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3화
“하, 벨렌테 그 개자식이 도망쳤다고!?”
“예… 예.”
전령의 말에 죽일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이르 앗 딘은 이내 전령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푸하하하하, 혹여 날 놀라게 하려는 농담이었다면 칭찬해주지. 솔직히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지 뭔가. 그래도 이런 농담은 앞으로 삼가 주게.”
“죽여주십시오.”
그 말에 하이르 앗 딘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의 눈가는 쉴 새 없이 씰룩였으며 입가에 난 수염은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빨리 재미없는 농담이었다고 얘기하란 말이야!!!”
“…….”
하지만 전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결국 하이르 앗 딘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뒤집어엎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바닥에 내던지며 분노를 표출했다.
“이런 멍청한 새끼들! 내가 시킨 일이 그렇게 어려웠나!? 산이나 숲을 뒤져서 라그나르 그 개새끼를 조지라는 것도 아니고, 제 발로 감옥으로 걸어들어오는 놈을 사로잡으라는 명령이 그렇게 어렵고 힘들어서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
평상시라면 주변에 있던 이들이 말렸을 테지만, 측근과 참모들 역시 어이가 없고 화가 나 있었기에 하이르 앗 딘의 분노는 오롯이 전령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하이르 앗 딘은 화를 내는 내내 끊임없이 오른손을 꼼지락거리며 당장이라도 허리춤에 걸려있는 칼을 뽑으려 했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지금 여기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전령을 죽여버리면 벨렌테를 놓친 이유를 알 수 없을 테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저들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잖은가.
“후우, 좋아. 해명할 기회를 주지.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천 명이나 되는 인원이 눈앞에서 코가 베이는데도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었는지 세 살짜리 어린애도 이해할 수 있게 얘기해봐.”
하이르 앗 딘의 으르렁거림에 전령은 두 눈을 질끈 감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갑작스레 안티베에 한파가 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몰아쳤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늘에는 수많은 유령 기수들과 늑대들이 저희를 사냥하기 위해 허공을 배회했고 대지에서는 망자가 되살아났습니다.”
“뭐?”
“미,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그건 또 뭔 참신한 개소리지?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내뱉는 건가?”
“제독님. 말을 하는 저조차 믿을 수 없지만 이게 진실입니다.”
“하,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네놈들이 단체로 약이라도 빨았나 보구나.”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하이르 앗 딘은 칼을 뽑았고 전령은 그 즉시 바닥에 무릎 꿇으며 통곡하듯 소리쳤다.
“제독님. 직접 겪은 저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제독님께서 이해할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모두가 저와 똑같은 현상을 겪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혹여 저희가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좀 더 그럴듯한 얘기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이 일견 그럴듯했기에 하이르 앗 딘은 휘두르려던 칼을 멈추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하긴, 상식적으로 변명을 하려면 좀 그럴듯한 얘기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네놈이 얘기하는 소위 그 ‘환각’을 보기 전에 특이사항이 있던가?”
“어… 그, 라그나르 휘하의 병력들이 남부에 불을 지른 뒤 가볍게 공격을 하며 저희를 도발했습니다.”
“불을 질렀다고?”
“예. 바람이 저희 쪽으로 불고 있어서 수성을 방해하는 한편 라그나르를 성안에 들여보내기 위해 수작을 부린다 생각하고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령의 말을 들으며 하이르 앗 딘은 생각을 정리했다. 정확한 방법은 알 수 없지만 그 교활한 야만인은 벨렌테를 탈출시키기 위해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었다. 자신은 거기에 꼼짝없이 걸려들었고.
물론 이렇게 생각을 정리했다고 화가 가라앉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안티베에 보낸 병력만 천 명이었다.
대여섯 명도 아니고 무려 천 명이나 되는 병력이 허수아비마냥 농락당했다는 건 씻을 수 없는 불쾌감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하이르 앗 딘은 냉정하고 침착하게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았다. 애초에 여기서 더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만일 눈앞의 전령을 참수하고 안티베에 갔던 놈들을 전부 죽여서 상황이 나아진다면 몇 번이든 죽일 테지만,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제 자신은 인질이라는 밧줄로 억압하고 있던 제노바의 분노를 베네치아의 도움 없이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 분노를 받아내지 못하는 그 순간, 자신도 끝날 터였다.
“빌어먹을.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정말 여기가 내 무덤이 되겠군.”
* * *
<제노바 항구>
벨렌테가 하이르 앗 딘의 손에서 벗어나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에 총독을 비롯한 제노바의 유력 가문의 수장들 전부가 항구에 나와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포로가 된 지 3년 만에 벨렌테가 돌아오자 총독은 자신의 장성한 아들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글썽였고 다른 가문의 수장들 역시 진심으로 벨렌테의 귀환을 축하해주었다.
정치적으로 총독을 견제해야 함은 맞지만 애초에 벨렌테가 포로로 붙잡힌 건 하이르 앗 딘의 마수로부터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포로가 되는 걸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무리 그가 총독의 하나뿐인 아들이라지만 인질로서 효과를 본 이유였다.
스스로 고귀하고 고결한 모습을 보여준 총독의 아들이 죽건 말건 하이르 앗 딘을 공격한다? 제노바의 민심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이야기였다.
그 때문에 적어도 오늘만큼은 서로 생각하고 있는 게 달라도 너나 할 것 없이 벨렌테의 귀환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가 자유를 되찾았다는 건 제노바를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이 풀렸다는 걸 의미하니까.
“총독 각하. 기쁨의 해후는 잠시 미뤄둬야 할 때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벨렌테의 말에 총독은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벨렌테는 흔들림 없이 얘기했다.
“무릇 상인의 본분은 은원을 철저히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은혜와 원수를 한 번에 갚을 기회가 왔습니다.”
벨렌테의 말에 총독의 눈에도 귀기가 깃들었다. 아들이 돌아왔다는 기쁨이 앞서 원흉에 대해 생각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말이 옳다. 은원을 철저히 하고, 맺은 계약을 반드시 완수하는 것. 그게 바로 상인이 지켜야 할 덕목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하여 제가 직접 배 위에 올라 하이르 앗 딘을 처단하고 싶습니다.”
돌아오자마자 쉴 틈도 없이 전선에 나서길 희망하는 아들의 말에 총독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괜찮겠느냐?”
“복수는 제 손으로 해야 의미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마냥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던 아들의 말에 총독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했다.
“좋다. 함대를 끌고 나가서 우리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제노바의 힘과 분노를 온 세상에 보여주거라!”
* * *
<니스 근방, 검은 용군단 주둔지>
“변경백 각하. 라그나르 경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기사 서임도 받은 적 없고 개종도 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야만인이긴 하지만 그 누구도 라그나르가 경이라는 칭호를 받는 데 토를 달지 않았다.
“라그나르가? 데려오게.”
칼리나의 허가에 라그나르가 보낸 전령이 들어오자 그녀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전령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전령은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이야기했다.
“라그나르 경께서 제노바 총독의 아들, 조반니 2세 벨렌테를 안티베에서 무사히 구출했다고 합니다.”
그 소식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칼리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 없이 환호했다. 하지만 용군단의 수장으로서 그런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일 순 없기에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허어,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구출에 성공했다는 말입니까?”
“일신의 무력이 뛰어난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정말 놀랍군요.”
그 이야기를 들은 영주들은 놀라워하며 라그나르를 극찬했고 그 모습에 칼리나는 저도 모르게 콧대가 올라갔다.
비록 자신이 한 일은 아니지만, 자신의 남자가 영주들에게 인정받는 건 썩 괜찮은 기분이었다.
거기에 전령에게 보고받기로 벨렌테를 구출한 게 약 일주일 전쯤이니 지금쯤이면 그가 제노바에 도착함은 물론 분노한 제노바의 함대가 니스를 초토화시키기 위해 달려오고 있을 터였다.
“라그나르라면 능히 해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보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겠지요.”
“다시 이를 말입니까. 검은 용군단의 이름으로 반드시 그를 참수해서 위상을 드높여야 합니다.”
“쥐새끼가 도망치기 전에 좀 더 행군속도를 높이시지요.”
“하이르 앗 딘을 참수하고 정의를 집행한다면 그 누가 저희의 진의를 의심하겠습니까.”
영주들. 특히 니스와 가까운 곳에 있는 프로방스의 영주와 남편을 잃은 알본의 베아트리체가 강력하게 동의했고 칼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행군속도를 높였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이 전쟁의 주연은 하이르 앗 딘이었고 그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친다면 주인공 없는 파티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 불상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 * *
벨렌테에게 자유를 선물해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칼리나의 본대에 합류했다.
내가 보낸 전령이 생각보다 빨리 칼리나에게 도착했는지 그녀의 본대는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니스에 도착해 있었다.
이미 공성 캠프까지 만들어지고 방어용 울타리까지 만들어져 있는 걸 보면 못해도 사흘 전에 도착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도 공격을 안 하고 포위만 하고 있던 건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생이란 고생은 내가 다 했는데 자기들끼리 맛있는 부분만 쏙 빼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리고 실제로 내가 공성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칼리나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맞이해주었다.
“어서 와. 내 사랑. 정말 고생했어.”
“이 정도야 기본이지.”
“나를 구원해줄 때도 그랬지만, 당신에게 불가능이란 건 없어 보이네.”
“내가 능력 있는 남자긴 하지.”
다소 뻔뻔한 내 말에 칼리나는 키득거리며 웃더니 진중한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왔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할 거야. 선봉에 서줄 수 있겠어?”
그녀의 말에 나는 말을 멈추고 내 버프창을 들여다보았다.
<버프 상태>
용의 분노(칼리나 디 카노사) ― 휘하 병력들의 투지 증가.
카노사의 의지(칼리나 디 카노사) ― 적의 모든 디버프를 해제.
정의 집행(칼리나 디 카노사) ― 명분이 있는 전쟁이라면 전투력이 대폭 상승.
고결한 복수자(알본의 베아트리체) ― 복수 대상을 상대로 전투력이 대폭 증가.
사기 진작(사보이의 험버트) ― 사기가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강인한 지휘관(살루조의 만프레드) ― 병사들의 전투력이 상승.
뛰어난 책략가(몽페라토의 윌리엄 5세) ― 일정 확률로 적을 혼란 상태에 빠뜨리며 기습 확률 소폭 상승.
불굴(프로방스의 라몬 베렌게르) ―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을 가지게 된다.
대충 훑어봤을 뿐인데 이건 뭐 다 죽어가는 환자도 되살릴법한 버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이 정도 수준의 버프라면 징집병을 가져다 놔도 그보다 2~3티어 정도 높은 정예병을 학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추가로 힐데와 이비, 내 버프까지 합쳐진다면 나는 살아 움직이는 인간분쇄기이자 인간 백정, 도끼 살인마 그 자체가 될 터였다. 뭐, 안 봐도 비디오지.
“바이킹에게 선봉만큼 영광스러운 자리는 또 없지.”
“당신이라면 그렇게 얘기해줄 거라 믿고 있었어.”
내가 승낙하자 칼리나는 내가 선봉장임을 모두에게 밝혔고 다른 귀족들도 전부 납득했다. 선봉이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였고 나는 마땅히 그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었으니까.
거기에 서로 간에 미묘한 알력과 이전의 관계가 있던 만큼 그들 입장에선 누구 하나가 선봉을 차지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나를 밀어줘서 칼리나에게 잘 보이는 게 더 이득이기도 했고.
그렇게 해가 떠오르며 어스름한 새벽을 걷어내자 칼리나는 말 위에 올라 칼을 뽑아 들었다.
“자랑스러운 나의 병사들이여!”
그녀는 그 작은 체구에 걸맞지 않게 아군은 물론이요 성벽 위에서 긴장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는 적군들까지 들을 수 있게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늘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 정의를 집행할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신께서 함께할 것이며!”
“최후의 승자는 우리가 될 것이니!”
여기까지 얘기하고 잠시 숨을 고른 칼리나는 이내 들고 있던 칼을 앞으로 쭉 뻗으며 소리쳤다.
“하이르 앗 딘을 처단하고 이 땅에 정의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라!!!!!”
칼리나의 외침에 호응해 여기저기서 우렁찬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사기가 잔뜩 오른 병사들은 니스를 향해 돌격했다. 물론, 그 최선두에 내가 서 있던 건 더 말할 것도 없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