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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67화 (67/205)

▣ 067화

간단하지만 꼭 필요했던 절차가 끝나자 큰 술자리가 벌어졌고 특사로 온 이가 실세라고 불리는 궁정백 콘라드였기에 모든 영주들이 회식에 참여했다.

뭐, 개중에는 어젯밤 늦게… 그러니까 오늘 새벽까지 달려서 얼굴이 퀭해 보이는 영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불참으로 눈총 찍히는 것보단 낫겠지.

술잔이 두 번 정도 돌아가고 그와 함께 가벼운 이야기들로 어느 정도 어색한 분위기를 걷어내자 콘라드는 영주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라주며 이야기했다.

“사실 이곳에 있는 그대들은 잘 느끼지 못할 테지만, 칼리나 변경백과 라그나르 백작을 비롯해 이곳에 모인 영주들께서 이룬 업적은 온 세상을 진동시키고 있소.”

누가 그걸 모를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들에게 무식한 야만인이기에 적당히 어리숙한 표정으로 콘라드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물었다.

“고작 해적 하나 잡았을 뿐인데 말입니까?”

“푸하하, 하이르 앗 딘을 고작 해적이라고 얘기하다니, 과연 라그나르 백작이로군.”

“이 무지한 야만인이 칼리나 변경백 각하와 황제 폐하, 그리고 다른 여러 영주님들의 은총으로 하이르 앗 딘을 죽이는 작은 공을 세워 분에 넘치게 백작이라는 자리를 받게 됐습니다. 하여 세간의 소식과 세상 돌아가는 일에 많이 어두운 편이니 콘라드 경께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자기를 띄워주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그는 내가 따라준 술을 한 번에 들이킨 뒤 거만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흠, 하긴 하이르 앗 딘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다면 자세한 내용을 모를 법도 하지. 내 자네를 위해 하나 조언해주자면 무릇 모든 일을 바라볼 때는 눈앞의 것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크고 넓게 바라봐야 한다네.”

“가르침을 주신다면 귀를 씻고 경청하겠습니다. 이런 때가 아니라면 언제 콘라드 경의 깊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자네 제법 말을 잘하는군. 좋네. 잘 듣게나.”

사회생활을 하며 익힌 내 혼신의 빨아주기 스킬에 콘라드는 만족했는지 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칼리나는 이런 내가 어색한지 헛웃음을 짓고 있었고 힐데는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묵묵히 술과 음식만 먹고 있었다.

“우선 자네도 알겠지만, 남부에서 지중해 전반을 위협하던 골칫덩이를 없앤 게 첫 번째 업적이네. 해적이니 뭐니 하면서 멸시하지만, 그동안 아무도 하이르 앗 딘을 토벌하지 못한 걸 생각하면 그대들은 정말 큰 일을 해낸 것이네.”

당연하겠지. 하이르 앗 딘은 원래 레이드 몹 같은 존재다. 플레이어 혼자서 뚜까패려면 적어도 공작급은 되어야 한다.

이마저도 노련한 고인물일 경우를 상정하고 하는 얘기니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잡으려면 병력을 다 꼬라박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어떻게 하이르 앗 딘을 조지긴 조졌는데 병력의 절반이 증발했다? 당장 주변에 있는 영주들과 사이가 나쁘다면 옳다구나 하면서 쳐들어올 것이다.

그 때문에 하이르 앗 딘은 칼리나와 함께 건드리기 까다로운 세력에 속했다. 줘팬다고 뭐 얻을 것도 없는 데다가 거지 주제에 전투력은 쓸데없이 강하다 보니 게임을 끝내기 전에 전투력 측정기로 쓰이는 게 대부분이었다.

“다음으로 북부에서 교황파의 중심이었던 제노바와의 관계를 개선한 게 두 번째 업적이네.”

“개선했다기보다는 서로 간에 원하는 게 맞아 거래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뭐든 처음 내딛는 한 발자국이 중요하다네. 거기에 자네들은 제노바와 이권을 공유하고 있지 않나. 이를 빌미로 서로 관계를 형성하다 보면 제노바도 우릴 적대하지 않을 걸세.”

내가 볼 때 이건 김칫국이다. 뭐, 황제와 눈앞의 콘라드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겠지만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다.

제노바의 호의는 오직 나와 검은 용군단을 향할 것이고 황제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가와는 별개다. 벌써부터 숟가락을 얹을 생각을 하다니, 꿈도 참 야무지다.

“과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하, 모르는 건 죄가 아니네. 오히려 자네처럼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진 자가 크게 성공하는 법이네.”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 그리고 추가로 좀 더 얘기해보자면 성지로 가던 순례자들의 안전이 보장되니 이게 세 번째 업적이라 할 수 있겠네.”

“성지라면… 혹 예루살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오,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3차 십자군 이후 아이유브의 술탄 장기가 군사적 침공이 아닌 성지에 대한 순례는 허용했네. 문제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선 배를 타고 가야 하는데 하이르 앗 딘이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버리는 행위가 빈번히 발생했다는 거지,”

“하긴, 위치로 보면 니스가 지리적으로 괜찮은 곳이지요.”

“그래. 그것 때문에 온 세계의 지도자와 귀족들의 뇌리에 자네의 이름이 확실히 박힐 걸세. 사실 순례자들이 납치당하는 건 각국에서도 골치 아픈 일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순례를 막을 수도 없지 않나.”

사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이게 하이르 앗 딘 토벌에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이점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알리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특히 모두가 골칫덩이로 여기고 있던 놈을 처리해줬으니 누구와 외교를 해도 다짜고짜 내게 적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영지와 성, 백작이라는 작위는 그저 부수입에 불과하다. 정 초반에 땅을 얻고 싶다면 속된말로 ‘야만인’들이 즐비한 폴란드나 신성 제국 북부로 올라가서 야만인들 조지고 깃발 꽂아서 영주 되면 그만이니까.

“마지막으로 온 세계에 악명을 떨치던 해적을 처단해 사방에 제국의 힘을 알려 위신을 세웠으니 이게 네 번째 업적이네.”

아니, 거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해야 할 것이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내가 황제의 명을 받고 하이르 앗 딘을 토벌한 건 팩트다.

그걸 알면서도 칼리나를 비롯한 영주들이 동조했으니 이것만으로도 사자공은 큰 압박을 느끼겠지. 사자공 입장에선 남부가 황제와 대적하기를 바라고 있을 테니까.

이런 무형의 이득을 얻어가면서도 황제는 무엇 하나 손해 본 게 없다. 이쪽이 돈과 군사, 시간을 투자하며 구르고 있을 때 가만히 앉아있다 숟가락만 얻은 셈이니까.

이렇게 자기들 좋은 건 숨기고 적당히 듣기 좋은 말만 내뱉는 콘라드의 가식이 우스웠지만 원래 정치라는 게 그렇지 않던가.

거기에 황제와 나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기에 이쪽에서 손해를 보는 건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칼리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술자리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콘라드는 술잔을 높이 치켜들며 일장 연설을 내뱉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그대들의 단결된 힘에 감탄하셨소. 거대한 악을 무찌르기 위해 그간의 작은 원한은 잊고 대의를 위해 뭉치는 그 모습은 마치 전설상에 나오는 영웅들을 보는 듯했소.”

“본 궁정백은 그대들과 같은 영웅과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를 지경이오. 허나 본인을 가장 가슴 뛰게 만드는 건 그대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신성 로마 제국과 황제 폐하의 충실한 제후들이라는 점이오.”

“그대들과 같은 영웅들이 있다면 제국의 앞날은 창창할 것이오. 그러니 앞으로도 이와 같이 제국의 안위를 위해 힘써주길 바라오.”

뭐, 저 말을 간단히 해석하면 니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상관없는데 칼만 거꾸로 들지 말란 얘기겠지. 그리고 저게 콘라드가 이 먼 곳까지 내려온 진짜 이유일 것이다.

말로는 날 치하하기 위해서라고 얘기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덤이고 실제로는 남부 연합이 가진 힘을 깨닫고 칼리나의 의중과 이곳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게 주목적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처럼 슬쩍 운을 띄우며 얘기했지만,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은 채 오직 칼리나만을 바라보았다.

여기 있는 영주들은 멍청이가 아니었고 황제에 대해 크게 반감을 가진 이는 없지만 그렇다고 열렬한 황제파도 아니었다.

물론 황제파와 교황파로 조금씩 분열될 조짐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그게 심화되기 전에 하이르 앗 딘이라는 공공의 적으로 시선을 돌렸고 덕분에 칼리나를 필두로 한 남부연합을 창설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으음….”

생각보다 견고해 보이는 연합의 모습에 콘라드의 포커페이스가 깨졌고 그런 콘라드를 보며 칼리나는 느긋하게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으며 얘기했다.

“저는 언제나 그랬듯 제국의 수호자였습니다. 정작 제가 힘들 때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도와주지도 않았지만 말입니다.”

“변경백. 그건….”

하지만 칼리나는 자신의 말이 다 안 끝났다는 듯 손을 들며 콘라드의 말을 가로막은 뒤 마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황제 폐하께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십시오. 본 변경백은 고귀한 황제 폐하께서 사자를 때려잡든 아니면 사자에게 먹히든 아무 관심이 없으니까.”

“……그리 전하겠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라그나르 백작과 여기 있는 용군단의 일원을 건드린다면 상대가 누구든 마땅히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황제라도 이유 없이 우리를 건들면 조져버리겠다는 칼리나의 강한 의지에 콘라드는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진심이오?”

“용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다면, 한번 시험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콘라드는 대꾸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술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화기애애했던 술자리는 다소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와 함께 끝이 났다.

* * *

콘라드가 떠난 이후 영주들 역시 하나둘 자신의 영지로 복귀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서 떠나는 영주들을 직접 마중해주었다.

“그동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백작님.”

“고생은 무슨… 사실 전투야 자네가 다 했지.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라그나르 백작.”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말씀드린 제안은 어떻게 괜찮으신지….”

“걱정 말게. 누구 제안인데 거절하겠나. 애초에 이런 기회를 놓치는 멍청한 놈들은 귀족이라는 이름표를 떼버려야 할 걸세.”

“감사합니다. 조만간 이곳이 안정되는 대로 제가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꼭 보세나.”

이처럼 나는 떠나는 모든 영주들에게 내가 건넨 제안에 대해 확답을 받았는데 그 내용인즉슨 봉신 계약이었다.

물론 내가 그들 밑으로 들어가거나 그들이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자녀가 내 휘하에 봉신으로 들어온다는 거였다.

사실 귀족이라고 전부 다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는 건 아니다. 국가마다 정해진 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장남이 아버지의 작위를 승계한다.

그럼 둘째를 비롯한 나머지 자식들은? 뭐 적당히 유산 물려받고 기사나 용병이 되거나 관리가 되거나 사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난 그런 이들에게 남작이라는 작위와 함께 영지를 하사해 봉신으로 삼기로 약속했다.

물론 내 입장에선 온전히 내 사람들로 봉신을 채우는 게 가장 좋은 일이었지만,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걸렸고 지금의 니스는 그 잠깐의 시간조차 기다리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도시 상황이 개판이었다.

커티스 르메이 쉐프님 왈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고 하던가. 니스의 주민들 대부분이 해적이었기에 한 번 물갈이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대규모 이주 정책이 선행되어야 했지만, 사람이라는 게 배럭에서 마린 찍어내듯 뽑을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결국, 나는 각 영지에서 인원을 어느 정도 차출 받는 대가로 그들의 자식들에게 땅과 함께 작위를 내려주는 거래를 하게 된 것이었다.

이게 마냥 손해인 것도 아닌 게, 다른 영주들의 자식들과 봉신 관계를 맺는다는 건 서로 간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기존의 관계가 ‘검은 용군단의 일원’이라는 막대기 하나로 정의됐다면 지금은 ‘아들의 주군’, ‘연합의 일원’, ‘함께 싸운 동지’ 등으로 정의될 수 있겠지.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이 관계는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서 더욱 끈끈해질 것이다.

“일 년이면 충분하겠지.”

아마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빠른 시일 안에 모든 도시가 안정화 될 것이다. 니스의 현 상태는 최악이지만 항구 도시라는 지리적인 이점도 있는 데다 내게는 칼리나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었으니까.

거기에 내 고인물의 경험까지 포함한다면 니스는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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