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3화
결국, 내 예상대로 그들은 내가 건넨 제안을 승낙했고 그렇게 면담을 빙자한 식사를 끝마쳤다. 다만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좀 더 하기로 했는데 지금 당장은 급한 불을 꺼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동안 고급 인력을 놀릴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 영지발전에 기여할 건지 각자 자신 있는 분야를 바탕으로 내게 역으로 제안해보라 얘기했고 그들은 승낙했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내가 뭐를 해달라고 요청하면 하는 게 아닌, 자신들 쪽에서 능동적으로 제안을 한다는 사실에 꽤 흥미가 돋았는지 그다음 날부터 영지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뭐, 좋은 현상이기도 했고 원래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때 효율이 높아졌기에 나는 딱히 그들에게 터치하지 않고 오히려 말과 호위병을 지원해주었다.
아마 한 일주일에서 이 주일쯤 지나면 각자 재밌는 제안을 가져오겠지. 마음 같아선 나도 같이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니스의 상황은 그 정도로 여유롭지 못했다.
당장 인구수 파악도 안 되어 있었고 내 봉신으로 온 귀족들도 아직 제대로 정착을 못 해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데다 무엇보다 잔당들이 활개를 치는 게 문제였다.
“하… 이거 북부를 한 번 조지긴 해야 되는데.”
하지만 북부는 알프스산맥의 초입이었기에 병력을 일으키는 것도 힘들었다. 도적들이 떼거지로 모여있는 것도 아니고 산맥 사이사이에 숨어다니는 놈들을 어떻게 잡아내겠는가.
게임에서야 탐지 스킬을 찍으면 야영지를 찾아서 조지는 게 가능했지만, 아직 내게 추적술이 찍힌 동료는 없다. 그 때문에 하랄 블로탄을 영입하려 한 건데 아직까지 감감 무소식이다.
그나마 얀 3세가 한두 개 정도 추적술이 찍힌 걸로 아는데 그게 알프스에서 먹힐 것 같지는 않다. 심지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시점에서 북부 원정을 준비하는 건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 찾는 꼴이 될 겁니다.”
힐데의 냉철하면서도 합리적인 조언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실 니스 본진의 도적들이야 전부 털었지만 니스가 영향을 끼치던 인근의 마을들을 빠르게 토벌하지 못하다 보니 벌어진 문제였다.
내 실책이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변명을 해 보자면 니스가 털리는 순간 귀신같이 도망쳐버렸기에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을 다 정리하자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데다 하이르 앗 딘이 탈출할 위험이 있었기에 나로서는 별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름대로 니스에 머무는 동안 최대한 도적들을 토벌했지만 바퀴벌레라는 게 한두 마리 잡는다고 다 박멸하는 건 아니잖은가.
그 때문에 치안 유지를 맡은 오토는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병사들을 이끌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치안 유지에 안간힘을 써야 했다.
물론 필리프라고 딩가딩가 놀고 있던 건 아니었는데 그들의 예산을 지원해야 하는 총책임자가 필리프인 만큼 어떻게든 예산을 쪼개고 쪼개서 물자들을 지원해주었다.
다만 가끔 서로의 집무실에서 큰 소리가 날 때가 있었는데 대부분은 이런 내용이었다.
“필리프! 왜 내가 보낸 물자 지원요구를 거절했지? 당장 내일모레 출진해야 하는데 물자 감축도 아니고 거절이라고?”
“지금 예산이 얼마나 쪼들리는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나? 식비를 줄이는 건 물론이고 라그나르 백작 각하의 품위 유지비까지 빼서 쓰고 있는 지경이다.”
“나라고 그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프더라도 고름은 째야 한다. 도적들을 못 잡으면 치안이 악화될 테고 그러면 세금이 약탈당할 테고 결국 네가 쓸 수 있는 예산은 더 줄어들겠지. 힘들더라도 지금은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한다.”
“후… 알았다. 최대한 짜내 볼 테니 돌아가. 안 그래도 너 말고도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한 곳에 붙여 두면 투닥거릴 것 같아서 따로 해놨는데 일 처리를 하면서 나름대로 유대감이 생긴 모양이다. 하긴, 작지만 자신이 총책임자가 되어 일을 처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애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잘만 하면 둘을 이용해서 어느 정도 사자공과 황제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황제나 사자공이 각 잡고 일을 밀고 나가면 무리겠지만 옆에서 들리는 말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둘이 이곳과 나, 그리고 검은 용군단에 대해 나쁘지 않게만 말해줘도 내 입장에선 이득이다. 어쨌거나 내가 캐스팅보트를 쥐기 위해선 둘 모두에게 신뢰를 얻어야 하니까.
“근데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나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
내 말에 힐데가 어이없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이런 상황이 좋다는 말입니까? 가끔 당신의 머릿속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위기가 곧 기회라고 하잖아.”
“뭐, 그런 말도 있지요. 근데 그거랑 지금 제 귀를 만지는 거랑은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원래 힐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는데 힐데가 머리를 가슴 부근까지 길러서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보면 절로 귀를 스치게 된다.
근데 생각보다 귓불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하고 기분 좋은 감촉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만지고 있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손이 갔나 보네. 근데 싫어?”
“싫다고는 안 했습니다. 그저 왜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뜬금없이 귀를 만지냐고 물어보는 것뿐입니다.”
“그냥 나도 모르게? 그리고 기분 좋으면 됐지.”
“기분 좋다고도 안 했습니다만….”
“너 얼마 전에 발 마사지 해주니까 히에엑 히에엑 하고 울부짖은 거 기억 안 나? 그때도 분명 싫다고 했던 것 같았는데.”
“그, 그건 당황해서 그렇습니다! 애초에 이제 됐다는데 계속 주무르면서 만져댄 건 당신 아닙니까!”
“만져대다니 말이 좀 이상하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말을 하면서도 나는 힐데의 볼을 잡고 이리저리 쭉쭉 늘려가며 감촉을 즐겼다. 부들부들하고 말랑거리며 탱글탱글한 감촉이 묘하게 중독될 것만 같다. 어쩌면 이미 중독됐을지도 모르고.
“잠깐… 읏… 지금 사람이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화내지 말고. 그보다 얀 3세는 오고 있대? 진짜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서 몸값으로 보냈던 것 같은데… 중간에 오다가 날른 건 아니겠지?”
“후우…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보고하려고 왔습니다.”
“미안 미안.”
내가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그녀의 머리를 만지자 그녀는 아예 포기한 듯 내가 쓰다듬기 편하게 내게 몸을 기댄 채 문서를 펼치며 보고했다.
“쿠만족은 백작 각하께서 보낸 몸값에 만족했으며 얀 3세는 백작 각하에게 큰 감사를 표하는 바, 은혜를 갚기 위해 아군의 호위 아래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도망치진 않아서 다행이다. 가끔 동료 만들려고 돈을 투자해서 도와줬더니 오히려 먹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얀 3세는 그러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성격상 그럴만한 위인은 아니지.
“언제쯤 오는지도 적혀있어?”
“편지를 보낸 날짜를 고려해보면 사흘 안에 도착할 겁니다.”
“사흘이라… 잘됐네. 얀 3세가 올 때까지 리슐리외한테 얘기해서 병사로 쓸 인원 좀 뽑아두라고 해야겠어.”
“오토 경에게 얘기해서 차출하면 안 됩니까?”
“그러면 절대 안 된다고, 차라리 자기를 죽이라고 읍소할걸?”
그 모습을 상상했는지 힐데는 작게 키득거렸고 나는 추가적으로 100명 정도만 더 뽑기로 결정했다.
사실 기존의 인원과 새로 차출하는 인원을 포함하면 거진 300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300이라는 숫자에 ‘에게? 겨우 그거?’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대한민국의 인구가 5천만인데 군인의 수가 50만을 조금 넘긴다. 그나마 이것도 타국에 비하면 굉장히 많은 거고.
즉, 통상적으로 병사의 수는 인구수의 0.1~0.5%가 적당하다는 걸 감안해볼 때 1만이 조금 넘는 니스의 인구에 비하면 엄청 많은 편이다.
하지만 지금의 니스는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추가로 뽑을 수밖에 없었다.
갑옷은 둘째 치고 제대로 된 무기조차도 줄 수 없었지만 그런 병사라도 없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더군다나 하이르 앗 딘과의 전투로 인해 생긴 난민들의 숫자도 제법 됐고 그들을 제때 케어해주지 않으면 다 도적이 되어 영지를 약탈하고 다닐 수도 있었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병력의 증강은 필수였다.
“영지 예산으로 감당이 되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지금도 그 예술가들을 왜 데려왔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물론 당신의 생각은 알지만 예산의 우선순위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제노바에서 추가로 상단이 들어와서 자금과 물자를 유통시키면 이 상황도 어느 정도 안정될 거야. 그리고 근시일 내로 황폐화됐던 땅도 복구될 테니 그때 가서 다시 군사를 감축하면 되지.”
내 말에 힐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더니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당신은 언제나 잘해왔지요.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겠습니다.”
“믿어줘서 고마워. 그나저나 정화교단 측에선 뭐래? 여기에 와준대?”
“이곳에 지부를 만들 수 있다는 소식에 쌍수를 들고 기뻐하더군요. 1개월 내로 인력과 물자를 보내줄 겁니다.”
제대로 된 사원이 들어선다면 한층 더 안정될 것이다. 물론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도인 만큼 교회와 수도원도 세워야겠지만 말이다.
“고생했어. 포상의 의미로 목마라도 태워줄까?”
“그게 왜 포상인지 모르겠군요.”
“싫어? 어릴 때는 종종 해달라고 졸랐잖아.”
“대체 몇 살 때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저렇게 싫어하니 꼭 목마를 태워서 괴롭혀주고 싶어졌다. 최근, 아니 꽤 오래된 생각이지만, 힐데는 묘하게 괴롭히는 맛이 있다.
이대로 목마를 태운 채 니스를 한 바퀴 돌면 엄청 좋아하지 않을까? 어쩌면 너무 기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힐데의 기벽 중 아직 해제 안 된 게 남아있었지. 패치노트에서 몇몇 캐릭터들에게 반전을 심어뒀다고 했었는데, 힐데도 그 수혜자 중에 하나였던 모양이다.
이참에 그게 무슨 특성인지 한번 확인해봐야겠다. 원래 특성 확인은 이것저것 다 해 보면서 확인하는 거다.
가령, 먹보 특성이면 밥을 계속 먹이거나 굶기다 보면 발현되니까 그녀에게 붙을 만한 특성들을 특정 행동을 통해 제거해나가면 되겠지.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힐데는 겁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는데 때마침 이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군. 시찰 준비가 끝났… 꺅!”
그런 이비가 구세주라도 되는 것마냥 힐데는 냉큼 그녀의 뒤로 돌아가서 얼굴만 내민 채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입맛을 다시며 들었던 손을 내렸다. 안타깝게도 힐데의 기벽을 확인하는 건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이비는 그런 나와 힐데를 한 번씩 바라보더니 어색한 얼굴로 말을 마저 있었다.
“주군. 말씀하신 인원들이 전부 안뜰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래? 그럼 서둘러 가자. 나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순 없지.”
나는 외투를 걸친 채 문을 나섰고 이비와 힐데는 그런 나를 쫄래쫄래 따라왔다. 이비의 말대로 안뜰에는 내가 이곳에 초대했던 이들 대부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난 적당히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말 위에 올랐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겨울 해는 짧으니 서둘러 둘러보도록 하지.”
내가 말 위에 오르자 남은 인원들도 말에 올랐고 나는 그들을 끌고 성 밖으로 나섰다. 이 시찰은 내가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주는 한편 니스 개발을 위해 필요한 행동이었다.
정책을 시행할 때 책상머리에서 하는 것보단 직접 현장에 가서 확인을 해야 그 상황에 맞게 현실적인 정책을 낼 수 있는 법이다.
단순히 지도만 보고, 올라오는 서면 보고만 확인하고 정책을 내면 탁상머리 행정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지 않겠는가.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날 보좌해야 할 인원들은 죽을 맛일 것이다. 원래도 군부대에서 별이 시찰하면 죽어나는 건 수행 인원과 하급부대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