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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72화 (72/205)

▣ 072화

점심 식사가 끝난 뒤에도 나는 리슐리외와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내 끝없는 지식에 감탄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길을 제안하기도 하면서 토론을 벌였고 긴 이야기가 끝을 맞이한 건 새벽닭이 울 때쯤이었다.

리슐리외는 새벽닭 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자신이 너무 무례했다며 사과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으니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오늘처럼 찾아오라며 그를 격려해주었다.

뭐, 애초에 내가 만든 청사진을 이해해줄 만한 이가 몇 없기도 했고 리슐리외가 내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을수록 삽질을 할 가능성이 줄어들었기에 나로서도 유익한 토론이었다.

물론 덕분에 늦잠을 자버렸기에 본래는 예술가 트리오를 점심에 만날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저녁으로 미루게 되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건 그들이었지만, 순번을 마지막으로 늦춘 건 그들에게 누가 갑이고 을인지 확실히 각인시키고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너무 악랄한 게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모든 일에는 중요도가 있는 법이고 그건 사람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거기에 지금 시대에 예술이란 건 한 푼의 돈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으니 어쩌면 그들로서는 이런 취급이 당연한 거라 생각할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예술의 가치 따위를 모르는 야만인이지 않던가.

그렇게 늦은 저녁이 되자 나는 옷매무새를 갈무리한 뒤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다빈치가 미리 와있었는데 그들은 날 보자마자 대대장을 마주한 신병마냥 튕기듯 일어났다.

“늦어서 미안하네. 최대한 빨리 온다고 했는데 일을 처리할 게 있다 보니 늦었네.”

“괜찮습니다. 백작 각하.”

“그렇습니다. 오히려 저희를 한 곳에 초대해주시는 것만으로 크나큰 영광입니다.”

과할 정도로 나를 빨아주는 모습이 참 안타까웠지만 만약 내가 칼리나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없었다면 나 역시 저랬을 것이다. 이 시대에 야만인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오래 기다렸을 텐데 일단 가볍게 한잔하지.”

유럽은 통상적으로 지하수의 상태가 별로 안 좋았기에 물 대신 와인을 먹는 경우가 많았고 그 때문에 술을 많이는 못 마시더라도 아예 못 마시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나는 앉아있는 순서대로 술을 따라주었고 내 잔까지 가득 채운 뒤 잔을 높이 치켜들며 건배사를 외쳤다.

“위대한 예술가들과의 만남을 기리며.”

가볍게 잔을 부딪힌 뒤 나는 그대로 술을 들이켰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찌르르한 느낌에 절로 기분 좋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하이르 앗 딘이 꽤 좋은 술을 숨겨둬서 한번 내와봤는데 괜찮나?”

“부드러우면서도 알싸한 맛이 느껴지는 게 좋은 술이군요.”

내 말에 답한 건 주당으로 이름 높은 라파엘로였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사랑하기로 소문난 그대가 그렇게 얘기해주니 안심이 되는군.”

“하하, 창작욕을 키우기 위해 가볍게 마시는 정도입니다.”

“그런가? 그럼 자네를 위해 내가 좋은 술을 한 병 내줘야겠군.”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그러고 보니 바티칸시(市)에 그대가 그린 일생의 걸작이 걸려있다지? 아테네 학당이던가?”

“오, 그 그림을 알고 계십니까?”

“안타깝게 그대가 그린 원본을 본 것은 아니네. 허나 모작에 불과한 것을 그림이라곤 하나도 모르는 내가 보았음에도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

“그리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일생일대의 역작이라 자신하지만 오늘 라그나르 백작님을 만나 뵙고 그 생각이 깨졌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라그나르 백작님을 조금만 더 일찍 만났다면 백작 각하의 얼굴을 모티브로 그려 넣었을 테고 그랬다면 그림은 더 완벽해지지 않았겠습니까?”

과연, 역사에 잘생긴 얼굴과 함께 부드럽고 매너 있는 언사와 사근사근한 태도로 고용주와의 관계도 좋았다고 하는데 사실인 것 같다.

“푸하하하하, 말을 재치있게 잘하는군. 여기 한 잔 더 받게.”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채워드리겠습니다.”

그는 서둘러 내 비어있는 잔에 술을 채워주면서 은근슬쩍 자기 어필을 했다.

“백작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초상화를 하나 그려드리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오, 그건 또 기대되는 말이군.”

“나중에 편하실 때 불러주시면 바로 그려드리겠습니다.”

“알겠네.”

능숙하게 다음 약속을 잡는 동시에 구질구질하게 달라붙지 않는 모습에 나는 절로 감탄이 일었다. 아마 이게 라파엘로가 가진 처세술이겠지.

“그러고 보니 미켈란젤로 그대도 라파엘로처럼 바티칸에 그림을 하나 그렸다더군.”

“그렇습니다. 백작 각하.”

“그래, 분명 천지창조라는 그림이었지?”

시스티나 성당에 그가 그린 그림은 수백 년이 흐른 뒤에도 가장 위대한 예술품이자 걸작이라고 칭송받을 정도였다. 나 역시 직접 보진 않고 게임 내에서만 봤지만, 그 웅장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그대의 그림을 보는 모든 이가 감탄을 금치 않았다고 하더군.”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도무지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그림 실력과는 별개로 성격 자체도 거만한 데다 쓸데없이 독설을 내뱉어서 친구도 없다는데 진짜인 모양이다.

“하하,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그대가 예술가의 귀감이라 불리는 거겠지. 여기 한 잔 더 하게.”

미켈란젤로는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받았고 나는 마지막으로 다빈치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내 다른 예술가 선생들과는 다르게 그대가 그린 그림은 직접 본 적이 있네. 그것도 꽤 자주 봤지.”

내 말에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혹시 어떤 그림을 보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최후의 만찬! 내 칼리나 변경백 각하의 밑에 있을 때 밀라노에 머물렀는데 그대가 산타마리아 성당에 그려놓은 그 걸작을 직접 보니 절로 감탄이 나오더군.”

“제 졸작을 그리 말씀해주시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군요.”

“하하, 사실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변경백 각하께서 계속 추천해주셔서 한번 봤지. 그런데 단번에 내 마음을 사로잡더군.”

“칼리나 변경백 각하께서 미천한 제 재주를 높이 사주셔서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됐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이렇게 라그나르 백작님과의 연결고리도 만들어주시니 이 은혜를 갚을 길이 없군요.”

혀에 기름을 발랐나, 잘도 저런 말이 따박따박 나오네. 하긴 꼰대 같은 성격은 둘째 치고 잘생긴 외모에 옷도 잘 입고 언변도 능했다니 왜 그런 평가가 남았는지 알 것 같다.

이 셋 다 게임에서 자주 만났지만 그때는 프로그래밍 된 언어로만 봤는데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을 직접 마주하니 또 느낌이 색다르다.

“실은 내가 그대를 비롯해 다른 예술가 선생들을 초대한 것도 그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네.”

“제 그림이 백작 각하의 가슴에 큰 울림을 남겼다니, 둘도 없을 영광입니다.”

내가 이렇게 각자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얘기하며 적당히 빨아주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부드러워졌고 그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원래 예술가들은 아닌 척해도 자신의 작품을 빨아주면 좋아 죽는다. 그건 작가든, 화가든, 조각가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똑같다.

각자 자신에 대한 인정욕구가 도사리고 있고 예술가들은 타인보다 그게 훨씬 더 강하니까. 특히나 일반인도 아니고 나 같은 야만인이 알고 있을 정도라면 더 자부심이 생기지 않겠는가.

거기에 내가 듣던 것과 다르게 예의 바르면서도 예술을 이해하고 지성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니, 당연히 나에 대한 호의가 생길 수밖에 없다. 원래 나쁜 놈이 착한 짓을 하면 더 주목을 받지 않던가.

이게 또 몇 없는 바이킹의 장점이다. 애초에 대부분의 단점은 칼리나의 힘으로 다 밀어버리기도 했고.

“흐음, 아무튼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내가 자네들은 부른 건 내 밑에서 일을 해줬으면 하기 때문이네.”

그 말에 너 나 할 것 없이 얼굴이 환해졌다. 영주의 밑에서 일한다는 건 안정적으로 고용되는 걸 의미했으니까.

사실 말이 좋아 예술가지 실상은 프리랜서였고 고용주가 없으면 굶어 죽는 게 예술가였다. 이름난 화가나 예술가들이 가난했단 얘기가 종종 나오는 건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 나는 예술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네. 오히려 무지한 편이지. 하지만 내가 예술의 가치를 모른다고 그대들의 가치를 폄훼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꼭 예술을 잘 알고 이해해야만 예술을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그저 그럴듯한 자기 과시로 그림을 주문하고 한 푼이라도 수고비를 깎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보다 진정으로 그림을 아껴주며 저희와 같은 예술가들을 이해해주시는 백작님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겠습니까.”

라파엘로와 다빈치가 어떻게든 날 포장해주려 했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대들을 초대한 건 무식한 야만인인 내가 어쭙잖게 교양있는 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네.”

내 말에 그들은 입을 다물었고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청사진의 일부를 그들에게 얘기해주었다.

“지금의 니스는 해적들의 도시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지. 실제로 치안도 좋지 않고 시설들도 낙후된 데다 여러모로 상태가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네.”

내가 얘기한 것들은 이곳에서 딱 사흘만 머물러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기에 나는 굳이 거짓을 입에 담지 않았고 그들은 입을 다문 채 내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난 이곳의 영주로서 이곳을 발전시켜 나갈 생각이네. 그리고 그 주체는 내가 아닌 자네들이 될 걸세.”

“어떤 식으로 말씀이십니까?”

“문화와 예술이 융성했던 과거 로마의 영광을 재현한 도시! 그런 도시를 나는 이곳에 구현할 생각이네. 남들이 볼 때는 무식한 야만인이 허튼 곳에 돈을 낭비한다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진정으로 그대들이 이 도시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네. 부디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내 말에 라파엘로와 다빈치는 물론이고 미켈란젤로까지 눈을 빛냈다.

하긴, 게임 내 동료 설정 때문에 시대가 달라도 내 앞에 있는 것뿐이지 원래 셋 다 르네상스 시기에 살다 간 위인들이다. 그러니 내 제안에 눈을 빛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지금의 니스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지만 내 배후에는 칼리나가 있다. 이들 입장에서 이렇게 확실한 투자처가 또 있을까?

“몇 가지 더 얘기해주자면 나는 이곳에 대학도 세울 생각이라네. 그때 그대들이 교수 자리를 맡아줬으면 하네.”

“교, 교수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성과가 좋다면 종신 교수직을 제안하도록 하지.”

종신 교수. 평생 돈 걱정 없이 철밥통으로 살 수 있다는 얘기에 그들의 눈동자에는 탐욕과 욕망이 깃들었다.

물론 내가 이렇게까지 이들의 편의를 봐주는 건 단순하게 니스의 이미지 개선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원래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각 잡고 발전시킨다고 해도 한도가 있다.

뭐 난이도를 조절하거나 모드를 설치하면 남들이 말 타고 다닐 때 탱크 타고 다니면서 발칸으로 갈아버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내가 선택한 난이도와 모드는 불가능하다.

그럼 기술발전을 하는 게 의미가 없냐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또 아닌 게 고대의 기술은 연구하는 게 가능했다.

왜 굳이 과거 기술을 연구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중세 기준으로 고대 로마의 기술은 로스트 테크놀로지와 같았다. 아니, 실제로 잃어버린 기술이기도 하고.

상하수도 시스템, 도로 구축, 건축 기술 등 수많은 것들이 중세보다 훨씬 발전되어 있었고 나는 르네상스를 표방하면서 이 세 명에게 과거의 기술을 연구시킬 생각이었다.

예술가인 그들이 그런 걸 연구하겠냐고? 글쎄… 돈을 벌어먹으려면 무슨 짓이든 못할까. 거기에 종신 교수가 달려있으니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까지 할 것이다.

물론 대학을 세우고 교육을 시키겠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현대에서 12년을 교육받았는데도 별 이상한 놈들이 많지 않던가? 근데 그마저도 안 받은 중세는 대체 어떻겠는가?

친절한 건지 불친절한 건지 게임은 그 부분까지 사실적으로 고려해놨기에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영주가 되면 하는 게 교육이었다.

다만 그냥 교육을 시키면 교회와 영주들에게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테니 농업이나 상업, 공업, 예술 등등 따로 특성화를 시켜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 제안을 받아들일 텐가?”

아직까지 어안이 벙벙해 있는 그들에게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물론 저들은 내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 중세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게임 내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건 꽤 힘든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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