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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64화 (64/205)

▣ 064화

기세 좋게 하루 만에 니스를 점령할 기세로 돌격을 한 것치고 공성전은 일주일이 넘게 지속됐다. 당연히 적이 수성을 잘 해내서 그런 건 아니고 우리 쪽에서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고 있던 것뿐이다.

애초에 머릿수는 물론이요 병력의 질까지 밀리는데 버프가 떡칠된 5천의 정예병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사실 하이르 앗 딘의 한계는 명확했다. 육군의 부재. 훈련되지 않은 해적들. 비축되지 않은 물자, 주변 영주들과의 적대적인 관계 등등.

해군으로 다 해 먹으려면 차라리 영국처럼 섬이든가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잖은가. 결국, 전쟁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육군이었다.

거기에 벨렌테까지 구출돼서 고삐가 풀린 제노바는 지금까지의 분노를 표출하듯 해상에서 니스를 포위한 채 하이르 앗 딘을 미친 듯이 두들겨 패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굳이 공성 병기를 투입시킬 것도 없었다. 이미 하이르 앗 딘은 영혼까지 털리고 있었으며 적들의 사기는 바닥을 찍다 못해 지하실 공사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이렇게 시간을 끄는 이유는 모두가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린가 싶을 텐데 귀족들도 사소한 곳에서 자존심을 세우고 감성이 이성을 지배하는 등 평범한 사람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

한마디로 그들 입장에서 돈이랑 시간을 들여서 이곳까지 왔는데 들러리마냥 적당히 공성하는 거 구경이나 하다가 끝나고 집에 가면 기분이 좋겠냐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니 하다못해 술자리에서 ‘아, 내가 하이르 앗 딘을 토벌할 때 검을 뽑아 들고 성벽을 넘었는데…’와 같은 무용담 정도는 늘어놓을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나는 영주들과 매일 밤마다 니스에서 도망치는 탈영병들을 함께 처단하기도 하고, 중무장한 중장보병들을 데리고 철저한 보호 아래 함께 성벽을 타고 올라가는 등 약간의 보여주기식 작업을 진행했다.

이게 마냥 정신 나간 소리는 아닌 게 르네상스 시절에도 귀족들이 익스트림 스포츠 같은 개념으로 카라콜(말에 올라 권총을 들고 적에게 달려가 총을 쏘고 난 뒤 되돌아오는 전술)을 하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에 이런 식으로 함께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귀족들 간에 유대감도 생기고 그 사이사이에 껴있는 정치적이고 복잡한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기에 이렇게 시일을 질질 끌고 있던 것이다.

괜히 ‘마! 내가 느이 영주님이랑! 으이! 술도 마시고! 같이 성벽도 넘고! 탈영병들도 조지고! 다 했어 임마!’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다.

물론 이런 짓도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귀족들의 유희에 어울려주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얄짤없다. 그리고 이 어린애 장난 같은 짓도 오늘 밤으로 끝이었다.

“그동안 고생했어. 라그나르.”

밖에서 지도를 펼친 채 주변을 살피고 있는 내게 칼리나는 와인병과 고기가 한가득 담긴 접시를 하사하며 내 고생을 치하해주었다.

“고생이랄 게 뭐가 있어. 이런 식으로 인맥도 만들고 친분도 쌓는 거지. 거기에 높으신 분들 비위 맞춰주는 건 이골이 나 있거든.”

“흐응, 혹시 거기에 나도 껴있는 거야?”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마이 레이디.”

내가 광대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칼리나에게 인사한 뒤 조심스럽게 손등에 입을 맞추자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키득거렸다.

“푸훗… 그거 당신이랑 되게 안 어울리는 거 알아?”

“…그 정도야?”

“그래도 뭐 나쁘진 않아. 솔직히 당신의 시중을 한번 받아보고 싶지만 다음으로 미뤄야 될 것 같아. 당신도 알다시피 이제부터 술 취한 노인네들 뒤처리를 해야 되거든.”

한숨 어린 그녀의 대답에 나는 진심을 담아 대꾸했다.

“그것 참 유감이야.”

“유감 정도가 아니라 끔찍해.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아저씨들이 술에 취해서 서로 자기 무용담을 내뱉으면서 술주정을 해대는데… 후.”

그녀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그런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따뜻한 위로의 말밖에 없었다.

“조금만 참아. 덕분에 아군의 군기가 흐트러진 건 사실이잖아? 병력들에게도 확실히 술이랑 고기를 내렸지?”

“당연하지. 특히 술은 평소보다 과하게 내렸으니 하이르 앗 딘 쪽에서도 반응이 올 거야.”

대화에서 알 수 있듯 지금 나와 칼리나는 하이르 앗 딘을 꼬드기기 위한 함정을 파고 있었다.

칼리나는 보란 듯이 적들의 코앞에서 공성병기들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완성되어 가는 공성병기를 보는 하이르 앗 딘의 속이 얼마나 타들어 갈지는 뻔할 뻔 자다.

하이르 앗 딘뿐 아니라 그 휘하의 병사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는데 아마 죽음의 카운트다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기분이겠지.

그 때문에 우리는 일부러 다 이겼다는 듯 나태한 모습을 보이며 긴장을 풀고 군기가 해이해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 원래 제대로 된 공격을 하기 전에 배불리 잘 먹이는 건 일반적인 일이니 저들은 우리가 공격을 유도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할 것이다.

설사 깨달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하이르 앗 딘에게 남은 선택지는 몇 없었고, 공격해오지 않으면 예정대로 공성을 진행하면 그만이니까.

“그럼 야간에 잠도 못 자고 매복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란 얘기네.”

“맞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고생해줘.”

칼리나는 가볍게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겨준 뒤 떠났고 나는 고기 한 점에 술 한잔이라는 사치스러운 만찬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귀찮게 매일 밤마다 경계를 설 것도 없이 에인헤랴르의 힘을 쓴다면 오른쪽 상단에 생기는 미니맵으로 적의 급습 여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야 내 몸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조금씩 신성 중독의 증세를 보이고 있는 데다 최근에 와일드 헌트까지 사용하며 몸을 너무 혹사시켰다.

게임에서야 캐릭터가 신성 중독에 걸리면 욕 한 번 날려준 뒤 세이브 파일을 로드하거나 치료를 하면 그만이었지만 현실은 아니다. 일단 지독한 후유증이 남을 테고 두 번 다시는 신성력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간단히 얘기하면 깔때기와 같은 거다. 신성이라는 이름의 물을 한 번에 왕창 쏟아부으면 결국 흘러넘치고 만다. 그러니 최소한 쏟아 넣은 물이 다 빠져나가거나 하다못해 넘치지 않을 정도로 조절을 해줘야 한다.

그렇게 차근차근 깔때기의 크기를 키워나가야 하는데 내가 이렇게 신성력을 끌어다 써도 무사한 건 원체 깔때기가 커서 그런 것뿐이다. 이런 식으로 신성력을 남발했다간 말라 죽는다.

“초보 때 그걸 몰라서 풀로 버프 땡기고 다니다가 게임 오버 당했었는데.”

캐릭터가 미쳐서 자신의 손으로 애지중지 키워온 영지를 초토화시키고, 함께 여행을 다닌 동료들을 전부 살해하고, 마지막에 자살하는 모습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이런 것 때문에 다 기독교 기독교 하는 거지 뭐.”

사실, 플레이어가 전장에서 활약할 수 있는 신앙은 오딘 신앙만 한 게 없다. 그건 기독교든, 조로아스터교든, 이슬람이든 뭐든 간에 따라올 수 없다.

이것만 보면 전투가 절반인 게임이니 사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몇 번이나 얘기했듯 이뤄지는 기적의 궤를 달리한다.

일단 부작용이 거의 없는 데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장님에게 빛을 선사하는 건 기본이요 병력을 출진시킬 때 군수물자가 필요 없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들어보았는가? 말 그대로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 끊임없이 나오는데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개사기 능력이었다.

생각해봐라. 이런 기적이 함께한다면 병력들은 방어구와 장비만 들고 뛰쳐나가도 된다는 말이다. 전장에서 작전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게 군수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보급선이 끊어질 염려 없이 계속 진군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인 셈이다.

거기에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 플레이어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선 거진 교황에 오를 정도로 신성력이 쌓여야겠지만 그래도 여벌 목숨을 하나 더 가지고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건 엄청난 이점이었다.

“그래도 오딘 정도면 나쁘지 않지.”

스스로를 다독이며 와인을 들이킨 뒤 고기를 씹고 있는데 갑주와 방패, 메이스로 무장한 힐데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며 보고했다.

“라그나르. 적들이 성벽 위에서 개미 새끼마냥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된 게 한 치도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 없네.”

뭐, 나로선 나쁘지 않다. 적들이 발악을 할수록 내 명성과 명예가 올라갈 테니까.

“병력들 다 깨우고 손님 맞을 준비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힐데는 공적인 일이라 그런지 평소와는 다르게 칼같이 대답했고 나는 기름을 잔뜩 먹인 도끼를 꺼내 어깨에 걸친 뒤 막사를 나섰다.

“최후의 도박이 실패한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

* * *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하이르 앗 딘의 기습 작전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무려 200명이나 동원된 대규모 작전이었지만, 전사했고 몸 성히 돌아간 건 채 10명이 되지 않았으며 남은 이들은 전부 포로가 됐다.

뭐, 포로라고 해봤자 어차피 그 근본이 해적인 만큼 보여주기식 참수를 당할 테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나았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여주기식이란 각 영주들이 포로를 몇 명씩 할당받아 자신의 영지로 데려간 뒤 그들의 죄를 낱낱이 고하며 처형하는 것을 뜻한다.

영주 입장에선 자신의 치적을 널리 알릴 수 있어서 좋고, 영지민들 입장에선 놀거리가 없는 이 시대에 죽어 마땅한 나쁜 놈들이 처형당하는 걸 즐길 수 있으니 가히 일석이조라 할 수 있겠다.

말이 조금 샜는데 결과적으로 적들은 목표물이었던 공성 병기에는 손도 못 댄 채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했고, 그렇게 최후의 도박수가 실패한 하이르 앗 딘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없었다.

적당히 혼란한 틈을 타서 야반도주를 하거나, 수하들을 다독여 최후의 한 명이 죽을 때까지 결사 항전을 하거나.

물론 명예도 자존심도 없는 해적인 만큼 당연히 전자를 선택할 거라 예상했고 나는 승기가 넘어오는 걸 확인한 뒤 휘하의 기병들을 끌고 하이르 앗 딘이 도망칠만한 길목에 잠복 중이었다.

물론 잠복이라는 게 그렇듯 적이 올 때까지는 할 게 없었으므로 나는 습기를 막기 위해 바닥에 모포를 깔고 적당히 바위에 기대앉아서 시간을 때웠다.

“이쪽으로 안 오면 말짱 꽝인데.”

“그나마 가능성이 제일 높은 곳이 여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제일 맛있는 걸 뺏기면 억울해서 잠도 안 올 것 같아.”

그렇잖은가. 후방을 급습해서 보급을 끊고 제노바 총독의 아들인 벨렌테를 구한 데다 실질적인 공성도 이끌었으며 귀족 아저씨들이 술 마시면서 놀고 있을 때 잠도 못 자고 대기하고 있다가 적의 기습을 막아낸 것도 바로 나다.

이런 개고생을 했는데 그 개고생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르 앗 딘을 다른 놈이 홀랑 채간다? 분통 터져서 정신이 나가지 않을까?

“그럴 땐 그냥 운명이거니 하고 받아들이는 게 어떻습니까? 아, 손은 계속 움직여 주십시오.”

힐데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솔직히 30분 전부터 계속 쓰다듬어주고 있던 것 같은데 손에 경련이 올 것 같다.

“흐음, 머리 손질은 그 정도면 됐습니다. 다음은 다리를 마사지해 주십시오.”

요새 부쩍 힐데의 응석이 많아졌다. 혹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나 싶어 상태창을 살펴보거나 슬쩍 물어봐도 별다른 문제점은 보이지 않아 그냥 넘어가고 있지만….

“조금 힘든데 내일 하면 안 될까?”

“오늘 하루 종일 뛰어다니느라 발의 피로가 안 풀리면 못 잘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힐데와 이비 역시 나 못지않게 고생했다.

이비는 밀려오는 부상자(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존재로 인해 사망자가 줄어들었고 이는 그녀의 일이 늘어남을 의미했다.)들을 돌보느라 하루에 4시간도 못 잘 정도였고 힐데는 병사들의 신앙심을 고취시키며 정신무장을 철저히 시키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힐데의 투정에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신발을 벗겼고 발을 마사지를 해주려던 찰나 주변을 정찰하고 있던 기병이 허겁지겁 다가와 보고했다.

“라그나르 경. 이쪽을 향해서 퇴각하는 일련의 무리를 확인했습니다.”

그 모습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장을 챙긴 뒤 밖으로 달려나갔고 힐데는 굉장히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나를 따라 나왔다.

정찰병의 말마따나 대규모의 무리가 횃불을 치켜든 채 이곳으로 오고 있었고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당신 말이 맞았군요.”

“뭐, 해적 놈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

“야만인 해적 출신이라 그런지 사고방식이 비슷한가 보군요.”

“그렇게 얘기하면 또 할 말이 없긴 한데….”

아무래도 우리 여왕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다. 최근에 이래저래 부려먹기도 했고 칼리나랑 지내느라 꽤 오랫동안 방치하기도 했으니 나중에 ‘힐데 어르고 달래기 스폐셜’로 적당히 케어해줘야겠다.

어쨌든 그건 나중 문제고 지금은 눈앞에 찾아온 하이르 앗 딘을 요리할 시간이다. 원래 맛있는 건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 아니던가.

그 때문에 난 도끼를 들고 말을 몰아 그의 앞으로 뛰쳐나가며 서프라이즈계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대사를 내뱉었다.

“서프라이즈 마더 퍼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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