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9화
“누구한테 편지가 왔다고?”
사자공은 읽고 있던 서류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물었고 전령은 정중하게 대답했다.
“니스의 정당한 지배자이자 검은 용군단의 일원인 라그나르 백작으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전령의 말이 사자공의 흥미를 끌었는지 그는 읽고 있던 서류를 한켠으로 치우며 고개를 들었다.
“아, 그 재밌는 야만인 친구 말이군. 하이르 앗 딘을 잡는다고 했었는데 정말로 잡을 줄은 몰랐어. 근데 그 친구가 내겐 무슨 일로?”
“안의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만 사자공께서 최대한 빠르게 답장을 주시길 원한다 하셨습니다.”
“답장을 주고 안 주고는 내 마음이네만, 그래도 내 흥미를 끌었으니 읽어는 줘야겠지.”
사자공은 봉인을 해제한 뒤 바로 편지를 펼쳤다. 편지지의 크기에 비해서 많은 내용이 담겨있진 않았는데 대필을 해준 건지 꽤 정갈한 글씨가 적혀있었다.
“하긴, 글을 모른다고 했었지.”
분명 누군가가 대필을 해줬으리라. 얼핏 지나가는 기억 속을 헤집어봤을 때 껌딱지마냥 붙어 다니던 사제가 하나 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그녀가 써줬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편지를 읽어나갔다.
[안녕하십니까. 작센과 바이에른의 정당한 지배자이시여.
저는 이번에 작은 공을 세워 니스의 영주이자 백작의 작위를 받게 된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고 합니다.]
분명 이전에 보고 직접 대화까지 나눴는데도 새롭게 자신을 소개하는 걸 보니 나름 흡족해졌다. 쓸데없이 정중하긴 하지만, 그래도 예의 바른 게 싸가지없는 것보단 낫지 않던가.
[다른 게 아니라 이번에 제가 이렇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사자공 전하께서 저를 오해하시기 전에 미리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사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저는 니스를 다스림에 있어서 온전히 저 혼자의 힘으로 다스릴 생각이었지만, 이런 제가 못 미더웠는지 황제 폐하께서 둘째 아들인 필리프 경을 제 고문관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런 황제 폐하의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 행동으로 인해 혹여 사자공 전하께서 저와 황제 폐하의 관계를 오해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 바르바로사 이 노망난 늙은이가 어떻게든 남부에 줄을 대고 싶은 모양이군.”
[저는 일체 오해를 받을만한 행동을 하고 싶지 않지만 황제 폐하의 배려를 물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하여 사자공 전하 슬하의 영명한 여러 자녀분들 중 한 분을 제게 고문관으로 보내주신다면 서로 간에 오해 없이 원만히 일을 풀어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곳 니스에서 사자공 전하의 현명하신 판단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제 간절한 청을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사자공 전하에게 경의를 담아.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안의 내용을 다 읽은 사자공은 피식 웃으며 편지를 내려놓았다.
“하, 이게 정녕 야만인이 보낸 편지인 건지 아니면 뱃속에 구렁이가 수십 마리 든 노회한 귀족이 보낸 편지인지 구분이 안 가는군. 칼리나는 절대 이런 식으로 글을 쓰진 못할 텐데.”
겉으로 볼 때는 굉장히 정중해 보이지만 결국 이건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내용이었다.
‘상황이 이러이러하니 이렇게 해달라. 싫어? 싫으면 그 뒷일은 나도 몰라.’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결국 저 얘기였고 만일 자신이 아들을 보낸다면 그의 손에, 더 나아가 칼리나의 손에 자신과 프리드리히의 아들이 인질로 잡히는 것이다.
이걸 프리드리히라고 모를까? 결국, 그는 자기 아들을 인질로 보내면서까지 칼리나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본인 말로는 중립을 지키고 싶다 얘기하지만 결국 자기가 결정권을 쥐고 자신과 황제를 쥐락펴락하겠다는 뜻이었다.
“별수 없군.”
야만인의 덫에 꼼짝없이 걸렸지만 말 그대로 방법이 없었다. 칼리나는 기존의 판도를 뒤흔들 정도로 새롭게 떠오르는 신성이었고 그들은 하이르 앗 딘이라는 거목을 순식간에 참살했으며 강력한 교황파인 제노바와도 관계를 개선했다.
이는 그들이 자체적으로 세력을 구성하기 시작했고 신성 제국을 지지하는 하나의 축으로 확실하게 성장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자신도 그들과 척을 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아들을 하나 보낼 수밖에 없었다.
“흠… 누구를 보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사자공은 자신의 여러 아들 중 영특한 오토를 떠올렸다. 동방 원정 시절 자신의 밑에서 종군하기도 했고 나름 실무도 경험했으니 가서 창피는 안 당할 것이다.
이왕 보내는 거 그래도 좀 똘똘한 놈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오토 정도면 필리프와도 어느 정도 급이 맞을 테고.
* * *
[신성 제국 남부 니스]
꽤 오래 걸릴 거라는 내 판단과는 다르게 사자공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일을 처리했다. 내가 편지를 보낸 지 2주도 안 돼서 그의 아들인 오토가 내 앞에 서 있는걸 보면 말이다.
“그대가 사자공 전하의 아들입니까?”
“그렇습니다. 라그나르 백작 각하. 편하게 오토라고 불러주십시오.”
“존경하는 사자공 전하의 아드님이신데 하찮은 야만인인 제가 어찌 말을 낮추겠습니까.”
그런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오토는 허리를 굽히며 더욱더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제 힘으로 이룬 업적이 없는데 어찌 아버님의 명성에 기대어 라그나르 백작님의 앞에서 교만을 떨겠습니까? 거기에 여기에 있는 동안은 백작님의 휘하에 들어왔으니 편하게 말을 놓아주십시오. 그래야 제대로 된 위엄과 군율이 바로 서지 않겠습니까?”
“허어, 과연 사자공 전하의 밑에서 군을 통솔하셨다더니 생각이 깊으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공적인 자리에서는 하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내 말에 뚱한 표정으로 오토를 노려보던 필리프는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말을 꺼냈다.
“라그나르 백작 각하. 실은 저도….”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필리프 경?”
“저기… 음… 그게.”
그는 오토의 눈치를 보며 말을 끝까지 꺼내지 못했고 나는 웃으며 그의 말을 차단했다.
“따로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찾아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아는 사이니까 따로 소개할 필요는 없겠군요.”
애초에 사자공이 바르바로사의 외사촌이니 둘도 친척인 셈이다. 물론 이 둘의 경우에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지만.
“오토 경. 일에 있어서는 여기 필리프 경이 그대보다 2주 정도 먼저 왔으니 혹 모르는 게 있다면 물어보게.”
“알겠습니다. 백작 각하.”
물론 말은 저렇게 했지만 절대 물어볼 일은 없을 것이다. 하인리히와 프리드리히가 서로 앙숙이라는 건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고 그건 당연히 그의 자식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으니까.
“필리프 경. 경께서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예산 확보 및 예산의 집행에 힘을 써주시고 추가로 기존의 문서들을 정리해 주십시오. 새롭게 정책을 시행하려고 해도 기준값이 있어야 그를 기반으로 정책을 펼쳐나갈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오토. 그대는 군사 경험도 있고 하니 당분간 이곳의 치안을 유지하고 법을 집행해주게. 하이르 앗 딘이 죽었다지만 그를 따르는 해적들의 잔당이 아직 남아있어서 주변의 치안이 썩 좋은 건 아니네.”
“맡겨주십시오.”
“말만 들어도 든든하군. 덕분에 믿고 자리를 비울 수 있겠어.”
“어디 가실 생각이십니까?”
“잠깐 제노바에 갔다 올 생각입니다. 필리프 경도 아시다시피 이곳의 항구 시설은 부서졌으며 배들은 대부분이 반파되고 기반 시설들도 빈약한 상황 아닙니까? 같은 항구 도시인 제노바라면 저희를 도와줄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여기까지만 얘기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여기서 내 청사진을 얘기해 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고 아쉬운 건 저쪽이니까.
“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주치의만 데리고 가는 데다 바로 옆이니 얼마 안 걸릴 겁니다. 일주일 정도면 충분할 테니 업무를 익힌다 생각하고 천천히 일을 처리하고 계시면 될 겁니다.”
뭐, 둘 다 원역사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오를 정도니 기본적인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황제나 사자공이나 달랑 자식 한 명만 보낼 리가 없지 않겠나. 당연히 그들을 따라오고 수행하는 이들이 있으니 내가 구성한 실무진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잘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 * *
나는 혹시 몰라서 힐데는 니스에 남겨둔 뒤 이비만 데리고 제노바로 향했다. 당연히 힐데는 자기도 가겠다고 했지만, 간신히 어르고 달래서 남겨놓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제노바로 가는 동안은 별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우웨에에에엑!”
“괜찮아?”
물론 괜찮아 보이진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주…그웨에에엑.”
이비는 배의 난간을 붙잡은 채 고해성사를 하며 속을 게워내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녀가 아랍에서 건너온 데다 날 만나기 전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뱃멀미는 안 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단 내릴 때까지는 가면 벗고 좀 누워있어.”
나는 핼쑥한 표정의 그녀에게 물통을 건넸고 이비는 물로 입을 헹군 뒤 얌전히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뭐, 백작이 주치의를 간호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그녀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였고 그녀의 얼굴에 난 수많은 흉터와 저주 때문에 타인에게 맡기기도 좀 그랬다.
“우으… 죄송합니다. 제가 주치의인데….”
“뭐 어쩌겠어. 빨리 낫기나 해.”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튼, 그렇게 그녀에게는 지옥과도 같았을 이틀이 지나자 마침내 가장 고귀하며 자신보다 더 높은 것을 인정하지 않는 공화국. 제노바에 도착했다.
이전에도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한 번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때와는 확연히 분위기가 달랐다. 수많은 환영인파는 물론이요 총독과 수많은 가문의 수장들, 그리고 내가 구해줬던 벨렌테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시오. 라그나르 백작.”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총독님.”
“안 그래도 이쪽의 일이 정리되는 대로 내가 직접 방문할 생각이었는데 이곳까지 직접 오게 만들어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덕분에 머리 아픈 업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요.”
내 가벼운 농담에 웃음이 터졌고 총독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얘기해주니 고맙소. 그대를 위해 작은 연회를 준비했는데… 바로 가겠소?”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제 주치의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오늘 하루는 쉰 뒤 내일부터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허어, 제 배려가 부족했군요. 벨렌테!”
“예. 아버님.”
“네가 직접 라그나르 경을 모셔라. 라그나르 경은 우리 가문의 귀빈이시니 대접하는 데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선 안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라그나르 경. 이쪽으로 오시지요. 부족하지만 제가 모시겠습니다.”
나는 각 가문의 수장들에게도 근시일 내에 찾아가겠다는 약속을 잡은 뒤 벨렌테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내게 쉴 수 있는 방을 안내해준 뒤 잠깐 동안 내 말 상대를 해주었는데 그와 대화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긴, 어린 나이에도 상행을 이끄는 건 물론이요 제노바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데 능력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안 그래도 인원이 모자랐는데 잘됐다. 여기까지 온 김에 벨렌테를 꼬드겨서 니스로 데려가야겠다.
마침 필리프와 오토도 와있으니 경험을 쌓고 친분을 쌓게 한다고 꼬드기면 아버지인 총독도 손쉽게 설득할 수 있겠지.
겸사겸사 상단과 함대를 운영할 노예도 하나 습득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