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5화
그렇게 순시를 끝마친 다음 날부터 나는 내가 이야기한 것들 지키기 위해 직접 두 발 벗고 나섰다. 내가 그들에게 최우선으로 강요한 건 위생이었다.
따지고 보면 황폐화된 토지를 되돌리는 것도 위생대책의 일환이었다.
기생충! 기생충이라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지 않던가. 내가 부모님 세대처럼 회충이 득실거리던 세대를 산 건 아니지만 그 끔찍한 경험담은 내 뇌리 한구석에 PTSD가 되어 남아있었다.
특히나 이 게임은 그런 부분까지 착실하게 구현해 놓았기에 내가 이렇게 위생에 목을 매는 것이었다. 심지어 중세의 위생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흔히들 대역소설에서 천연두 예방이니 비누니 뭐 이런 소재가 뻑하면 나오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이게 현대인이 뽑아먹기에 괜찮은 소재이기도 했지만 전염병 한 번 잘못 돌면 경제가 박살 나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렇게 폐쇄된 장원을 기반으로 한 중세시대에 전염병이 돈다? 그럼 그 도시는 반쯤 초토화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도시는 몰라도 니스에서 그런 꼴이 나는 건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나는 과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는 레오나르도를 불러서 자문을 구했다.
“레오나르도.”
“예. 백작 각하.”
“그대가 건축공학과 도시 계획에 일가견이 있다지?”
“작은 재주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 이외에도 그림과 조각, 과학, 인문, 발명, 의학, 작가, 천문에도 조예가 깊은 그야말로 만능이었고 그건 작은 재주라고 말할 게 아니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천재라는 말은 레오나르도 같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말일 것이다. 그가 아니라면 그 누가 하늘이 낳은 재능이라는 오만한 단어를 쓸 수 있겠는가.
“겸손은 그쯤이면 됐네. 다른 게 아니라 이곳 니스에 상하수도를 건설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그에게 지도를 건네주며 물었고 레오나르도는 인상을 찌푸리며 지도를 면밀히 살피더니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다행히 근방에 바흐강이 있어 그곳에서 물을 끌어오면 되겠습니다만….”
“거리가 문제인가?”
“예. 당장 직선으로 수로를 놔도 5km 정도입니다. 당연히 실제 공사 구간은 이보다 길어질 텐데 현재 니스는 그걸 감당할 여력이 없습니다. 거기에 아직 주변의 치안 상태가….”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건만, 나는 다빈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일단 공사 구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많은 인력과 시간을 투입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아직 근방의 치안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고, 이는 노동자들이 도적들의 공격에 노출될 확률이 굉장히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그럼 바흐강 말고 주변에 있는 작은 하천에서 끌어오는 건 불가능한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기존에 흐르는 수량이 너무 적어서 건드려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겁니다.”
“흐음….”
“거기에 하수 처리는 지하에서 해야 할 텐데 땅을 팔 여력이 있겠습니까?”
날카로운 팩트 폭격에 나는 팔짱을 낀 채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되물었다.
“끄응…… 그 부분은 나중에 처리하고 그냥 통째로 주변에 있는 하천으로 보낼 순 없나?”
“평상시라면 괜찮겠지만 폭우라도 내리면 물이 역류할 겁니다. 여름에 물이 역류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당연히 잘 알고 있다. 실제로 게임 초기에 도시를 운영하며 이런 부분을 신경 안 써서 도시 말아먹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물이 생명의 원천이라는 건 꼭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니까.”
장마로 성이 물에 잠기고 배수가 안 돼서 물이 고이게 되면 당연히 썩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해충들과 각종 질병은 니스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앞서 말했듯, 물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니까.
“후우, 어렵구만. 일단은 알겠네. 허나 이 일은 내 일생의 비원이니 최대한 정교하게 계획을 세워두게. 필요한 부분은 내가 지원해주겠네.”
“알겠습니다. 백작 각하.”
이 시기 오염병의 주된 매개체는 물이었다. 괜히 중세의 공중목욕탕이 만병의 근원이라며 도외시된 게 아니었다.
물론 그건 오염된 물이 재사용 된 데다 위생 자체가 청결하지 못했고 기존과는 다르게 매춘의 장소로 활용됐기에 그런 거지만, 어쨌든 오염된 물은 이질 이외에도 장티푸스와 콜레라를 일으키기에 조심해야 했다.
장담컨대 마시는 물을 항상 끓여 먹고 외출 후 손발만 깨끗이 닦아도 어지간한 질병은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서 상하수도 시설은 필수였지만… 아직은 무리라는 게 레오나르도의 의견이었다.
하긴, 현대에도 수로를 파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중세는 오죽할까. 괜히 로마가 외계인 고문해서 상하수도를 만들었다는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지.
어쨌건 전문가에게 지금은 불가하다는 말을 들었기에 나는 미련 없이 포기했다. 물론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고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그를 대신해 우물을 파기로 했다.
* * *
화창한 아침.
나는 흙투성이가 되어 땅을 파내고 있었다.
아무리 일손이 모자라다지만 왜 영주인 내가 직접 삽질을 하고 있냐고? 적어도 내가 앞장서서 일하면 저들도 시늉이라도 내지 않겠는가.
돌격 앞으로 라고 외치는 소대장보단, 나를 따르라고 외치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소대장이 수하들의 존경을 받는 법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일이 쉽고 재미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하… 군대에 있을 때 생각나네.”
아련하게 떠오르는 과거를 회상하며 오묘한 감정에 빠져있자 옆에서 함께 삽질을 하고 있던 힐데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라그나르 당신, 군대에도 종군했었습니까?”
“예전에 조금. 아니, 조금은 아니라 꽤 길게?”
2년이니 짧은 건 아니지. 무려 인생의 2%다. 아직까지도 시간을 허공에 날려버린 걸 생각하면 이가 갈릴 정도다.
“그런 과거가 있는지 몰랐군요.”
“나도 그런 과거가 없었으면 좋겠어. 아니 근데 시발 삽이 왜 다 이따위야!? 자갈밭을 파는데 나무삽이 말이 돼!?”
내가 들고 있던 삽을 내던지며 소리치자 내 곁에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던 행정관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무릎을 꿇은 채 석고대죄했다.
“주, 죽여주십시오 영주님.”
“자네를 죽이면 땅이 저절로 파지고 물이 솟구쳐 오르나?”
“그, 그건 아닙니다.”
“그렇지? 근데 내가 자넬 왜 죽이겠나.”
그건 반대로 자신을 죽여서 우물이 만들어진다면 죽이겠다는 말이 아니던가? 당연히 농담이겠지만 농담을 하는 인물이 바이킹이다 보니 행정관에게는 농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쯧, 그만 떨고 쇠로 된 삽이나 가져와 보게.”
“그… 철로 된 것들은 오토 경의 명으로 전부 녹여서 창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오토가 병사에게 창을 들려줄 수도 없다고 징징대길래 급한 대로 농기구라도 녹여서 창을 만들라고 했는데 그 후폭풍을 여기서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골 때리네.”
“그러게 진작에 그 표독스러운 여자에게 지원을 받았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음… 그게 또 사정이 있단 말이지.”
물론 칼리나야 내게 돈과 물자를 바리바리 건네주고 싶어 했지만, 내가 단칼에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메인 퀘스트의 목표는 바이킹들을 규합해 바이킹들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 북부로 가야 했는데 북부는 열악함 그 자체였다.
그 때문에 나는 내가 추후 북부로 올라갈 때를 상정해 니스를 발전시키며 미리 예행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인물인데 굳이 연습이 필요하냐고 물을 수 있지만 현실과 게임은 다르다. 지금 내가 개고생을 하며 파고 있는 이 우물도 게임상에서는 자원을 투자해서 뽑기를 하면 그만이었다.
가령 인력과 시간, 돈과 물자라는 자원을 써서 우물을 파라는 명령을 내리면 이런저런 외부 요인에 의해서 성공률이 결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긴 현실이 아니었고 이는 당연히 게임 기반의 성공률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을 이곳에서 얼마나 써먹을 수 있는지 실험을 해봐야 했다. 특히 니스는 반쯤 맛이 간 상태라서 내 맘대로 하는 게 가능했고 북부 역시 상태가 이곳과 비슷했기에 경험을 쌓기에는 최적이었다.
“별수 없지. 곡괭이나 줘봐.”
“알겠습니다.”
행정관은 허겁지겁 달려가서 자신이 쓰던 곡괭이를 가져왔고 곁에 서 있던 이비가 조심스럽게 받아서 내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주군.”
중간에서 이비를 한 번 거쳐서 받은 이유는 그녀의 요청 때문이었는데 최대한 위험을 배제하기 위해서란다.
내가 됐다고, 괜찮으니 그냥 하던 대로 하라고 해도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간곡하게 부탁하길래 그냥 그러라고 했다.
어쩐지 이비가 주치의로 있으면 플레이어가 외부 요인으로 죽을 확률이 감소하고 이비 본인이 죽을 확률은 높아지던데 이게 다 이유가 있었구만.
“고마워. 가서 쉬고 있어.”
“그, 주군. 저도 한번 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뭘? 이거? 곡괭이질?”
“예.”
“힘들 텐데… 일단 해봐.”
나는 이비에게 다시 곡괭이를 돌려주었고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곡괭이를 있는 힘껏 치켜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바닥을 내려찍었는데 준비 자세와는 다르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곡괭이는 저런 식으로 쓰는 도구가 아니었고, 자세를 잘못 잡으면 손목은 물론이고 허리까지 상할 수 있었다.
실제로 바닥을 내려친 충격이 전부 허리로 갔는지 그녀는 내려치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어어어 하면서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그 모습에 나는 키득거리면서 그녀에게 손을 빌려주었다. 가면 때문에 보이진 않지만 아마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있지 않을까?
“그것 봐. 생각보다 힘들지? 몸 상하니까 저기서 쉬고 있어.”
“으으… 죄송합니다.”
그렇게 이비는 풀죽은 강아지처럼 터덜터덜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반면 그런 그녀와 대조되게 힐데는 혼자서 묵묵히 3인분 이상의 삽질을 하고 있었다.
철로 테를 두른 것도 아니고 통짜 나무삽인데도 불구하고 자세가 딱딱 잡혀서 자갈과 흙, 모래를 걷어 내는 게 아주 그냥 숙련된 조교 그 자체였다.
라그나르가 조기 교육을 시킨 건지, 아니면 사람을 많이 묻어봐서 그런 건지 모르겠네. 아무튼 이대로 뒀다간 탈진할 것 같았기에 나는 호각을 불며 시선을 끌어모은 뒤 소리쳤다.
“10분간 휴식!!!”
그렇게 내가 휴식을 외치자 함께 일하던 인부들은 다들 앓는 소리를 내며 물을 마시거나 나무 그루터기에 쓰러지는 등 각자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힐데. 너도 여기 와서 좀 쉬어.”
내가 옆자리를 팡팡 치며 오라고 하자 그녀는 들고 있던 삽을 내던지더니 군말 없이 날 향해 다가왔다.
하지만 활짝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보고는 뭔가 생각났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성호와 함께 기도문을 읊었다.
“신이시여. 그대를 따르는 사도의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소서.”
기도문이 끝나자 그녀의 몸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옴과 함께 막 샤워를 하고 나온 것처럼 피부가 뽀송뽀송해졌고 나는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
“또 변태처럼 냄새를 맡을 생각이었습니까?”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물음에 굳이 대답하지 않은 채 이비의 허벅지를 베고 드러누웠다. 물론 힐데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도무지 당신이란 사람은 이해가 안 가는군요. 대체 왜 이런 걸 좋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간에서는 그런 걸 이상성욕이라고 부르는 걸 알고 있습니까? 당신의 취향이 굉장히 도착적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뭐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군요.”
“아시겠습니까. 라그나르? 저야 당신의 이런 이상성욕을 다 알고 있으니 별말 하지 않고 넘어가는 거지만 다른 여자들은 기겁을 하며 도망칠 겁니다.”
그렇게 힐데의 잔소리를 배경음 삼아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자니 라파엘로가 흥분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여기에 계셨습니까? 백작님.”
“무슨 일인가?”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