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1화
“도와달라?”
“그렇습니다.”
“백작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 아둔한 자는 잘 모르겠군요.”
못 알아듣기는. 이미 다 알아들었으면서 한번 튕기는 거겠지. 하지만 당장 아쉬운 건 나기에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구구절절하게 얘기했다.
“고드프리 경. 경께서는 십자군에 명분이 있다 생각하십니까? 작금의 십자군은 초심을 잃어버리고 돈에 좌지우지되는 개만도 못한 집단입니다. 돈에 눈이 멀어 같은 기독교도를 공격하고, 은화 때문에 동로마의 수도를 공격하는 자들입니다.”
“그건 굳이 더 말씀하지 않으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치부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고드프리의 안색과 말투는 딱딱해졌으며 더 이상 이 주제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얘기했다.
“허나 고드프리 경. 그게 꼭 저들만의 잘못이겠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묘의 수호자라 불린 고드프리 경이라면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성지를 점령한다고 한들 유지나 할 수 있습니까? 애초에 예루살렘 왕국의 유지는 서유럽의 지원 없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성지탈환이라는 헛된 망상보다 눈앞의 돈을 좇은 거겠지요.”
동로마와 유대해서 아랍을 전방위로 압박하면 모를까 이미 동로마와의 사이도 틀어졌는데 예루살렘 왕국을 유지하는 건 사막에 물을 붓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물론 백 년이 넘게 버텨왔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랍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 십자군 왕국들이 잘나서 그런 건 아니었다.
“헛된 망상이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해서, 라그나르 경께서는 제 도움을 받아 뭘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이슬람과의 징검다리가 되어주십시오. 그들의 경외를 받고있는 고드프리 경이라면 새롭게 물꼬를 틀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라그나르 백작님께서 하고 싶으신 게, 진짜로 원하는 게 뭡니까?”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친해지는 게 서로 간에 좋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적의 적은 친구라 하지 않았습니까?”
“말씀하시는 적이 누구인지 궁금하군요.”
“숨길 것도 없지요. 라틴 제국과 베네치아입니다.”
라틴은 이미 칼리나와 전쟁을 치렀으며 베네치아는 제노바의 경쟁국이자 잠재적 적국이었고 하이르 앗 딘의 배후였기에 그들과 관계가 악화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과 전쟁을 벌이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세상 그 누가 전쟁을 벌이고 싶겠습니까. 허나 힘없는 평화는 허울뿐이지요.”
내 말에 동감하는 듯 고드프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의 비어있는 잔에 포도주를 채워주며 주제를 바꿨다.
“아무튼, 지금 당장은 그들과 친분을 다지며 교역을 하려 합니다.”
“장기 왕조의 술탄인 누르 앗 딘과 말입니까?”
“아니요. 파티마 왕조를 멸하고 이집트의 술탄이 된 살라딘과 맺을 겁니다.”
내 말에 고드프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살라딘이라. 확실히 관대하면서도 합리적인 군주지요.”
“그는 지금 시리아의 누르 앗 딘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할 테니 동맹이 절실할 겁니다.”
현재 살라딘은 이집트를 통치하며 노골적으로 누르 앗 딘에게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살라딘 입장에선 독립을 위해 승부수를 띄운 셈이지만 원역사에서 누르 앗 딘은 살라딘의 반란을 진압하기도 전에 노환으로 죽고 만다.
물론 이 세계가 원역사와 같은 흐름을 따라가는 건 아니지만 딱히 아랍 쪽에 개입하지 않았으니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니 살라딘의 이름값이 더 커지기 전에 미리 투자를 해놔야 하지 않겠는가. 살라딘이야 떡상이 예정된 코인이니 미리 사놓고 존버해야 한다.
“로마가 코앞인데 이슬람을 돕겠다니… 이단으로 낙인찍혀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거기에 제가 십자군에 참전했던걸 잊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대놓고 이슬람과 친교를 다지겠다는 내 말에 고드프리는 짐짓 매섭게 이야기했지만 나는 느긋하게 포도주를 마시면서 대꾸했다.
“애초에 제가 이교도에 야만인인데 뭐가 문제입니까?”
그런 내 대답에 고드프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폭소했다.
“푸하하하, 딴에는 또 그렇군요. 하긴, 지금 와서 이슬람이건, 기독교건, 이단이건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게 내가 고드프리에게 외교를 맡기려는 이유다. 직접 예루살렘을 가보고, 심지어 왕은 아니었지만 거진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다스려봤던 고드프리라면 종교에 목숨을 거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 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 그에게 종교 및 외교와 관련된 일을 맡긴다면 신앙에 눈이 멀어 일 처리를 개판 쳐놓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장담컨대 그라면 분명 종교와 국가를 가리지 않고 뛰어난 외교관이 되어줄 것이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성지라는 불에 이끌리는 불나방이 되는 것보다 멀리서 그 불빛을 쬐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약간의 도움을 대가로 순례자들의 성지 순례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게 최선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유라면 좋습니다. 그대에 대한 내 첫인상은 나쁘지 않으니 열과 성을 다해 그대를 돕겠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이야기한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든 그대의 곁을 떠날 겁니다.”
승낙과 다름없는 그의 말에 나는 벌떡 일어나 그에게 손을 건네며 미소 지었다.
“경이 절 떠나지 않게 노력해야겠군요.”
물론 나는 이걸로 추후 장사를 할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가령… 니스와 제노바가 수송한 순례자들에 한해서만 안전을 보장한다!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아마 이것만으로도 베네치아의 재정에 큰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 쪽에서도 상당한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기존의 누르 앗 딘을 비롯한 장기 왕조와 협상을 해서 레반트 무역을 행하는 베네치아는 살라딘이 아랍 전역을 통일하게 되면 무역에 차질을 빚게 될 것이다.
그러니 굳이 전쟁을 하지 않고 살라딘을 밀어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베네치아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굳이 고드프리에게 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 애초에 외교와 내정, 군사는 서로 다른 분야가 아니던가.
* * *
고드프리를 만난 그다음 날 나는 리슐리외를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항구 도시라 그런지 싱싱한 해산물들로 만찬이 차려졌고 리슐리외는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훌륭한 만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이름 높은 리슐리외 사제님을 만나 뵙게 됐는데 이 정도 대접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 낮추시지요. 저는 그저 신을 섬기는 미천한 존재일 뿐 백작님의 위상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거기에 나이도 저보다 많으시지 않습니까?”
“그런가? 허면 내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하겠네.”
그의 말에 나는 사양하지 않고 말을 놓았다. 초면에 너무 싸가지없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아니다.
일단 계급만 놓고 따져도 내가 하급 귀족인 리슐리외보다 윗줄이었고 지닌 힘도 비할 바가 못 됐으며 나이도 내가 더 많았다.
물론 그가 사제라지만 내가 기독교를 믿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가 사제건 추기경이건 심지어 교황이건 알 바는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생선 살을 발라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나는 그대도 알다시피 야만인이네. 해서 말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방법도, 상대와 기 싸움을 하는 방법도 모르지.”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이해해주니 고맙네. 아무튼, 내가 듣기로 그대가 꽤 능력이 있다지?”
“작은 재주일 뿐입니다.”
그래도 없다고는 안 하는군. 하긴, 나름 귀족에 사제인 리슐리외가 내 부름에 응한 건 돈 때문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죽었기에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성직자가 된 것도 가족을 부양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래봤자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기에 불만족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칼리나의 신임을 받고 있으며 새롭게 니스의 백작으로 임명된 내가 부르니 뭔가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서 헐레벌떡 온 것이다.
“내가 그 자네의 작은 재주를 원한다네.”
“무한한 영광입니다. 백작 각하.”
“일단 내 청사진을 미리 얘기해보자면 나는 이곳을 무역을 중심으로 한 상업 도시로 만들 생각이네.”
“제노바나 베네치아처럼 도시를 발전시키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뭐, 대충 그런 셈이지. 항구 도시인 만큼 최대한 그 이점을 살려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고드프리 경에게도 얘기했지만, 이슬람은 물론이고 기회가 된다면 아라곤과도 교역을 해 볼 생각이네.”
“누르 앗 딘이 베네치아라는 거래 상대를 내치고 저희와 교역을 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누르 앗 딘이라면 아쉬울 게 없으니 거절하겠지. 하지만 살라흐 앗 딘도 그럴까?”
내 말에 리슐리외는 재미있다는 얼굴을 지으며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아라곤을 끌어들이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지중해 무역은 베네치아가 꽉 틀어쥐고 있지. 그들이 괜히 지중해의 여왕이라 불리는 게 아니잖은가. 반면 나와 제노바, 그리고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낸 뒤 새롭게 떠오르는 아라곤은 기존의 질서와 판도를 뒤엎고 싶을 테니 힘을 합치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더불어 이슬람을 통해 베네치아를 압박하시려는 생각이시군요. 그를 위해 누르 앗 딘이 아닌 이집트의 술탄인 살라딘을 밀어주시려는 거고.”
“정확하네. 내가 자네를 원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하지만 리슐리외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탁월한 생각이십니다. 백작 각하. 종교에 목숨을 거는 멍청이들은 생각조차 하지 못할 위대하고도 합리적인 발상이십니다.”
정작 종교쟁이인 리슐리외가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웃겼지만 그의 일생을 보면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본인이 추기경이면서 위그노(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 관용을 베푸는 것은 물론이요, 국가의 이득을 위해서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과도 손을 잡을 정도로 합리적인 인물이 아르망 리슐리외였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행정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곳에 머물면서 잠깐 짬이 나 니스를 한 번 둘러봤는데 거진 무법지대나 다름없었습니다.”
“일단 예산 확보와 집행은 필리프, 치안 유지와 법 집행은 오토에게 맡겨놓았지만 이건 미봉책에 불과하지. 나중에 추가로 수도원을 세워서 행정의 일부를 맡길 생각이네.”
원래 교회에서 출생신고나 장례, 미사와 같은 간단한 행정업무를 수행해왔기에 나는 그 관례를 따를 생각이었다.
“물론 그 대가로 면세를 비롯해 어느 정도 특권을 부여해야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힐데의 입지와 힘을 위해서 정화교단의 수도원을 들여놔야겠군. 그나마 정화교단은 타 종교에도 관대하니 이곳에 이슬람들이 드나들어도 크게 뭐라 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교육을 위해 대학을 세울 생각이네.”
“아, 그래서 그 예술가들을 데려오신 겁니까?”
“맞네. 지금 니스의 이미지는 해적의 소굴이지. 그들을 통해서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새롭게 태어나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대강 구상해놓은 청사진을 조금씩 풀어나가자 리슐리외의 눈은 열정과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내게 감화되었는지 만면에 미소를 가득 지은 채 내게 이야기했다.
“저는 지금껏 라그나르 백작님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시련을 겪었던 모양입니다.”
“이 또한 신의 인도겠지. 그렇지 않나?”
“물론입니다.”
“좋아. 그러면 내 제안을 자네가 수락했으니… 아르망 리슐리외. 그대에게 행정에 관련해서 전권을 내려주겠네. 그대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이곳에서 펼쳐보게.”
“백작 각하께서 보여주신 믿음과 신뢰에 반드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