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0화
나는 날이 밝자마자 부지런히 여러 가문을 돌아가며 방문했다. 문제는 각 가문을 방문할 때의 순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냥 ABC 순으로 정렬해서 가든지 가까운 순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한국도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을 올 때 일본을 먼저 가냐 한국을 먼저 오냐에 목숨을 걸지 않던가.
한국, 미국, 일본을 말할 때도 한미일 이렇게 순서를 붙이는 것처럼 이런 사소한 것들은 묘한 자존심의 영역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인정할만한 순서로 줄을 세운 뒤 등수를 매기기 애매한 가문의 경우에는 그냥 가문의 수장들을 전부 초대하는 걸로 합의를 봤다.
그렇게 나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니스에서 직접 공수해 온 물품들을 선물로 주면서 그들의 호의를 샀다.
사실, 저들 전부가 내로라하는 상인인 만큼 그들의 호의를 살만한 선물을 준비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내가 가져온 선물들은 칼리나가 직접 준비해 준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이는 후일 열린 회의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흠, 그러니까 라그나르 경께서는 니스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항만을 비롯해 조선소, 그리고 주변의 기반 시설에 대한 건설을 저희에게 의뢰하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사실 다른 것보다 전 세계에서 제노바보다 더 위대한 해양도시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우리 제노바는 가장 고귀하며 자부심 넘치는 공화국이니까요.”
총독의 말에 대의회의 의원들 역시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적당히 그들의 비위를 맞춰주며 계약을 맺었다.
사실, 이렇게 간단하게 계약을 맺을 수 있던 건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칼리나 휘하의 행정관들이 갈려 나가면서 초안을 잡아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칼리나의 심복에 백작인 내가 몇 날 며칠 동안 입씨름하면서 계약서를 붙잡고 있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니던가.
어쨌든 성공적으로 계약이 맺어지자 이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열렸고 나는 이들을 띄워줄 요량으로 가볍게 한마디 내뱉었다.
“비록 종이 한 장이지만 품 안의 계약서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군요. 주변에 많은 해양도시가 있다지만 이왕 따라 할 거라면 최고를 따라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다시 이를 말씀입니까. 장담컨대 우리 제노바에게 이번 일을 의뢰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어디에 있는 뱃속에 능구렁이만 가득한, 상인의 기본 덕목인 신뢰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는 불한당 같은 놈들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누가 봐도 베네치아를 얘기하고 있었기에 나는 슬쩍 맞장구쳐주며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원래 2등은 1등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맞습니다. 상인의 근본은 신뢰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데 베네치아는 그 신뢰를 저버렸지요. 또한, 그들의 행동에 신념과 정의가 깃들어있지 않으니 누가 그들을 상종하려 하겠습니까.”
내 말에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가브리엘 아도르노가 탁자를 내려치며 소리쳤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라그나르 백작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시니 속이 다 시원하군요! 그 개자식들은 십자군을 표방하는 주제에 같은 기독교도를 공격해 본인들이 도적 떼임을 입증했습니다.”
뭐, 애초에 4차 십자군 자체가 희대의 삽질에 병림픽 그 자체이긴 했다.
이슬람 두들겨 패라고 보냈더니 돈 없다고 같은 기독교권인 헝가리―크로아티아의 도시 ‘자라’를 조져버리고, 심지어는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뿐이면 말도 하지 않으련만 파문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숨긴 것은 마땅히 교황청의 이단 심문관에게 조사를 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십자군 조직했으니 잘 싸우겠지? 라고 생각하던 교황이 받은 건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의 ‘저 십새끼들 십자군이라며? 뭔데 우리 도시를 약탈함?’이라는 분노가 가득 담긴 편지였다.
당연히 피가 거꾸로 솟은 교황은 당장 예루살렘으로 안 가면 다 파문이라고 입에 게거품을 물며 얘기했지만, 그 이후로 그가 들은 건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하고 동로마가 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뒷목 잡고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한 것 같다.
“거기에 우리를 믿고 도움을 요청한 동로마를 되려 공격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황제를 살해했으니 이는 이교도보다 못한 행동입니다. 이처럼 이들의 죄가 명백할진대 어찌 상종할 수가 있겠습니까!?”
왠지 미묘하게 정치적인 문제로 가는 것 같기에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만 쳐주었다. 원래 정치 얘기는 가족이랑도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다만, 이게 발화점이 되어서 의원들이 다 한마디씩 했고 중간에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의 의견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제노바는 새로운 동맹을 원하고 그 대상으로 칼리나와 그녀가 이끄는 검은 용군단을 후보로 생각하고 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최근 제노바에선 교황에 대한 지지가 많이 줄어들었다. 우선 베네치아가 교황의 파문에도 불구하고 동로마를 공격해 멸망시켰는데도 교황청은 추가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물론 교황청에서 쓸 수 있는 최고의 카드가 파문이었지만, 실상은 베네치아에서 바치는 막대한 은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거기에 하이르 앗 딘이 베네치아의 사주를 받고 행동한다는 걸 알면서도 묵인하는 교황과 교황청의 모습에 제노바가 실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총독의 아들까지 하이르 앗 딘에게 붙잡히다 보니 자연스레 민심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제노바는 중립적인 자세를 지키되 우리와는 최대한 협력적으로 나서자는 게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하긴, 지금은 힘 앞에 모든 게 짓밟히는 야만의 시대였기에 완전한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교황도, 황제도 믿을 수 없으니 제노바가 새로운 동맹을 찾아 나서는 건 필연이었다.
“아, 그리고 실례가 안 된다면 당분간 상단 운영을 지도해줄 자문관을 파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쉽게도 저를 비롯해 휘하에는 상업에 재능이 있는 친구가 없더군요.”
“오, 그런 거라면 제 아들을 보내드려도 되겠습니까?”
“벨렌테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마침 제 아들도 라그나르 경에게 입은 은혜를 갚고 싶다 청하기도 했고 제 자식이긴 하지만 상단을 이끌만한 역량이 있는 아이입니다.”
“그래 주신다면 무한한 영광이지요.”
갑작스레 나온 얘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도 며칠 전 총독의 집에서 머물 때 미리 끝내놓은 얘기다.
총독이야 이 얘기를 꺼냈을 때 탐탁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당사자인 벨렌테가 내게 은혜를 갚고 싶다며 사정사정하기도 했고 니스에서 제대로 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내 설득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가 볼 때 총독이 허락한 가장 큰 이유는 필리프뿐만 아니라 오토까지 와있어서 그런 것 같지만.
“그럼 저희 가문은 니스에 지부를 설치하고 라그나르 경을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명망 높은 아도르노 가문에서 그렇게 해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습니다.”
차기 총독을 노리고 있는 아도르노 가문 역시 나와의 연결고리를 보다 강하게 맺기 위해 크게 선심을 써주었다.
그렇게 적당히 가문 간의 경쟁도 이용해서 성공적인 협상을 끝마친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니스에 복귀했다.
“어서 오십시오.”
“오, 힐데. 잘 있었어?”
“아니요. 잘 있지 못했습니다. 라그나르 당신이 얘기한 것보다 1주일이나 더 늦게 온 데다 제게 일을 다 맡기고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그 말대로 그녀의 눈가에는 다크 써클이 짙게 깔려있었다. 반면 내 얼굴은 화사하다 못해 탱글탱글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힐데를 달래주었다.
“내가 그만큼 너를 믿고 있다는 거지.”
“말은 언제나 청산유수군요.”
그러고 보니 둘 다 날 보자마자 보고할 게 잔뜩 쌓여있다고 하소연을 했었지. 오늘이야 여독을 푼다는 핑계로 땡땡이 칠 수도 있지만 내일부터는 저 일 더미에 파묻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를 위해서 칼리나에게 리슐리외를 최우선으로 찾아달라고 부탁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찾아달라는 사람들은 찾았어?”
“몇몇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다 찾은 건 아닌 것 같은데 편지도 함께 왔으니 자세한 내용은 직접 봉인을 뜯고 확인해 보십시오.”
“너랑 나 사이니까 그냥 네가 뜯어도 상관없는데… 일단 와있는 건 누구야?”
“사제 출신인 아르망 리슐리외와 부용의 고드프리 경,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입니다.”
“다행히 당장 필요한 인원들은 와줬네.”
그녀의 보고를 들으며 편지를 펼치니 안에는 익숙한 칼리나의 필체가 적혀있었다.
이런저런 수식어들을 빼고 간단히 요약하면 내 기대에 최대한 부응해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고 못 찾은 인원들은 최대한 빠르게 찾아준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실제로 못 찾은 건 하랄 블로탄밖에 없었는데 아무래도 발트해 근처에 있어서 그런지 찾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랄 블로탄이야 당장 급한 것도 아니고 정 필요하면 오토에게 부탁하면 되겠지.”
먼 곳에서 찾는 것보단 직접 경계를 맞대고 있는 사자공에게 문의하면 금방 찾아줄 것이다. 문제는….
“얀 3세가 쿠만족의 포로가 돼 있을 줄은 몰랐는데.”
보통 동료가 될 만한 NPC들은 부용의 고드프리처럼 특정 도시에 머물거나, 이비처럼 여기저기를 떠돌거나, 칼리나처럼 한 도시의 지배자인 경우가 많았다.
종종 산적 두목이 되어있거나 다른 영주의 밑에 기어들어 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처럼 감옥에 갇혀있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그렇다고 구출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보통 동료 NPC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빼내는 방법은 크게 3가지였다.
총독의 아들인 벨렌테를 지하 감옥에서 빼낸 것처럼 몰래 탈옥을 시키든가, 아니면 몸값을 치르고 데려오든가, 그도 아니면 무력으로 박살 내고 구출하든가.
“직접 구해주는 게 제일 좋긴 한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냥 몸값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직접 구하려고 해도 쿠만의 영토는 쓸데없이 넓은 데다 너무 멀어서 군사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직접 구하는 게 큰 호의를 살 수 있을 테지만, 돈이라는 완벽한 대안이 있는데 굳이 힘들게 적대국이라 할 수 있는 라틴 제국과 불가리아의 영토를 거칠 필요는 없잖은가.
이 부분은 나중에 처리하기로 하고 일단은 이곳에 와있는 이들부터 만나보기로 했다. 분명 리슐리외와 고드프리, 르네상스 3인방이 와있다고 했었지.
“일단 고드프리부터 만나봐야겠군.”
부용의 고드프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지금의 그는 부용의 영주였으며 십자군 원정에도 참전한 명예로운 영주였다.
최근에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환멸을 느낀 건지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준 뒤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귀족이었다.
솔직히 야만인인 내가 부른다고 올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그래서 일단 리슐리외부터 등용해서 니스를 좀 안정시켜놓고 제갈량마냥 삼고초려를 할 생각이었는데 의외다.
“뭐, 직접 얘기해보면 알 수 있겠지.”
때마침 저녁 시간이 다 돼가니 식사를 빙자해 이야기를 나누면 될 것이다.
* * *
다행히 고드프리는 내 초대에 응했고 나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처음 보는 사람과 단둘이 있는 건 꽤 고역이었지만, 일단 초대를 한 건 나였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이렇게 제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드프리 경.”
“허허, 다 늙어서 퇴물이 되어가는 이 늙은이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데 어찌 응하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그 상대가 최근 하이르 앗 딘을 참살해 널리 이름을 떨친 라그나르 백작님인데 그 누가 초대를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과찬이십니다. 저야말로 십자군을 이끄셨으며 명예와 정의로움, 공명정대함으로 이름 높은 고드프리 경을 뵐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 말에 고드프리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제가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 낸 모든 영광이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왕국의 멸망. 4차 십자군의 추악한 행태. 자신이 젊었을 때 쌓아 올린 모든 업적이 일순간 무너지는 걸 본 고드프리가 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그래서, 라그나르 백작님께선 무슨 일로 이 늙은이를 부르신 겁니까? 고작 이 늙은이의 말벗이나 하시기 위해 부르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음, 아시다시피 제가 칼리나 변경백 각하의 은혜를 입어 니스를 다스리는 백작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그분께선 능력 있고 인망 있으며 배짱이 있으신 분이지요.”
물론 적당히 대꾸하는 그의 말과는 다르게 늑대 같은 그 두 눈은 나를 살피고 있었다. 아마 내가 황제가 아닌 칼리나의 이름을 댄 의도를 파악하려는 거겠지. 물론 난 개의치 않고 내 할 말을 했다.
“다만 제 태생이 야만인이고 무식한지라 영지를 다스리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종교와 관련해서는 함부로 이야기하기가 망설여지더군요.”
“흠, 확실히 북부에서 오셨다면 종교에 관한 문제는 어려울 수밖에 없지요.”
고드프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망설이던 나는 승부수를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그의 성격상 질질 끄는 걸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고드프리 경. 저는 말주변도 없고 혀도 매끄럽지 못하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