤로는 환경과 외부 요인에 따라 밀과 보리의 특성이 조금씩 다를 거라 유추했고 자신에게 시간과 약간의 지원을 해준다면 여러 품종 중 장점만을 취해서 개량시켜보겠다고 했다.
나야 당연히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미래를 생각하면 투자해야 할 부분이기에 바로 승낙했다. 이게 성공한다면 후일 북부에서 추위에 강한 밀의 품종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북부는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었고 이 시대에 생산력은 인구 부양력을 의미했다. 인구수가 국력인 이 시대에 그의 연구는 북부를 규합하고 강력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근원이자 원천이 될 것이다.
“백작님?”
어제 일을 생각하고 있자니 라파엘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불렀고 나는 회상에서 깨어나 그에게 사과했다.
“아아, 미안하네. 잠시 피곤해서 멍때렸던 모양이네.”
“으음, 시기가 좋지 못했나 보군요. 다음에 다시 올까요?”
“아니, 자네 같은 인재가 기발한 생각을 가지고 나를 찾아왔을 텐데 내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내쳐서야 되겠나.”
“그리 생각해주시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내게 영광을 표현했고 나는 피식 웃으며 도로 이비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말랑말랑하면서 포동포동한 감촉이 후두부에 느껴지자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다만 내가 조금 피곤해서 쉬는 중이니 이렇게 보고받는 걸 이해해주게.”
“오, 물론입니다. 농노들이나 할 법한 일을 직접 하시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시는 영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장담컨대 영주님이야말로 귀족의 귀감이십니다.”
“나 같은 야만인이 말인가?”
“자칭 문명인들이 야만인같이 행동하는데 백작 각하의 출신이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입에 발린 말인 걸 알면서도 그대의 아부는 기분이 좋군.”
“제가 아무에게나 이런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신다면 더 기분이 좋으실 겁니다.”
그의 입담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역시 라파엘로는 대화를 할 때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확신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은 아부하는 재주라고 폄훼할지도 모르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처세술은 기본이 아니던가.
“푸하하하하. 그래, 보고할 건 뭔가?”
물론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대강 짐작이 되긴 한다. 며칠 전 방향을 못 잡고 고뇌하는 그에게 은근슬쩍 도제제도를 개선할 방법을 연구해보라고 힌트를 흘려줬으니까.
“분업화를 추진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분업화라? 자세히 얘기해 보게.”
“예. 현재 대부분의 물건들은 장인들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장인들은 도제제도를 통해서 자신들의 기술을 전수하고 있고요. 저는 이 제도를 조금 손볼 생각입니다.”
“자세히 얘기해 보게.”
“일단 이 1인 전승을 없앨… 아니 도제제도 자체를 없앨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익은 길드를 통해 보장되고 있지 않은가?”
“허나 여기에는 아직 길드도 없고 장인들도 없지 않습니까? 사용하고 있는 물자 대부분은 외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고요.”
“그건 그렇지.”
도시에 장인이 없는 게 말이 되냐라고 할 수 있는데 해적들의 소굴이었던 니스는 그게 가능했다. 필요한 건 약탈을 하면 그만이고 쉽게 구할 수 없는 건 베네치아와 거래를 하거나 주문 제작을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제가 말한 방안을 쓸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칼을 만들기 위한 공정이 1⟶2⟶3⟶4의 과정을 거친다고 할 때 기존의 장인은 혼자서 이 일을 다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런 그들의 노력으로 쓸만한 물건이 나오는 게 아닌가?”
“하지만 분업화를 하게 되면 저 모든 기술을 익힐 필요 없이 4명의 인원이 하나의 과정만 익히면 검을 만드는 게 가능합니다.”
분업화의 장점을 확실히 찌르는 그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질문했다.
“좋은 얘기군. 하지만 자네 말대로라면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반쪽짜리를 육성하겠다는 말 아닌가.”
“물론 그런 문제점이 있지만 대신 육성이 쉽지 않습니까? 영주님의 휘하에 거두신다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겁니다. 한 분야의 업무만 함으로써 각 공정에 대해 전문성을 가지게 됨은 물론이요, 양산이 가능해져 가격 경쟁력도 생길 겁니다.”
“좋아. 자네 말대로 그렇게 해서 물건을 찍어낸다고 한들 물건이 남아돌지 않겠나? 지금까지 도제제도가 계속해서 내려온 것은 그들이 생산하는 걸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네.”
“물론 그렇습니다만 백작 각하께서는 무역을 준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잔뜩 만들어서 거래를 하라?”
“그렇습니다. 다만 장점만 있는 건 아닌데 협업을 해야 하는 만큼 정확한 척도를 지켜야 할 테지요.”
사실 나 역시 공장식 분업화가 훨씬 좋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라파엘로가 어디까지 이 제도를 이해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딴지를 걸어봤는데 막힘없이 대답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정도라면 일을 믿고 맡겨도 삽질하지 않고 알아서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자네의 말이 합리적이고 타당하군. 시범적으로 시행해 볼 가치는 있겠어. 내가 지원해 줄 테니 한번 해 보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내 허락에 신이 난 라파엘로를 되돌려보낸 뒤 다시 우물을 파려는데 저 멀리서 전령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보고드립니다. 백작 각하. 1시간 정도 후에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곳에 도착한다 합니다.”
“딱 적당한 시기에 왔네. 힐데.”
“예.”
“하던 거 마무리만 짓고 쉬어. 어차피 하루 이틀 해서 우물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니까 쉬엄쉬엄 해.”
“알겠습니다.”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진 않지만 어쨌건 나는 힐데에게 우물을 파는 일을 일임한 뒤 성으로 복귀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수하를 받아들이는 일인데 후줄근한 모습으로 맞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샤워를 마치고 정복으로 갈아입자 딱 시간이 맞았고 나는 성문 밖으로 나가서 직접 그를 맞이하기로 했다.
저 멀리서 모래 먼지가 일었고 곧 내가 보냈던 기병들과 함께 성문으로 다가오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게임을 수백, 수천 번 플레이하면서 봤던 얼굴이기에 나는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게. 그대가 얀 3세인가?”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정체를 눈치챘는지 즉시 말 위에서 내려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칼리나 변경백 각하의 검이자 니스의 정당한 지배자. 라그나르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극진한 존칭에 나 역시 말에서 내려 직접 그를 일으켜 주었다.
“그렇게 격식 차릴 것 없네. 일어나게.”
그는 황송하다는 듯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고 일단 나는 그를 좀 씻기기로 했다.
“먼 길을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일단 목욕부터 하게. 자세한 얘기는 목욕 후 저녁 식사라도 함께 하면서 나누도록 하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그가 씻고 있는 동안 나는 그와 동행했던 기병을 불러서 얀 3세에 대한 정보를 간략하게 들었다.
그의 인성이나 성격, 가치관 등등. 한 사람의 인생을 30분으로 표현하고 판단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내게는 가능했다.
나는 이 게임의 고인물이었고 그저 내가 알고 있는 얀 3세와 다른지 아닌지만 확인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리고 기병이 얘기한 정보는 내가 알고 있던 얀 3세의 정보와 일치했으며 추가로 내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인지 큰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그에게 고생했다는 의미로 약간의 은화를 내렸고 그는 희희낙락하며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사이 목욕을 마치고 훤칠하게 변한 얀 3세가 식당으로 들어왔고 나는 내 맞은편으로 그를 이끈 뒤 와인을 따라주었다.
“몸은 좀 괜찮나? 꽤 긴 시간 동안 그놈들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다고 들었는데.”
“백작님 덕분에 몸이 크게 상하진 않았습니다.”
“너무 격식 차릴 것 없네. 편하게 얘기하게.”
“백작 각하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어찌 가볍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얀 3세가 이렇게 딱딱한 인물이었나? 확실히 약간 참군인 같은 면모가 있긴 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감옥에 갇혀 있던 그를 빼내 줘서 그런 모양이다.
“자네 같은 용맹하고 뛰어난 이가 갇혀 있다니, 당연히 구해야 하지 않겠나.”
“하잘것없는 저를 그리 높게 평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 너무 겸손 차릴 것 없네. 그보다 많이 배고플 텐데 일단 먹고 얘기하지.”
그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적당히 육류와 어류를 메인으로 상을 차려오라 했고 말 그대로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갈 만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실제로 그는 배가 고팠는지 내 눈치를 보며 청소기처럼 음식을 흡입했다. 빈 접시가 모습을 드러낼 때쯤 나는 그에게 권유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자네를 굉장히 높이 사고 있네. 나를 위해 일해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백작 각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제가 말고삐를 잡아끄는 종자로라도 삼게 해달라 청할 생각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각자 어울리는 역할이 있지. 그리고 나는 자네의 역할이 고작 종자가 아닌, 전장에서 군사를 호령하는 위대한 기사라 생각하네.”
“뭐든 맡겨만 주신다면 충심으로 해내겠습니다.”
자신의 가슴을 치며 호기롭게 이야기하는 얀 3세를 보니 절로 믿음이 피어올랐다.
“믿음직스럽구만. 이곳에서 며칠 쉬면서 몸을 추스르고 있으면 오토의 병력 일부와 징집한 병력을 받을 수 있을 걸세. 그들을 강군으로 조련해주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내 추후에는 자네를 기병대를 이끄는 대장으로 임명해줄 테니 최선을 다해주게.”
얀 3세가 있으면 특수 병종인 윙드 후사르를 양성하는 게 가능하다. 다만 아직은 기병을 육성할만한 돈과 물자, 시설이 부족하기에 일단은 보병을 육성하는 것이다.
기병보다는 효율이 떨어지겠지만 그래도 조련 특기가 있으니 금방 쓸만한 병사들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얀 3세 소비에스키 역시 내 휘하로 받아들인 나는 다음 날이 되자 필리프의 집무실을 방문했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백작 각하.”
“자네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왔네. 왜, 내가 부담스럽나?”
“아닙니다. 그저 당혹스러워서… 여기 앉으십시오.”
그는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고 나는 그 자리에 앉으며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제노바에서 투자금이 들어오지 않았나?”
“예. 그걸로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게 됐습니다.”
“필요 경비를 지출하고 나면 얼마 정도 남는….”
똑똑.
“백작 각하. 리슐리외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리슐리외? 들어오게.”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문을 연 채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다가와서 보고했다.
“각하. 황실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황실?”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나는 필리프를 쳐다보았고 그는 당황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왔다던가?”
“그게…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황제 폐하께서 백작 각하를 소집하셨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