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2화
“…오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리가 여덟 개 달린 말 위에 넓은 챙이 쳐진 모자를 쓰고 낡은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이곳에 강림한 순간 시간이 멈췄다. 정확히는 나와 눈앞의 오딘을 제외한 모든 게 멈췄고 오딘은 슬레이프니르를 몰아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코앞까지 다가온 오딘은 나를 보며 작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이내 들고 있던 신창, 궁그닐을 치켜들었다.
저게 뭘 하려는 행동인지 깨달은 나는 저항하려 했지만 내 양손과 양발은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 글레이프니르에 속박됐습니다. 움직임이 제한됩니다.
이런 시팔, 진짜 묶여있었네. 왜 늑대 새끼를 묶어야 할 줄로 날 묶는 거지? 혹시 오딘은 SM 취미가 있는 것인가? 나를 괴롭히면서 기뻐하는 것인가?
내가 이런 불경한 생각을 품고 있건 말건 오딘은 치켜들었던 궁그닐을 그대로 내리꽂았다. 아니, 어쩌면 이런 내 생각을 꿰뚫고 화가 나서 찌른 게 아닐까?
이유야 어찌 됐건 오딘의 창은 내 눈을 꿰뚫었다. 신기하게도 통증은 없었는데, 곁눈질로 창이 내 눈구멍에 푹 들어온 게 보이는데 통증이 없다는 건 굉장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렇게 주사라도 놓는 것마냥 가볍게 내 눈을 찌른 오딘은 날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기수를 돌려 사라졌고 탈색되었던 세계가 점차 본래의 색을 되찾음과 동시에 시간도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멈춰있던 통증도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눈에 불을 지른 것마냥 통증이 이어졌고 나는 너무 아파서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바닥을 굴렀다.
“시발… 자기가 애꾸라고 나까지 애꾸를 만들려고 하다니.”
그나마 다행인 건, 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하긴 하지만 시력이 살아있다는 점이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창으로 눈알을 찌르고 휘휘 저었는데 고작 피만 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괘, 괜찮으십니까?”
총독의 아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멀쩡하던 사내가 눈에서 피를 흘리며 죽겠다고 나뒹굴면 그야 당황할 법도 하겠지. 하지만 갑자기 믿던 신이 나타나서 눈을 찌르고 간 나에 비할까?
“이런 시발. 자네는 이게 괜찮아 보이나?”
“그,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다행히 통증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이내 흐릿한 시야 사이로 시스템 로그가 떠올랐다.
― 잃어버린 오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진실을 꿰뚫어 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굳이 더 살펴보지 않아도 됐다. 말 그대로 오른쪽 눈과 왼쪽 눈으로 보는 시야가 달랐으니까.
왼쪽 눈은 서리가 내린듯한 바닥과 휘몰아치는 바람,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여 안식을 취하고 있어야 할 망자들이 땅바닥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도망… 허억! 마, 망자가!!!”
아무래도 내가 왼쪽 눈으로 보는 세상은 다른 이들이 보는 세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오른쪽 눈에 비치는 세상은 와일드헌트가 시작되기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다소 퀴퀴한 냄새가 나며 여기저기 축축한 곰팡이가 펴있고 오물이 묻어 있으며 안에 있는 것만으로 기가 빨릴 것 같은 그런 감옥의 풍경. 그게 전부였다.
즉, 오른쪽으로 보이는 광경이 진실이며, 왼쪽 눈으로 보는 광경은 거짓이자 환영이라는 얘기였다. 와일드헌트를 써본 건 처음이지만 이런 식으로 적용되는 모양이다.
“여기서 도망치게 해주려고 찌른 건가?”
정황상 그래 보이지만 원체 신들은 제멋대로에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잘 모르겠다. 특히나 오딘은 다른 신앙에 나오는 주신들보다 더 음험하고 어두우며 교활한 모습을 보여주니까.
“예? 그게 무슨, 흐이이익! 그보다 저, 저 망자들 좀… 해, 해골이!!”
“쯧쯧, 헛것이 보이는 걸 보니 감옥에서 많이 힘들었나 보구만.”
“저기 저 저주받은 언데드들이 안 보이신단 말입니까?”
“겁에 질려서 덜덜 떨고 있는 자네는 보이네만.”
물론 당연히 나한테도 보이지만 굳이 ‘와! 와일드헌트 아시는구나! 와일드헌트 겁.나 멋있습니다. 와일드헌트는 오딘이 이끄며 그들의 무리는…’ 이러면서 설명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냥 모르는 척 총독의 아들이 정신병에 걸렸다 치부하고 안티베를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와일드헌트는 안티베에 한정된 현상이고 이곳을 벗어나면 그도 자신이 헛것을 봤다고 생각할 테니까.
“전능하신 예수이시여, 영원한 빛으로 날 보호하소서. 거룩하신 지혜로 날 이끄시고 내 가는 길 어둠에 싸여 있어도 신성한 빛으로 내 영혼을 이끄소서. 전능하신….”
“헛소리 그만하고 눈이나 감게.”
“예?”
“말로 하긴 좀 길어질 것 같은데 그냥 얌전히 눈 감고 있으면 집에다 데려다주겠다는 얘기네. 자네가 자꾸 헛것이 보인다고 질질 짜면 내가 데리고 가는 게 힘들지 않나.”
내가 짜증을 담아 얘기하자 그는 내가 자신을 버리고 갈까 무서웠는지 서둘러 눈을 감았다. 그렇게 나는 털이 숭숭 난 사내의 손목을 붙든 뒤 왼쪽 눈을 감고 감옥 위로 향했다.
물론 총독의 아들은 눈을 감아도 다른 감각이 살아있기 때문인지 한기가 느껴질 때마다 비명을 내지르거나 질질 짜며 흐느꼈지만, 그래도 무사히 지하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게 가능했다.
물론, 간신히 나온 지상은 더 지랄 맞았다. 시스템 로그가 거짓이 아닌 듯 거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으며 하늘에는 유령 기수들이 날뛰고 있었다.
그들의 귀곡성인지 뭔지 모를 괴성이 하늘을 수놓았으며 늑대 무리는 도망치는 해적들을 물어뜯었고 까마귀들은 숨어있는 해적들을 찾아냈다.
물론 오른쪽 눈으로 봤을 때는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바지에 오줌을 지리며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고 있는 꼴이었지만.
더러는 자기들끼리 칼부림을 하고 있었기에 가끔 날아드는 눈먼 칼날만 조심하면 안티베를 빠져나오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정문을 통해 정정당당히 총독의 아들을 데리고 나오자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힐데와 이비, 용병들이 내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주군.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물론이지. 우리 귀여운 이비의 엉덩이를 팡팡 두들겨줄 정도로 멀쩡해.”
힐데와는 다르게 이비는 아직 내 천박한 말투에 적응이 되지 않았는지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라 했고 그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힐데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그렇게 세 치 혓바닥을 나불나불거릴 정도면 다친 곳은 없나 보군요. 아니, 머리는 확실히 다친 것 같기는 합니다만.”
“하하하, 누구보다도 걱정했던 주제에 틱틱거리기는.”
“가끔 생각합니다만, 당신과 제가 같은 말을 쓰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그래. 그보다 새롭게 소개할 친구가 있는데… 자네 이름이 뭐지?”
자신의 이름도 몰랐다는 사실에 그는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옷깃을 가다듬으며 얘기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얼굴에 질질 짠 흔적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저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제노바 공화국의 총독. 조반니 1세 멀타의 장남. 조반니 2세 벨렌테입니다.”
“그래. 이제 와서 새삼스레 통성명을 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일단 만나서 반갑네. 나는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고 하네. 편하게 라그나르라고 부르게.”
“벨렌테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보다 다시 한번 절 구해주신 데 깊이 감사드립니다.”
“단순한 선의로 자네를 구해준 건 아니니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힐데, 이비. 들었다시피 이 친구가 총독의 아들이야.”
힐데는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벨렌테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까닥 숙였고 이비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옥에 오랫동안 갇혀있었으니 건강상태가 좋진 않을 거야. 제노바와 접촉하기 전가지 이비 네가 상태 좀 봐줘.”
“알겠습니다. 주군.”
“이비는 내가 주치의를 맡길 정도로 뛰어난 의사니까 걱정하지 말게.”
“물론입니다. 헌데 라그나르 경. 대체 어떻게 절 구하신 겁니까?”
그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자네도 보지 않았나? 도둑놈마냥 몰래 감옥에 잠입한 뒤 헛소리나 지껄이는 자네를 들쳐메고 당당히 정문으로 걸어 나왔잖나.”
“…그게 이상하니까 그런 겁니다. 제가 알기로 라그나르 경을 붙잡기 위해 이곳에 모인 병력의 수만 500이 넘어갈 텐데 대체 무슨 수를 쓰신 겁니까?”
“궁금한가?”
“예.”
“나도 그렇네. 아마 내 위엄에 오줌을 지린 게 아닐까?”
“…….”
나름대로 농담을 던졌는데 별로 재미가 없는 모양이다. 힐데는 대놓고 질색팔색하는 표정이었고 이비의 가면 속 얼굴은 떨떠름하게 변해있겠지.
“농담이고 실은 대규모로 환각에 빠지게 하는 약초를 구해서 적들을 중독시킨 거라네. 저기 활활 타올라서 흩뿌려지는 연기가 보이나?”
“예.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보이는군요.”
“저게 환각 효과를 일으키는 풀을 태워서 그런 거라네. 바람이 성 안쪽으로 불 때를 노렸고 공성을 시도하는 척하며 성안의 수비병들을 중독시켰지.”
“그 틈을 타서 절 구출했다는 말씀이시군요.”
“자네 생각보다 똑똑하군.”
“헌데 그렇게 강하게 작용하는 풀도 있습니까?”
상인의 아들이라 그런지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아마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그 환각초의 무궁무진한 활용법이 떠오르고 있겠지.
물론 당연한 얘기지만, 적어도 이 게임 내에서 그렇게 강력한 효과를 지닌 풀은 없다. 단순히 태워서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환각을 보다니, 말도 안 되는 OP다.
“있으니 자네를 구한 게 아니겠는가. 자세한 내용은 비밀이니 묻지 말고. 그래도 하나 얘기해주자면 자네를 구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태웠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되네.”
“제가 그렇게 돈을 태우면서까지 구할 가치가 있다는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말이 잘 통해서 좋군. 이제 자네가 할 일은 내가 자네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과장을 조금 보태서 자네 아버지에게 얘기해주고 대기하고 있던 제노바의 함대를 출동시키는 일이네.”
“물론입니다. 저 역시 하이르 앗 딘에게 복수하고 싶으니까요. 장담컨대 저만큼 그에 대해서 복수심을 불태우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긴, 포로로 붙잡혀서 이리저리 끌려다녔으면 성인군자라도 눈 돌아가겠지. 군대에 2년 동안 끌려간 것도 화나는데 3년이 넘게 감옥생활을 했다? 젊은 나이에 미치지 않은 게 용하다.
“아주 훌륭한 마음가짐이야. 바로 이동하도록 하지.”
전쟁이 시작된 이후 제노바가 직접적으로 움직이진 않았지만, 배 하나 정도는 붙어 다닌 만큼 안티베 인근에서 어렵지 않게 연락선을 찾을 수 있었다.
신호를 보고 상륙한 배의 선장은 벨렌테를 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내게 감사 인사를 올렸고 나는 적당히 대꾸해주며 벨렌테를 향해 당부했다.
“총독에게 전해주게. 나는 약속을 지켰고 이제 제노바가 약속을 지킬 차례라고.”
“상인은 은혜는 2배로, 원한은 10배로 갚는 족속입니다. 하이르 앗 딘은 제노바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벨렌테가 복귀하면 며칠 내로 제노바의 함대가 해상을 봉쇄할 것이며 하이르 앗 딘은 꼼짝없이 니스에 갇히게 될 것이다.
“믿음직스럽군. 전장에서 만나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벨렌테는 떠나갔고 모든 임무를 마친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말 위에 올랐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가서 그런지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이제 느긋하게 독 안에 든 쥐새끼를 잡기만 하면 되는 건가?”
“라그나르. 늘 당신에게 하는 말이지만 언제나 조심하십시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깨무는 법입니다.”
“걱정하지마. 난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니까.”