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8화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으며 니스에는 장밋빛 미래만이 가득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내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큰 오만과 자만심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왜 유비랑 조조가 인재에 목을 맸는지, 왜 제갈공명이 단명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답도 없는데?”
게임에서야 귀찮긴 해도 이것저것 누르면서 명령을 내리면 그만이었지만 여기선 그 모든 걸 내가 직접 해야 했다.
가령 시장을 짓는다고 하면 게임에선 어디에다 시장을 지어! 라고 명령을 하면 시장이 지어졌다. 반면 지금은 내가 가서 땅도 보고 건설업자도 부르고 관리 감독도 하는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손길이 닿아야 했다.
사실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는 토지라면 상관없겠지만 니스는 망하기 일보 직전인 도시였기에 답도 없었다.
심지어 탄원이랍시고 올라오는 내용을 보면 ‘누가 제 요강을 훔쳐 갔습니다, 나으리.’ ‘저놈이 제 닭이 낳은 알을 가져갔습니다.’ ‘저 개자식이 술값을 떼먹고 돈을 갚지 않습니다.’와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런 것들도 처리해야 되는 일이 맞긴 하지만 사실 나한테까지 다이렉트로 올라올 만한 일은 아니었다.
막말로 9급이 처리할 일을 장관이 처리하고 있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던가. 근데 그런 사소한 일조차 처리할 사람이 없으니 내가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정 특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힐데나 이비는 글을 읽을 줄은 알지만 이런 내정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기에 이대로 가다간 시작도 못 해 보고 망할 공산이 컸다.
“인재가 필요해.”
일단 나는 몸을 정갈히 한 채 방에 앉아 당장 쓸만한 동료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다행히 빙의한 뒤로 꾸준하게 미래 계획을 짜놓기도 하고 게임을 플레이하며 이런 상황에 맞닥뜨린 적이 많았기에 쓸만한 노예들을 일필휘지로 적어나갔다.
“일단 내정은 리슐리외가 원탑이지. 대체 이 양반은 어떻게 추기경이 됐는지 모르겠어.”
아르망 리슐리외. 루이 13세 시절의 명재상이자 루이 14세 시절 절대 왕정을 확립해 프랑스를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었으며 전 유럽의 궁정에서 ‘강철 발톱을 가진 이리’라고 불리며 경외받았던 인물이다.
“종교… 종교는…… 고드프리 정도면 되려나?”
부용의 고드프리. 원역사에서 1차 십자군을 이끌었으며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한 장본인이다. 물론 지금이야 4차 십자군의 행태에 실망해서 자신의 영지인 부용에서 잠적하고 있다는 설정이지만 그 이름값이 높고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평판이 나쁘지 않으니 종교화합의 인물로는 최적일 것이다.
“군사 관련해서는 사자공이 최고긴 한데….”
사자공의 사후나 생전이라면 적당한 설정이 붙은 사자공을 데려올 수 있겠지만 지금은 멀쩡히 본인이 살아있는 상태이기에 데려오는 건 불가능했다.
그도 아니면 이벨린의 발리앙 혹은 불가리아의 이반 아센이나 칼로얀도 나쁘지 않지만, 발리앙은 진작에 고인으로 처리됐을 거고 이반 아센은 현 불가리아의 차르이며 칼로얀은 그의 동생이라 논외다.
“아랍계열은 제외하고 동유럽에서 생각해보면… 아! 얀 3세를 가져다 놓으면 되겠네.”
얀 3세 소비에스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이며 튀르크와의 전투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빈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다. 오죽하면 오스만에서 그에 대한 경외심을 담아 ‘레흐스탄의 사자’라고 불렀을까.
정치적으로는 말이 조금 많이 나오지만 그래도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다들 고개를 끄덕일만한 인물이었다.
“하는 김에 바이킹에도 손을 뻗어둬야 하니까 하랄 블로탄을 데려오면 될 테고… 예술은 뭐, 르네상스 3대장이라는 미켈란젤로랑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정도면 되겠지.”
지금 시기에 예술은 그다지 좋은 취급을 받지는 못하니 재워주고 먹여주고 돈까지 준다고 하면 더 권할 것도 없이 알아서 봇짐 싸 들고 헐레벌떡 달려올 것이다.
“이 라인업이면 그래도 급한 불은 끄겠네.”
근데 사실 이 중에서 제일 급한 건 예술이었다. 예술이 밥 먹여주냐고 반문할지도 모르는데 나 같은 경우는 밥을 먹여주다 못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줄 것이다.
지금의 니스는 해적들의 도시라는 꼬리표가 달려있기에 어떻게든 이 오명을 씻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은 예술가들을 지원해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부흥시키는 것이다. 원역사에서도 괜히 메디치 가문이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게 아니다.
거기에 르네상스 3대 거장이라 불리는 자들은 기본적인 능력치와 적성, 스탯도 탁월해 예술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 써먹을 수 있으니 마냥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차라리 여기도 예루살렘처럼 외국인들도 받아들일까?”
애초에 영주인 나부터가 바이킹의 피가 흐르는 야만인이니 이슬람이나 타 지역의 외국인들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뭐, 야만인이라 꼭 지 같은 짓만 한다고 손가락질은 당하겠지만.
다만 외국인을 받아들일 때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법한 이들을 받아들여야겠지. 기본적인 법 제정도 해야 될 테고 말이다.
“모르겠다. 일단은 편지부터 써야지.”
나는 힐데와 이비를 불러와 적당한 격식을 갖춰서 니스를 이끌어갈 노예들을 초빙하는 편지를 적었으며 그와 동시에 칼리나에게 그들을 찾아달라는 의뢰서를 첨부했다.
게임이었다면 내가 일일이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동료 NPC들을 찾아다녀야겠지만 지금은 칼리나에게 ‘해줘’라는 편지 하나만 보내면 알아서 찾아줄 것이다.
그렇게 대강 일 처리를 끝내고 주치의인 이비의 무릎을 베고 잠이나 자려는데 상상도 못 한 인물이 나를 찾아왔다.
“누가 왔다고?”
“위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정당한 지배자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님의 둘째 아들이신 필리프 경께서 와계십니다.”
“왜!?”
예정에 없던 이의 방문이었기에 당연히 내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릴 수밖에 없었고 보고하러 온 전령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
“아니, 여기는 왜 왔대?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그,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골 때리네. 사람을 개무시해도 유분수지… 일단 들어오라고 해.”
“예. 백작 각하.”
난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불청객을 맞이했다. 응접실에는 훤칠한 모습의 필리프가 앉아있었는데 생김새가 프리드리히를 똑 닮은 게 누가 봐도 그의 아들임이 분명해 보였다.
“어서 오시오. 필리프 경.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그래, 편지 하나 없이 이 먼 곳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뼈가 담겨있는 내 말에도 필리프는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폐하께서 라그나르 경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워오라 하셨습니다. 단기간에 수많은 업적을 세운 라그나르 경의 밑에 있다 보면 배울 게 많을 거라 여기신 것 같습니다.”
배워? 야만인인 내게? 이건 뭐 거짓말도 뭐 그럴싸해야 속아주는 거지 날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그게 아니겠지요. 폐하께서 이 야만인이 뭔 짓을 하는지 감시하라고 그대를 보내신 것 아닙니까?”
“백작 각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감시라니요!?”
“우리 솔직해지는 게 어떻습니까? 막말로 니스 공성전에 폐하께서 병아리 눈곱만큼이나 도와주신 일이 있습니까?”
“무엄합니다! 지금 그대는 누구의 도움으로 백작이 됐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내 말에 필리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나는 그를 노려보며 얘기했다.
“아직 제 말 다 안 끝났습니다. 앉으십시오.”
내 표정이 워낙 살벌했는지, 아니면 이곳이 내 영토라 그런지 필리프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전 야만인이지 바보가 아닙니다. 필리프 경. 그대는 폐하께서 내게 이 니스를 내려준 게 무슨 황송한 은혜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인데 니스를 점령한 것도 나고 하이르 앗 딘을 참수한 것도 나입니다.”
“알지 모르겠지만 이 검은 용군단 연합을 만들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 것도 나고요! 그리고 그런 나를 도와주고 지지해주며 후원해 준 건 칼리나 변경백입니다. 즉, 이 땅에 대한 권리는 오로지 칼리나에게 있다 이 말입니다.”
“뭐, 특사로 콘라드 경이 온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순수하게 저를 치하하기 위해 온 건지 아니면 칼리나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온 건지 의심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뭐 웃으면서 넘어갈 수준이지요.”
“근데 갑자기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계승서열 2위의 필리프 경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니스로 온다? 이걸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필리프 경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논리정연하게 속사포로 말을 내뱉었지만 필리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 말이 구구절절 옳았고 애초에 지금 황제를 비롯해 저들이 내게 보인 태도는 무례함 그 자체였으니까.
“주관식은 어려워하시는 것 같으니 객관식으로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나는 선서를 하듯 손을 치켜든 뒤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면서 얘기했다.
“첫 번째. 니스 공략에 아무것도 한 건 없지만, 숟가락은 얹고 싶다. 그러니 황태자인 첫째 아들 대신에 둘째 아들을 섭정 및 고문관으로 내려보내 이 야만인 놈이 뭘 하나 감시하고 자문을 빙자한 내정간섭을 실시한다.”
“백작. 그건 오해….”
“아직 말 안 끝났다고 했습니다.”
“….”
“둘째. 사실 야만인 놈은 뭘 하든 상관없고 그 옆에 붙어있는 칼리나 변경백을 감시하며 이놈들이 만든 단체인 검은 용군단이 뭐 하는 단체인지 확인한다. 콘라드 궁정백이 뭐라고 보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술자리의 끝이 좋지 않았으니 폐하께선 합법적인 스파이를 하나 붙여놓고 싶으시겠지요.”
“백작. 우리 사이에 뭔가 큰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 진심 어린 소통을 하며 쌓여있는 오해를 푼다면….”
필리프가 애써 얘기했지만 난 듣지도 않은 채 세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셋째. 어떻게든 날 회유한 뒤 칼리나를 꼬드겨 황제파로 만든다. 굳이 황제파가 아니더라도 중립을 고수해준다면 상관없다.”
말을 마친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필리프를 추궁했다.
“어떻습니까? 첫째입니까. 둘째입니까. 셋째입니까. 아니면 셋 다입니까.”
“백작. 백작께서 이렇게 날카롭게 나오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라그나르 경의 입장이었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 설명을 들으신다면 오해를 풀 수 있을 겁니다.
“오해라… 필리프 경. 그대가 무슨 대답을 하든 그건 그대의 자유입니다만, 그대의 대답 여하에 따라 나는 물론이고 칼리나의 태도까지 바뀔 거라는 걸 유념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완강하게 얘기하자 필리프는 머리에 나는 식은땀을 훔친 뒤 앞에 놓인 찬물을 들이켰다. 그렇게 냉수를 한잔 들이키고 나서야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을 이어갔다.
“…후우, 뭐 솔직히 말해 백작께서 얘기한 이유들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건 부가적인 이유일 뿐이고 폐하께선 제가 많은 경험을 쌓길 원하고 계십니다. 아시다시피 황도에서 배울 수 있는 건 한도가 있지 않습니까? 폐하는 라그나르 경에게서 대담함과 자유로움, 창의성, 전략, 전술 등을 배우길 원하고 계십니다.”
“진심이십니까?”
“예. 신께 맹세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 정도면 인질로서 꽤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형 정도는 아니지만, 나 정도면 끗발 좀 먹히지 않냐고 주장하는 필리프의 모습에 나는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았습니다. 힐데!”
“예. 백작 각하.”
“필리프 경이 머무를 수 있는 처소를 안내해줘라.”
“알겠습니다.”
“경험을 쌓는다 하셨으니 한 사흘 정도 쉬었다가 제 일을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안 그래도 니스의 상태가 개판이라 일손이 모자랐거든요.”
“알겠습니다.”
필리프가 힐데와 함께 자리를 비우자 나는 그 자리에서 편지를 쓴 뒤 이비에게 건넸다.
“사자공에게 보낼 편지다. 확인 후에 적당히 수식어구를 넣어서 보내도록.”
“예. 주군.”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매지 말고 참외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매지 말라 하던가. 남들이 봐서 오해할만한 행동은 안 하는 게 좋다.
겸사겸사 쓸만한 인질 겸 노예도 하나 더 얻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