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6화
바닥에 쓰러진 하이르 앗 딘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도끼를 한 번 털어낸 뒤 가볍게 손짓했다.
가벼운 손짓이었지만 뒤에서 내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기병들은 즉각 남아있던 해적 잔당들을 토벌하기 시작했고 나는 한숨과 함께 근처 바위에 주저앉았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신성을 남발한 대가가 너무 크다. 덕분에 손쉽게 하이르 앗 딘을 처리하기는 했지만, 교환비가 맞지 않는다.
이래서야 한동안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될지도 모른다. 이비가 있긴 하지만 애시당초 신성록이라는 건 인간의 힘과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니까.
“그건 그렇고….”
나는 전투의 마지막에 봤던 발키리를 떠올렸다.
북유럽판 저승사자인 발키리가 전장에 나타났다는 건 오딘의 힘이 강하게 발현됐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이는 재수 없으면 내가 발키리의 창에 찔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신성 중독이라는 건 그만큼 위험한 거니까.
“그나마 당분간은 싸울 일이 없다는 게 다행이긴 하네.”
다음에는 조심해야지라고 다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저 멀리 메이스에서 신선한 핏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힐데가 다가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라그나르.”
“고생은 나보다 네가 한 것 같은데….”
“자잘한 잔챙이 잡는 게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녀는 메이스를 가볍게 한번 털어낸 뒤 적당히 물에 헹궈서 다시 허리춤에 맸다. 가끔 저걸 보면 부러운 게 메이스는 약간 질량으로 두들겨 패는 거라 날붙이처럼 섬세하게 할 필요가 없다.
“뭐,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어? 아니 딱히 없어.”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는 할 말이 있습니다.”
“어… 어어. 해봐.”
혹시 잠깐 날 떠난다거나 하는건 아니겠지? 생각해보면 최근 힐데에게 조금 소홀하게 대한 것 같다. 나는 제발 그녀의 입에서 ‘당신에게 질렸습니다’라는 말이 안 나오기를 빌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이제 뭐 하실 겁니까?”
“글쎄, 잔당 토벌 다 끝내면 귀환해야지.”
“그러면 그때까지 시간이 남지 않습니까?”
“뭐, 도망친 놈들 데려오려면 그렇겠지.”
내 말에 힐데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신발과 갑옷을 벗더니 이내 곧게 뻗은 자신의 발을 드러냈다.
“그럼 아까 못 했던 마사지를 해주십시오.”
“……뭐?”
“전투 중에 귀라도 먹었습니까? 파드릴까요?”
“아니,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야. 근데 진심이야?”
“제가 언제 당신에게 헛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이 없긴 하지.”
“알면 됐습니다. 빨리 주물러 주십시오.”
나는 당황해서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힐데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없었고 나는 입맛을 다시며 힐데의 앞에 마주 앉은 뒤 장갑을 벗었다.
몸이 민감한 건지, 아니면 간지럼을 많이 타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힐데는 내가 마사지를 해줄 때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령 몸을 배배 꼰다거나 미묘하게 한숨에 열이 감돈다거나, 옅은 신음 소리를 낸다거나.
아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굉장히 엄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실제로 힐데의 반응이 그렇기도 하고.
“근데 너 한 3분 주무르면 얼굴이 반쯤 맛 가잖아.”
“누, 누가 느낀다는 겁니까!?”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근데 뭐 비슷한 느낌이긴 하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어렸을 때부터 당신이 계속 해줘서 습관이 된 것뿐입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라그나르는 용병인 만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일을 했고 당연히 힐데도 라그나르를 따라 돌아다녀야 했다.
당연히 긴 이동 거리는 어린 힐데가 감당하기 힘들었고 그때마다 라그나르는 힐데를 업어주거나 밤에 다리를 마사지하는 등 여러모로 피로를 풀어주었다.
아마 그때 들었던 습관이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는 모양이다. 라그나르가 버릇을 잘못 들인 게 아닌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솔직히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알겠어. 다리 이리 내.”
내 말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발을 내 무릎 위에 올렸고 나는 능숙하게 종아리부터 그녀의 다리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그저 가볍게 만진 것만으로도 힐데는 움찔거리며 살짝 몸을 뒤틀었지만 나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차라리 잘됐다. 최근에 응석이 많아진 것 같으니 제발 그만해달라고 엉엉 울어도 멈추지 않고 계속 주물러줘야지.
* * *
다리를 주무른 지 5분도 안 돼서 이제 됐다며 그만하라는 힐데의 말에도 불구하고 몰캉몰캉한 종아리와 말랑말랑한 발바닥을 잔뜩 주물렀다.
당연히 힐데는 온몸을 비틀고 칠칠치 못하게 침까지 흘리며 내게 그만해달라 애원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귀축처럼 그녀의 다리를 마음껏 주물렀다.
그 결과 나는 전신을 떨며 훌쩍이는 힐데를 뒤에 태운 채 이비의 기묘한 눈초리를 받으며 니스로 복귀했다.
나중에 이비의 오해를 풀려면 아마 한세월이 걸리겠지. 차라리 그녀한테도 마사지를 가르쳐줄까? 그녀라면 의술에 조예가 깊으니 이게 치료행위임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복귀하자 칼리나를 비롯한 영주들은 앞다퉈 나를 맞아주었다.
이는 내가 단순히 빈손으로 복귀한 게 아니라 하이르 앗 딘의 시체를 비롯해 100명이 넘는 포로와 함께 복귀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서 와. ‘로드’ 라그나르.”
“벌써부터 로드라니. 너무 샴페인을 일찍 터뜨리는 거 아니야?”
“뭐, 황제가 자기 입으로 뱉은 말이 있으니 지키겠지. 이렇게 목까지 가져왔는데 더 할 말이 있겠어?”
“하긴, 그리고 폐허가 된 니스 하나 얻겠다고 칼리나 너랑 척지는 건 미친 짓이긴 해.”
“당연하지. 그리고 임명 안해도 내가 하면 그만이야.”
황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얘기하는 칼리나를 보며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아마 사자공을 비롯해 대부분이 황제에 대해 저런 식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프리드리히가 기를 쓰고 황제의 권한을 키우려 애를 쓰는 거겠지.
“하하하. 역시 화끈하네. 그래서 우리 황금 고블린은 어쩔 생각이야?”
“황금 고블린?”
“하이르 앗 딘 말이야. 목만 베고 소금에 절여서 황제한테 보낼까?”
“그냥 통째로 보내지 그래. 황제 입장에서 직접 목을 자르는 퍼포먼스를 하고 싶어 할 텐데.”
죽은 놈 목 자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조선시대에도 무덤 파내서 목 자르던 걸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행위는 아니었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리고 적당히 황제한테 감사의 편지도 함께 보내줘.”
사실 이번 니스 공성전에 황제가 도움을 준 건 쥐뿔도 없지만, 일단은 나 역시 크게 보면 황제의 신하가 될 테니 적당히 감사를 올리는 게 명분상 좋다.
“바쁘지만, 네가 부탁하면 해줘야지.”
“많이 바빠?”
“당연하지. 너는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딸내미’와 노닥거리고 있을 정도로 시간이 넘쳐흐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칼리나의 가시가 돋친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 말을 하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인 것 같다 했더니 이게 이유였나.
나는 그녀가 더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서둘러 달래주기로 했다.
“음… 그러고 보니 곧 칼리나 네 생일이잖아?”
“말 돌리는 거야? 뭐 좋아. 얘기해봐.”
일단은 들어주겠다는 듯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날 바라봤고 나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최대한 굴려 가며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사실 네 생일 선물을 고르는 데 힐데의 도움을 받았거든. 알다시피 내가 이런 부분은 센스가 없잖아?”
말을 마친 나는 하이르 앗 딘 패거리를 약탈하면서 챙겼던 목걸이를 칼리나에게 내밀었다. 당연히 힐데와 함께 고른 건 아니지만, 칼리나에게 어울릴 거라 생각했던 건 진실이다.
남을 속일 수 있을 만한 거짓말을 하기 위해선 거짓에 약간의 진실을 타라고 하던가. 나는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내뱉었고 칼리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응… 당신치고는 섬세한 면이 있네. 뭐, 좋아. 내가 들은 거랑 좀 다르긴 하지만 이걸로 넘어가 주겠어.”
그녀는 내가 직접 걸어주길 원하는지 내게 다가와 고개를 쓱 내밀었고 나는 천천히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어울려?”
“네가 뭔들 어울리지 않을까.”
“푸핫, 고작 그런 얘기 들었다고 화가 풀리는 걸 보면 난 너무 쉬운 여자 같아. 안 그래?”
글쎄. 게임을 하며 그녀와 수십, 수백 번을 싸운 기억이 있는 나는 절대 그 말에 공감하지 못하겠다. 아무튼, 그녀의 화가 풀어진 것 같으니 서둘러 화제를 전환하기로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 건데?”
“일단 니스를 약탈하는 대신 내가 가진 돈과 이권을 분배하기로 했어. 당신이 다스릴 땅인데 약탈당한 상태로 건네줄 순 없잖아? 겸사겸사 당신이 잡아 온 해적들을 적당히 분배하고.”
“신경 써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그리고 제노바는 이곳에서 붙잡은 해적들을 노잡이 노예들로 가져가는 선에서 따로 이권은 챙기지 않기로 했고.”
원래 교통정리가 제일 힘든 법이다. 두 명이 뭔가를 합작해서 이뤄내도 그 결과물을 각자의 노력에 걸맞게 나누는 건 힘든 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처럼 수많은 세력이 개입한 경우 서로가 만족할 정도로 전리품을 분배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말하자면 잘해야 본전치기고, 못하면 욕만 얻어먹는 그런 일이라는 거다. 그나마 칼리나가 이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고 연합의 수장이니 최대한 말 나오지 않게 처리하는 것뿐이지.
“좀 도와줄까?”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 영지 다스릴 준비부터 해야 되지 않겠어?”
“그렇긴 한데….”
“내가 직접 도와주고 싶지만, 보다시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서 말이야. 다른 영주들한테 조금씩 도움받으면 될 거야.”
당연히 저건 그녀가 내게 던져주는 힌트였고 나는 그녀가 말하는 도움이 인맥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때문에 나는 형식상이긴 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올 동안 이곳 니스에서 벌어지는 승전연과 소소한 술자리에 전부 참석했다.
그렇게 적당히 영주들의 비위도 맞춰주고 사바사바도 하며 오랜만에 사회생활을 하는듯한 기분을 느끼는 사이 기다리던 황제의 교지가 도착했다.
문제는 그 교지를 가지고 온 전령이 라인팔츠의 지배자이자 제국의 궁정백인 콘라드였다는 거다. 나는 깜짝 놀라 그에게 물었다.
“콘라드 경. 어쩐 일로 여기까지 내려오셨습니까?”
“내가 직접 내려와서 그대를 치하할 만큼 자네의 업적에 폐하께서 만족하고 계신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면 이쪽에서 보낸 전령은 한참 전에 도착했을 텐데 왜 이리 반응이 늦었나 궁금했는데 콘라드를 보내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은 교지부터 읽겠네.”
말을 마친 콘라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엄숙하게 황제의 교지를 읽어내려갔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그대는 제국의 검으로서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서서 싸웠으며 수많은 적을 패퇴시키고 카지미에슈의 아들인 례셰크를 사로잡아 승전을 거두었다.
이러한 일은 맹장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대는 명예를 아는 자이기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제국의 위엄을 바로 세웠으며, 온 세계에 제국의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대의 이름은 길이 남아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건만 그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제국의 남부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던 하이르 앗 딘을 직접 참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처럼 제국의 안정을 위해 온 힘을 쏟은바, 그대의 위업을 칭송하며 그대에게 니스 영지를 부여하고 백작의 지위를 내리니 그대는 언제나 제국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가?”
뭐, 여기에 굳이 자기에게 충성하라는 얘기가 없는 걸 보면 칼리나가 적당히 커트했겠지. 의례적인 거라지만 그녀 입장에선 일말의 여지도 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나름 귀여운 짓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지만 나는 애써 표정을 감춘 채 최대한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제국에 충성을 다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당분간은 황제가 바라는 대로 제국에 충성을 다할 것이다. 어차피 니스는 시작에 불과하고 내 눈은 니스가 아닌 더 큰 곳으로 향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