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5화
갑작스레 내가 기병을 이끌고 나타나자 적들이 대놓고 당황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야 뭐, 후퇴를 빙자한 도망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기병들이 튀어나오면 당황할 만도 하지.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잖나. 친구.”
야심한 새벽이라 완벽히 얼굴을 알아보는 건 불가능했지만 횃불에 얼핏 드러난 모습만으로도 눈앞의 사내가 하이르 앗 딘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네놈은 누구지?”
그의 질문에 나는 양옆으로 기병들을 펼치며 적이 도망치지 못하게 막은 뒤 날 볼 수 있게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날 모르나? 얼굴을 직접 보지는 않았어도 최근 꽤 많이 들어봤을 텐데?”
그 순간 하이르 앗 딘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강렬한 분노를 표출하며 그르렁거렸다.
“네놈이 라그나르인가!?”
“맞아. 그래도 네놈을 죽일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있어서 다행이군.”
라그나르라는 말에 하이르 앗 딘은 물론이고 그 휘하의 병력들의 얼굴에는 허탈함과 체념이 깃들었다. 화용도에서 관우를 만난 조조가 느낀 절망감이 이러했을까?
허나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으니 조조는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지만, 하이르 앗 딘은 오늘 이곳에서 죽을 것이란 점이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죽을힘을 다해 도망쳤는데 그 종착지가 여기라니… 안타깝게 됐어. 그래도 물 좋고 공기 좋고 나름 운치 있는 곳이니 무덤으로는 딱 아닌가?”
“이런 개자식! 난 네놈과 적대한 적이 없거늘 왜 나를 공격한 거지?”
“해적 주제에 명분을 따지다니, 어이가 없군.”
“…뭐?”
“그리고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래도, 굳이 이유를 꼽자면… 정의 집행?”
“야만인 따위가 정의를 논하는가!?”
“해적이 정의를 논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
하이르 앗 딘이 뭐라 지껄이건 명분은 이쪽에 있기에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와 설전을 벌이는 사이 기병들이 슬금슬금 적들을 포위했고 나는 도끼를 꺼내 들며 최후통첩을 했다.
“자, 대화는 이쯤이면 충분히 한 것 같은데 혹시 유언으로 남길 말이라도 있나?”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현 상황을 확인하더니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내 휘하에 있는 병력만 기병 100에 보병이 300을 넘어갔다.
반면 그의 휘하에는 온갖 어중이떠중이를 다 합해도 채 200이 되지 않았기에 이대로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를 게 없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아는 걸 그가 모를 리 없겠지.
“거래, 거래를 하지.”
“거래라… 그대가 그대의 목숨값에 걸맞는 무언가를 대가로 내밀 수 있을지 모르겠군.”
“베네치아의 약점을 잡고 싶지 않나?”
“오, 그건 좀 흥미가 당기는 이야긴데?”
과연 해적 놈답게 나름대로 머리는 잘 굴러가는 모양이다. 물론 제 살길에 한정해서지만.
“솔직히 내 머리를 벤다고 이득 볼 게 뭐가 있나? 보아하니 제노바까지 끌어들인 모양인데 차라리 베네치아를 무너뜨리고 그들이 가진 이권을 손에 넣는 게 더 이득 아닌가?”
“해적 놈이 내 앞날까지 생각해주다니 눈물 날 지경이군.”
물론 추후에 베네치아와 적대하게 되는 건 맞고 그때를 대비해 베네치아가 하이르 앗 딘과 손을 잡은 증거를 가지고 있으면 명분 싸움에서 도움은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베네치아는 잡을 수도 없는 고기에다 어찌어찌 잡는다고 한들 소화시키기는커녕 다른 날강도들에게 뺏기게 될 것이다.
청새치를 잡으면 뭐 하는가. 악랄한 상어 같은 놈들에게 다 뺏길 텐데. 나는 중세판 노인과 바다를 찍을 생각은 없다.
“그래서 거래를 할 건가 말 건가?”
“내용부터 들어보고 결정하지.”
“거절한다. 보나 마나 얻을 거 다 얻고 날 죽일 생각 아닌가?”
내 심리를 꿰뚫은 듯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하이르 앗 딘을 보며 나도 모르게 감탄의 박수를 쳤다. 어쩌면 이 녀석은 천재가 아닐까?
“보기와는 다르게 똑똑하군. 대단해. 근데 애초에 똑똑했으면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만.”
“야만인 놈들은 다 말을 좆같이 하는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는 건가?”
“푸하핫, 그래도 복수는 하고 싶지 않나? 여기서 이런다고 자네가 죽는 건 바뀌지 않지만, 혼자 가긴 억울하잖나? 조금만 기다리면 베네치아 친구들도 함께 곁으로 보내주지.”
“그러느니 그냥 죽고 말겠다. 그럴싸한 말로 날 꼬드겨봤자 네놈 좋은 일을 내가 해줄 거라 생각하나?”
“완고하군.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나와 결투를 벌여서 네가 승리하면 놔주도록 하지. 반면 내가 이기면 그대로 죽는 거고.”
모 아니면 도. 극단적인 선택이었지만 아마 하이르 앗 딘에게 이보다 더 간절한 건 없으리라. 하지만 그는 여전히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날 보며 으르렁거렸다.
“내가 널 이겨도 날 놓아줄 거라는 보장이 있나?”
“해적 놈이 약속 운운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나의 이름과 내가 모시는 신. 오딘께 걸고 맹세하지. 애초에 이 결투 자체가 나와 그대의 신앙심을 시험하는 게 아닌가?”
“…….”
하지만 하이르 앗 딘은 침묵했고 결국 나는 한 발짝 양보하기로 했다. 원래는 이대로 죽여도 상관없었지만, 그냥 죽이는 것보단 뽑아먹을 수 있는 건 전부 뽑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나는 품속에서 칼리나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꺼내 하이르 앗 딘에게 던졌다.
“이건 칼리나의 면죄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해적 주제에 글을 읽을 수 있는지 그는 그 자리에서 인장을 뜯어 안의 내용을 확인하더니 날 노려보며 물었다.
“진심이겠지?”
“이것까지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지. 근데 어차피 자네는 내 자비에 기대는 협상을 할 수밖에 없잖나?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많이 양보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내가 여기서 널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찍어눌러도 이상할 게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자 그는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품속을 뒤적여 서류 더미를 내밀었다.
“좋아. 이건 내가 챙겨온 증거다. 이 정도면 베네치아를 압박할 수 있겠지.”
내가 턱짓하자 옆에 서 있던 기병이 달려가 서류를 받아왔고 나는 그 자리에서 대강 훑어보았다. 증거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베네치아와의 거래내역이 적힌 장부였다.
다만 그냥 장부가 아니라 이중장부였는데 베네치아에서 빼돌린 물품들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안에는 외교관의 서명은 물론이요 도제의 직인까지 찍혀있었기에 비장의 카드로 베네치아를 추궁하거나 전세를 뒤집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그럼 이걸로 거래는 끝났고, 약조한 걸 이행할 때가 왔군.”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한 참이었는데… 네 목을 칼리나에게 보내주면 기뻐하겠군.”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 말을 끝으로 하이르 앗 딘은 말에서 내린 뒤 두 자루의 커틀러스를 뽑아 들었다. 쌍검이라… 저 녀석은 쌍검이 패배의 상징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한 쌍검을 들어서 끝이 좋았던 건 외계인 신관밖에 없다.
“횃불을 밝혀라!!!”
내 말에 병력들이 횃불을 환하게 밝힌 채 동그랗게 둘러쌓았고 나 역시 말에서 내려 하이르 앗 딘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사실 원래부터 이렇게 결투를 벌일 생각이었다. 난전 중에 상대를 죽이는 것보단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도움 없이 내 손으로 하이르 앗 딘의 목을 따야 의미가 있었으니까.
가령, ‘전투에서 승리했고 적장을 죽였다!’라는 것보다 ‘한중 전투에서 황충이 하후연을 잡았다.’, ‘관우가 홀로 나가서 안량을 죽였다.’ 이런 식으로 소문이 퍼지는 게 내 위명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이르 앗 딘이 스스로 나서서 베네치아를 압박할 증거품까지 건네주고 결투에 응해주기까지 하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하이르 앗 딘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환생이 아닐까? 하긴, 생각해보면 원래 게임에서도 해적이나 도적들은 명성작과 명예작은 물론 암담하고 우울한 초반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그런 점을 고려해보면 그는 황금 고블린 그 자체였다. 다만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는 다르게 황금 고블린은 죽여서 루팅을 해야 했기에 나는 그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밝은 낮에도, 가장 어두운 밤에도,
바이킹의 도끼에서 도망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리라.
천공신 오딘의 권능을 의심하는 자들이여,
모두 내 앞에 굴복하리니, 두려워하라 에인헤랴르의 힘을!”
스스로도 이 이상 신성의 힘을 끌어쓰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에인헤랴르의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이제는 모르겠다. 내가 라그나르인지 아니면 라그나르에 빙의한 건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전투에 대한 희열로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작하지.”
* * *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에 빈틈이 보이던 녀석이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거대한 벽으로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본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확실히 그에 대한 소문을 듣기는 들었다.
단기로 폴란드의 병사들을 쓸어버리고 례셰크를 사로잡았다던가? 그게 완전히 거짓은 아니겠지만 육지 놈들이 그럴듯하게 부풀리고 과장시킨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해적질을 하며 동로마의 바랑기안 가드와도 싸운 적이 있기에 바이킹의 호전성과 전투력에 대해선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사내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저 가만히 서서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있을 뿐인데 어딜 어떻게 들어가도 자신의 목이 잘리는 미래가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려움과 공포에 잠식되어 있을 순 없다. 오늘 이곳에서 저 개자식의 목을 베고 반드시 살아나갈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화려하게 복귀해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리라.
“흐아아아압!”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둘렀지만 상대는 방패로 자신의 검을 튕겨내더니 손에 들고 있는 그 투박한 도끼를 휘두르며 자신을 압박해왔다.
날카로운 파공음에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상대는 더 이상 공격해 들어오지 않았다. 봐주는 건지 아니면 신중한 건지 모르겠지만, 몇 차례 더 검을 섞자 상대의 공격 방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철저히 방패로 공격을 막거나 튕겨낸 뒤 그 틈을 노려 공격해 들어오는 방식으로 싸웠다. 방패를 쓰는 적과 싸워본 게 처음은 아니지만 눈앞의 사내는 굉장히 까다로웠다.
절묘하게 자신의 공격을 튕겨내는 데다 빈틈이라고 생각해서 검을 찔러 들어갔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평생 방어만 할 생각인가? 바이킹이라는 이름이 아까운데 밑에 달려있는 건 떼는 게 어떤가?”
가볍게 도발해봤지만 상대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방패를 끌어 올리며 천천히 자신을 압박해 들어왔다. 어차피 이대로 시간이 지나봤자 무너지는 건 자신일 테니 도박수를 두기로 했다.
“흐아압!”
거대한 기합 소리와 함께 상대의 방패를 부술 듯이 검을 내리쳤고 상대는 늘 그렇듯 방패로 자신의 검을 튕겨냈다.
“어설프구나!”
하지만 이미 상대가 방패로 받아칠 걸 알고 있었기에 가볍게 휘둘렀고 그 결과 오히려 자세가 무너진 건 상대방이었다.
그 틈을 노려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검으로 상대의 목을 베었지만, 그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커헉!!”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통증과 기울어진 시야는 자신이 땅바닥을 나뒹굴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보아하니 도끼의 머리 부분으로 자신의 발을 걸어서 잡아당긴 모양이었다.
“젠장… 젠장!!”
서둘러 다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켜봤지만, 여전히 세상은 핑핑 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사내는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비웃었다.
“이게 전부인가? 잘난 듯이 입을 털기에 실력이나 한번 보려고 재롱을 떨게 해줬는데 고작 이 정도라면 실망스럽군.”
그 말에 수치심과 분노가 끓어올랐고 괴성과 함께 검을 지팡이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회하게 해주마.”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내게 그런 식으로 얘기했는데, 아직까지 살아있는 놈이 없더군.”
자신은 그런 어중이떠중이들과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다시 한번 달려가서 검을 휘둘렀지만 여지없이 파훼된 뒤 이번에는 가슴팍을 걷어차였다.
“컥!”
“더 할 텐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은데.”
굳이 상대가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고 있을 정도로 전투는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상대의 옷은 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았고 도끼날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자신의 검은 깨끗했고 날은 상해있었으며 옷은 만신창이였고 몸 곳곳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더 이상 검을 휘두를 가치가 없어 보이는군.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
상대는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목을 베기 위해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하지만 알고 있을까? 다 잡았다 생각하고 긴장을 풀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걸? 실제로 그는 무방비하게 방패를 내리고 있었고 자신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찔러 들어갔다.
남들은 비겁하다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던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그렇게 내 검이 상대의 가슴을 꿰뚫었다고 생각한 순간 정작 가슴이 꿰뚫린 것은 자신이었다.
“커헉!”
엄청난 통증과 함께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삐쭉 솟아 나와 있는 창날을 본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반면, 눈앞의 사내는 그런 자신을 피식 웃으며 바라보더니 어린아이에게 얘기하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거 알고 있나? 바이킹들이 전쟁터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건 다름 아닌 발키리라는 걸?”
“바, 발키리라고? 크윽!”
“전쟁에서 뛰어난 전사들을 죽여서 데려가는 죽음의 천사들이지. 뭐, 사실 이것 자체가 조금 와전된 얘기기는 해. 실상은 단순히 장렬하게 싸우다 죽었어야 할 전사들을 데려가는 것뿐이거든. 말하자면 마지막을 보기 좋게 장식해 주는 거지. 그게 아니면 통수치는 건데 오딘 신앙이 흥할 리가 없잖아?”
사내가 혼자서 뭐라 지껄이고 있었지만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슴에선 여전히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고 몸이 빠르게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음, 쓸데없는 말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오딘께선 자네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야. 나보다 먼저 발할라에 부르시는 걸 보면 말이야.”
“이런 개….”
사내는 자신의 발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더니 이내 윙크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먼저 가서 오딘께 안부 전해주게.”
움직이지 않는 손을 뻗으며 그에게 욕설을 내뱉고 싶었지만 역류하는 피가 입 안을 가득 채웠고 점점 시야가 어두워지며 몸이 굳어 가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